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들
그는 17세기 황금기를 지나 그의 사후 거의 100여 년이 넘는 시기까지 오랫동안 스승인 렘브란트보다 더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네덜란드 화가로 자리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인상주의가 부상하고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2/83–1666)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75) 같은 화가를 재발견하면서 다우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약해지기 시작했고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헤리트 다우(Gerrit Dou, 1613-1675)는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출생한 바로크 화가이자 라이덴 학파의 대표적 화가이다. 또한 헤리트 다우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를 빛낸 화가이자 19세기 초까지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네덜란드 황금기를 빛낸 천재화가, 네덜란드 파인실더라이(fijnschilderij) 미술 그룹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헤리트 다우, 그는 1613년 4월 7일 라이덴에서 유리 제작자이자 조각가인 다우베 얀스(Douwe Jansz)와 마리티예 얀스드르 판 로젠부르크(Marytje Jansdr van Rosenburg)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다우는 처음에는 아버지로부터 유리 조각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다우는 1622년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구리 조각가 바르톨로메우스 돌렌도(Bartholomeus Dolendo, 1571년경~1629년경)에게 1년 반 동안 도제로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2년 반 동안 유리 화가 피터 쿠벤호른(Pieter Couwenhorn)에게도 사사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12살이 되던 1625년에서 1627년 사이에 이미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 조합에 등록을 한다.
그 후 다우와 그의 동생 얀(Jan, 1609년~1647년경)은 아버지 가게에서 일을 한다. 다우의 아버지는 아직 어린 다우가 유리를 다루는 게 너무 무모했던 것 같아서 사고를 당할까 봐 두려워 그의 아들을 그림 그리는 기술을 배우도록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근처에 사는 렘브란트에게 보낸다.
1628년 2월 14일, 14살 밖에 안된 다우는 그의 집에서 불과 100미터 밖에 안 떨어진 곳에 사는 이웃 렘브란트(당시 21세)의 도제로 들어간다. 다우는 렘브란트의 첫 번째 제자가 되어 동료 화가 얀 리벤스와 함께 라이덴의 작업실에서 도제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 얀 리벤스(Jan Lievens, 1607-1674)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로, 한 살 연상인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라이덴에서 태어나 암스테르담에서 피터 라스트만에게 사사했다. 또한 1631년까지 약 5년간 렘브란트와 리벤스는 같은 작업실을 사용했다. 리벤스 역시 렘브란트처럼 초상화와 역사화를 모두 그렸지만, 리벤스는 암스테르담을 떠나 런던, 안트베르펜, 헤이그, 베를린 등지에서 활동했다.)
렘브란트는 다우보다 불과 7살밖에 많지 않았는데 렘브란트는 이 시기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사용해 세련된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 이 기법은 다우의 작품에도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다우는 렘브란트가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할 때까지 3년간 그와 함께 지내면서 렘브란트로부터 채색 기술과 미묘한 명암법의 효과 등을 배운다. 그는 이 시기에 스승의 모든 기술과 스타일을 반영한 그의 초기 작품들 여러 점을 그렸다.
다우가 렘브란트의 작업실에 들어갔을 당시 그의 나이는 14세였고, 렘브란트는 21세였다. 이때 그린 다우의 작품 중 연대가 명시된 것은 없지만, 그의 그림 중 상당수가 스승의 작품과 화풍이 매우 유사해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다우와 렘브란트가 이 시기에 주제와 모델을 공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린 천재화가의 작품이 렘브란트 작품으로 오인될 정도라면 그의 수준은 분명 천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그동안 렘브란트의 주제 선택과 임파스토 기법, 세심한 드로잉,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표현을 모두 배웠다. 다우는 ‘모피 모자를 쓴 노인’(1630)과 ‘책을 읽고 있는 노인’(1631)을 렘브란트 화풍에 따라 배운 대로 그렸는데, 이 그림의 주인공은 사실 렘브란트의 어머니로 밝혀졌다. 당시 라이덴에 살고 있던 렘브란트 가족들이 그의 스튜디오에 자주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피 모자를 쓴 노인’(1630)과 ‘책을 읽고 있는 노인’(1631)은 다우가 17세인 1631년경 그린 유화 작품으로, ‘성서 읽기’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한때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여겨져 ‘렘브란트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우가 렘브란트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시절 그는 이미 렘브란트를 계승할 수준의 화가로 성장한 듯했는데 그 사이 다우는 "작고 미세하게 복잡한 것들을 그리는 작은 거인"으로 커가고 있었다.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으로 간 후, 다우는 계속해서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다우가 그리는 작품의 표면은 점점 더 매끄럽고 에나멜처럼 변해갔다. 또한 초기 작품에서 사용했던 따뜻하고 어두운 갈색 대신 더 차갑고 옅은 색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우는 렘브란트가 떠난 1631년에 아직 어린 18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인 렘브란트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첫 작업실은 부모님 집에 마련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다우는 조만간 고향인 라이덴에서 부모 곁을 떠나 독립해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다우는 자신만의 화법을 마련할 목적으로 고심 끝에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마련한다. 커다란 대작을 제작하기보다는 작은 크기의 목판에 그림을 그리고, 가능한 자신이 직접 그림 액자도 제작하도록 한다는 등의 원칙을 마련한다. 그는 이후 기법을 더욱 발전시켜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에나멜 같은 표면 표현을 완성하고 세부 묘사에 더욱 집중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당시 유행하던 임파스토 기법에서 벗어나 아주 세밀하고 부드러운 붓질을 함으로써 정밀하고 자연스러운 그림의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도록 한다. 파인쉴더(Fineschielder), 즉 ‘세밀화’라고 부르는 기법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우는 자신이 개발한 ‘세밀화 기법’을 공유하기 위해 라이덴의 동료들과 자신의 친인척들을 중심으로 파인쉴더(Fineschielder) 그룹을 형성한다. 다우는 그의 스승 렘브란트풍의 초상화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풍부한 소품 디테일이 돋보이는 가정 풍속화에 집중한다. 그의 색채는 더욱 차가워졌고, 기법은 더욱 정교해졌다.
다우의 작품의 분위기가 파인쉴더 화풍의 특징으로 에나멜처럼 매끄러운 표면을 보여줌으로써 17세기 네덜란드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게 된다. 그래서 그가 그린 정물화는 다우의 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Still Life'(1660)나 ’젊은 엄마‘(1658)에서처럼 그의 실내 풍경에는 정교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다양한 도구들과 물건들로 가득하다.
다우는 비교적 초기부터 렘브란트와는 상당히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발전시켜 섬세하고 정교한 화법을 개발해 왔다. 그 예로, 다우는 손 하나를 그리는 데 닷새를 보냈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은 이처럼 너무 세밀했기에 작은 그림이더라도 직접 붓을 제작해 사용해야 했다고 한다.
‘소년과 함께 토끼를 들고 있는 여인’(패널에 유채. 53.2 x 37.8cm)은 2023년 10월 11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7,068,000달러(약 1000억 원)에 낙찰되어 다우의 작품 중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다.
이런 작품들은 다우가 보여주는 세밀한 화풍의 걸작이라 할만하다. 양동이 아래 구겨진 낡은 천, 창틀의 매끄러운 돌, 오리 날개의 깃털, 가슴과 저울을 들고 무게를 재는 여인, 소쿠리에 담겨있는 야채 등, 그리고 창가에서 들고 있는 토끼의 모습과 야채, 주전자, 홍당무 등등 다양한 소재의 표면과 질감을 묘사하는 데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지녔는지 보여주는 최고의 예시라고 하겠다.
다우는 1625년(12세)부터 1627년(15세)까지 유리세공 조합의 일원이었는데 그의 어린 시절 경력과 후기 패널화에서 나타나는 매끄럽고 광택 있는 표면 효과 사이에 분명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함께 다우는 그의 가장 특징적인 또 다른 기법으로 그림 속에 또 다른 액자를 덧입힌 듯한 구성을 보여준다. 마치 관객들이 다우가 그린 그림 속 창문을 통해 집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 준 것이다. 이 작품에서 처럼 많은 작품들이 반원형의 건축적 배경을 사용했는데, 이는 다른 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매우 특이한 묘사법이었다. 이 기법은 고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그림에 깊이감을 부여하는 효과도 있었다.
다우는 창문을 통해 보이는 인물이나 풍경을 묘사한 새로운 하위 장르인 '창문 그림'을 그린 작품 ‘가판대 주인’(1647, 루브르 박물관, 파리)을 선보였다. 1650년대 후반부터 그는 빛의 효과에 더욱 집중했는데, 특히 두 가지 유형의 야경, 즉 인공조명으로 비춘 풍속화와 촛불이나 램프 불빛 아래 창문 앞에 선 여인상을 통해 이를 표현했다.
이 그림들은 소위 "니치 픽션" 또는 "창문 니치"로 알려진 유형이다. 인물은 창틀에 둘러싸여 있으며, 창턱과 커튼은 그림 공간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창문 주변의 풍경이나 창밖으로 몸을 내민 인물은 1640년대 중반부터 다우의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이덴에서 이제 다우의 명성은 서서히 퍼져나갔다. 그의 명성이 이처럼 유명해지게 된 데에는 일상생활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들, 특히 '닭고기 가게'와 같이 아치형 석조 공간에 그려진 그림들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림들을 사람들은 '니치 페인팅'(Niche Painting)이라고 불렀다.
다우가 대중화한 또 다른 요소는 인공조명의 사용인데, 다우의 그림에서는 젊은 여인이 들고 있는 촛불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형태의 구도는 다우의 1650년대 그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이다. 강한 빛과 강한 그림자의 대비가 그림 속 주인공에게 집중력을 높이고 있다.
창문 아랫부분의 장식 또한 작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푸토(아기 천사)들이 있는 부조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부조는 1650년대 초부터 이와 유사한 작품을 제작했던 플랑드르 조각가 프랑수아 뒤케누아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다우는 풍속화, 역사화, 정물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들을 그렸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모두 크기가 작았다. 다우는 1650년대부터는 촛불이 비추는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카라바조풍의 화풍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다른 화가들이 그렸던 역사화나 대작이라는 작품의 범주를 완전 탈피하고 그의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밀하게 묘사된 ‘작은 풍속화’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다우의 ‘작은 풍속화’는 놀라운 성공을 거둔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17세기부터 그가 사망한 후 19세기 후반까지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추앙받으며 때로는 렘브란트의 작품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당시 라이덴에서는 '가게 주인'처럼 젊은 여성이 가금류와 사냥감을 사는 일상적 장면을 묘사한 작품들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648년에 다우는 라이덴의 ‘성 루카 길드’를 창립한다. 그가 이 길드를 창립할 무렵 그의 그림은 이미 당대 최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헤이그 주재 대사 피터 스피어링(Pieter Spiering, 1594~1652)은 다우의 작품을 여왕이 우선적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매년 500 길더(현재 시세 대략 5천만 원 정도)를 지불했다고 한다.
연간 500 길더의 지원금은 다우에게 보장된 수입을 제공했다. 숙련된 노동자들이 하루에 1 길더(약 10만 원 정도)를 벌던 시대에, 다우가 받은 500 길더는 그의 미술활동에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1660년 네덜란드 의회는 영국의 찰스 2세의 왕위 복귀를 기념하여 그에게 선물로 다우의 그림 2점을 포함시킨다. 그중 하나는 현재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품인 '젊은 엄마'(1658)로 알려졌다.
찰스 2세는 다우의 그림에 감명받아 이후 다우를 영국으로 초청하여 왕실 화가로 일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다우는 이를 거절하고 라이덴을 지킨다. 실제로 다우는 고향인 라이덴을 거의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작품은 라이덴에서 처럼 유럽 왕실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웨덴 대사 피터 스피어링은 다우의 작품을 최소한 13점 이상 구입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중에서 여러 점을 스톡홀름의 크리스티나 여왕(1626–89)의 궁정으로 보냈다고 한다.(* 현재 다우의 작품들은 스웨덴 국립미술관 소장) 또한 빈에 있던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1614–62)이 1661년에 다우의 그림 두 점을 소유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현재 비인 국립미술관 소장)
코시모 3세 데 메디치(1642–1723)도 다우의 작품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의 여행 일지에 따르면, 그는 1669년 6월 23일에 라이덴에 있는 예술가의 작업장을 방문했고, 코시모가 토스카나 대공이 된 1676년에 그는 암스테르담 대리인에게 다우의 작품을 확보하라고 지시를 했다고 한다.
1665년에는 지역 수집가 요한 데 바이가 다우의 작품 27점을 전시하기 위해 전시회 장소로 쓸 장소를 물색했는데 이는 한 화가의 작품만을 전시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다우의 주요 고객으로 라이덴에서 유명한 의사 프란치스쿠스 드 레 보에 실비우스(1614~72)도 있었다. 그는 라펜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웅장한 저택에 다우의 그림 10점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7세기 라이덴에서 다우의 원본 작품을 소장했던 또 다른 10여 명도 있었는데 모두 이 도시의 엘리트 계층에 속했던 고객들이었다.
다우의 국제적 명성을 고려하면, 그가 세계적인 도시 암스테르담보다 라이덴을 선호했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의 작품에 대해 받을 수 있었던 높은 가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다우의 작품가격이 너무 비싸서 1669년 라이덴 시의회는 그에게 그림을 주문하는 것을 단념했다고도 한다.
당시 손바닥 만한 다우의 작품은 600, 800, 1,000 길더, 또는 그 이상의 가격에 팔렸다고 한다. 이러한 가격은 작가의 명성과 작품의 예술적 수준뿐만 아니라, 시간당 6 길더(현재 가치 약 60만 원 정도)라는 엄청난 가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다우는 피터 스피어링이 자신의 아내 초상화를 의뢰했을 때 다우는 스피어링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에 나오는 손등을 그리는데만 5일을 보냈다고 한다. 다우의 작업 방식이 얼마나 힘들고 노동 집약적이었는가를 고려하면 이러한 시간당 가격은 그림의 가격이 상당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덴에는 다우의 작품에 그렇게 높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미술 애호가들이 있었다는 사실 역시 놀랍다고 해야 할 것이다.
라이덴은 여러 가지 자랑거리를 지닌 도시이다. 그중 하나는 유럽에서 가장 초기에 조성된 식물원이 있는 도시인데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튀르키에에서 가져온 튤립을 처음 심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라이덴에는 1575년에 개교한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학자와 과학자들이 라이덴 대학으로 대거 모여들게 된다. 이런 상황은 다우에게 고향에서 자신의 회화적 이상을 높이 평가하는 세련된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다우는 1640년에 라이덴 중심가인 ‘Korte Oude Vest’(현재 Galgewater)에 2,000 길더(현재 가치 약 2억 원 정도)를 주고 집을 구입한다. 다우는 이 집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다우는 여전히 결혼하지 않았고, 평생을 홀로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다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126 점 중 그는 1660년에서 1670년 사이에 42점을 그렸다. 그러나 다우는 1675년 초에 사망하고, 2월 9일에 라이덴에 있는 피터스교회(Pieterskerk)에 묻힌다. 그는 상속인들에게 약 20,000 길더 상당의 재산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상업적 성공을 보여준다.
다우는 1675년 2월 9일 라이덴의 피터스 교회에 묻혔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집은 화가 도미니쿠스 반 톨(1635~1676년경)의 여동생이자 다우의 조카딸인 안토니아 반 톨(1684년경 사망)이 한동안 운영했다고 한다. 안토니아는 1669년경부터 삼촌인 다우와 함께 살았지만, 아마도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리트 다우의 예술은 단순히 사실적 묘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우는 이미 어릴 적 그린 작품에서부터 스스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작이 바로 그가 22세에 그린 '플루트 연주자'(ca.1635) 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풍부한 상징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플루트 연주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그림의 가장 명확한 상징은 '피리'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같다. 피리 음악은 본질적으로 덧없고 허무를 상징하는데, 이는 모래시계, 바이올린, 책, 지구본과 같은 다른 바니타스적 요소들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이 요소들은 시간과 지식, 그리고 세속적인 욕망의 덧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플루트 연주자‘는 35.7 x 29.2cm 크기의 작은 그림인데, 렘브란트가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떠난 이듬해인 1632년에서 1635년경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다우의 첫 음악가 묘사 작품인데 2025년 12월 2일에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고전 명화 경매 최고가로 출품되었다. 최종 3,832,000파운드(약 76억 원)에 판매되기도 했다. '플루트 연주자'는 여러 저명한 영국 수집가들을 거쳐 캐리스포트 백작의 소유가 되었는데 현재까지 그의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125년 만에 처음으로 시장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그림에서 한 젊은 남자가 탁자에 앉아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위를 막기 위해 모피 장식이 달린 튜닉을 입고 있으며, 극락조 깃털이 달린 베레모를 쓰고 있다. 그의 얼굴은 왼쪽에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다.
방 안에는 빈 공간이 거의 없다. 탁자를 덮고 있는 낡은 탁자보 위에는 지구본과 커다란 책이 놓여 있다. 연주자 뒤쪽 벽에는 바이올린이 걸려 있고, 한쪽으로 걷힌 커튼 사이로 선반 위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다우는 장면을 매우 풍성하게 구성함으로써 다양한 재료, 질감, 반사를 사실적으로 포착하는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왼쪽 상단 부분만 보더라도 커튼의 천, 바이올린의 나뭇결, 창가의 벗겨진 벽면, 유리창의 금까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탁자 위에 펼쳐진 커다란 책, 즉 토비아스가 아버지의 눈먼 병을 고치는 장면을 묘사한 [토빗] 책에서 고개를 돌리고 관객 쪽을 바라보며 연주하는 젊은 음악가는 세속적인 쾌락과 영적인 헌신 사이의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또 다른 도덕적 차원을 제시한다. 그림 속 탁자 위에 있는 책의 네덜란드어 제목은 “사제들은 어떻게 봉사하는가”로 보이며, 이는 그 책이 가톨릭 전례서 또는 예배서임을 암시한다.
이 그림은 ‘플루트 연주자’와 동일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으나, 그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이 그림 속 장치(?)들 역시 주목할 만하다. 탁자 위의 지구본과 선반 맨 위의 지구본 1개가 있다. 탁자 위의 지구본에는 라틴어로 '바다'를 뜻하는 'mare‘가 대문자로 쓰여 있는데, 이는 이 지구본이 천체 지구본이 아닌 지상 지구본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상징성은 네덜란드의 전지구적 세력 팽창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7세기 동안 네덜란드는 해상력을 바탕으로 국제 무역을 장악하며 더욱 부유해지고 강력해졌다. 예를 들어, 이 음악가의 베레모에 사용된 깃털은 뉴기니 섬이 원산지인 이국적인 새의 깃털이었는데 다우가 살던 시대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이 섬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니타스 회화에서 지구본은 어떤 세속적인 정복도 죽음의 불가피성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우가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시기가 1620년대 중반 라이덴 인구의 5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간 흑사병 대유행 이후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죽음은 그들 곁에서 언제나 매우 친숙한 위협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플루트'를 연주하든 '비올라'를 연주하든지 간에 인간이 처한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림 속 도구들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단순한 기교 과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바라보는 행위, 해석, 그리고 시간의 본질에 대한 사려 깊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성찰이기도 하다.
다우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경외심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은 가장 중요했던 과제처럼 보인다. 다우가 '은둔자'라는 제목의 그림을 11점이나 그렸던 것을 상기하면 충분히 이해할만하겠다.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을 입은 늙은 은둔자가 손을 성경책 위에 얹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고 있는 이 그림에서 다우는 해골, 모래시계, 꺼져가는 등불의 불빛과 같은 요소들을 통해 인간 삶의 덧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우의 그림이 당시에 높이 평가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삶에 대한 절대적 보편성을 상징으로 풀어내려 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우의 또 다른 작품 '회개하는 막달레나' 역시 성서이야기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부활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 속 해골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또 다른 악기 연주자가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작은 풍속화 '클라비코드를 연주하는 여인'(1665)의 묘사는 가히 인상적이라 하겠다. 그림액자 속 태피스트리가 걷히자 어두컴컴한 방에 젊은 여인이 홀로 앉아 클라비코드를 연주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녀는 뚜껑이 달린 휴대용 건반 악기 클라비코드를 연주하고 있다. 왼쪽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여인을 비추고 있고, 방 곳곳에는 흩어져 있는 정물들이 보인다.
천장에는 빈 새장이 매달려 있고 왼편에 조각된 나무 의자 위에 붉은 벨벳 쿠션, 포도 덩굴로 둘러싸인 물병과 황동 대야, 그 곁에는 커다란 비올라가, 그리고 방금 전까지 연주를 했는지 악보집이 펼쳐져 있고, 은쟁반에 놓인 와인잔이 있는 탁자도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손을 뻗어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여인은 마치 누군가 그녀의 은밀한 연주를 잠시 방해한 듯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비올라를 연주하며 함께 듀엣을 할 연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의 연인을 대신해 함께 노래할 사람은 바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이 아닐지.
다우의 이 작품은 1665년 다우의 후원자였던 요한 데 바이가 라이덴에서 주최한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는데, 이 전시회는 아마도 생존 화가의 작품을 단독으로 전시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이 그림들은 다우가 이 주제에 대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했는지를 보여준다. 다우는 여전히 늘어져 있는 테피스트리 커튼의 섬세한 직물과 질감 묘사, 그리고 연주하다가 고개를 든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방 안의 다른 인물들에게로 향한다. 버지널을 연주하는 여인의 앞쪽을 지나면 멀리 창가에서 클라비코드를 연주하는 여인이 보이고 그 곁에 클라비코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듯한 남성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은 아마 와인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고, 여인은 기분 좋은 상태에서 신나게 연주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 곁에서 어린 소년은 그들의 술잔을 채워주는 서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전경의 여인은 버지널을 연주하고 있는데, 이는 클라비코드보다 훨씬 큰 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혼자 연주하기 다소 지루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주를 하고 있을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버지널을 연주하는 젊은 여인’은 ‘클라비코드를 연주하는 여인’ 보다 훨씬 더 시끌벅적하고 향락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그림은 삶의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클라비코드를 연주하는 여인’이 남성 애인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했을 수도 있지만, ‘버지널을 연주하는 젊은 여인’은 남성을 즐겁게 해주는 인물이라는 점을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다우의 세심한 화풍은 라이덴 화가들과 인근의 델프트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도 보인다. 페르메이르는 비슷한 시기 건반 악기를 연주하는 여성을 묘사한 실내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중 유명한 작품은 167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한 ‘버지널 앞에 서 있는 여인’(1670-72, 런던 내셔널갤러리)과 ‘버지널 앞에 앉아 있는 여인(1670-72, 런던 내셔널갤러리)이 있다.
그는 17세기 황금기를 지나 그의 사후 거의 100여 년이 넘는 시기까지 오랫동안 스승인 렘브란트보다 더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네덜란드 화가로 자리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인상주의가 부상하고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2/83–1666)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75) 같은 화가를 재발견하면서 다우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약해지기 시작했고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한편, 다우의 명성과 성공은 많은 제자들을 끌어들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프란스 반 미에리스(1635~81)로 그는 그의 스승의 파인쉴더 기법을 가장 잘 계승한 화가로 유명세를 떨친다. 또한 그는 가브리엘 메추(Gabriël Metsu)를 비롯해 10여 명이 넘는 제자를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