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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Feb 17. 2017

안녕 렘브란트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16


1.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그 이름만으로도 감동을 주는 화가, 그는 레이덴에서 풍차지기를 하는 아버지와 빵 굽는 집안의 딸로 태어난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9번째 아이로 태어난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종교는 중요한 삶의 요인중 하나였는데, 어머니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아버지는 엄격한 칼뱅파 개신교도였다. 렘브란트는 아버지를 따라 엄격한 칼뱅파 신자로 자란다. 그래서 그가 낳은 아이들 역시 칼뱅파 신자로 키운다.


렘브란트는 레이덴에서 대학에 입학을 하지만 잠시 라틴어를 배우는데 그치고 공부에는 별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림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러자 렘브란트의 부모는 렘브란트를 레이덴의 역사화가 야콥 반 스와넨부르흐(Jacob van Swanenburgh)에게 보내 그의 도제로 만들고 그에게서 3년 동안 드로잉과 해부학, 원근법 등의 기본기를 배우도록 한다.


그 후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 거주하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페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에게 6개월간 사사를 받는다. 비록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렘브란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그 후 레이덴과 암스테르담을 오가며 렘브란트는 개인적으로 여러 화가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미술교육을 받는다.


1) 레이덴 기차역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렘브란트의 집단초상화, 렘브란트의 고향임을 느끼게 해준다.

2, 3) 레이덴에 있는 풍차 2개, 왼편의 풍차가 렘브란트 아버지가 운영하던 풍차

* 레이덴에 있는 렘브란트 생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려 건물 벽면에 렘브란트 초상화를 걸어놓고 렘브란트 생가임을 알려주고 있다. 건물 옆은 렘브란트 초상화를 이젤에 걸어놓고 작은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 레이덴의 운하 모습들



그런데 드디어 렘브란트는 1629년 그의 나이 23세가 되자 당시 네덜란드의 유명 정치가인 콘스탄테인 후이헨스(Constantijn Huygens)의 추천으로 헤이그 법원이 구성하는 중요한 위원회의 위원이 된다. 이런 연고로 그 후 네덜란드의 프레데릭 핸드릭(Frederik Hendrik) 왕자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1646년까지 계속해서 구매를 해주기도 한다. 그 덕분에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에서 유명한 초상화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초상화 주문을 받게 된다.


1631년 렘브란트의 나이 25세가 되는 해에 드디어 그는 레이덴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사를 한다. 암스테르담은 활기가 넘치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세계를 누비는 뛰어난 상인들로 많은 부를 가지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이들에게서 초상화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초상화에 대한 사람들의 주문은 더욱 늘어나게 되고 렘브란트는 초상화 화가로서 본격적인 사업을 하게 된다. 초상화에 대한 수요는 기대 이상으로 많았기에 결국 그는 초상화 화가로서 대성공을 거둔다.


1632년에는 해부학 강의를 그려달라는 니콜라스 튈프 교수의 의뢰를 받는다. 그림은 튈프 교수의 강의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림이 완성되면 명망 있는 인사들이 드나드는 길드 홀에 걸릴 예정이었다. 튈프 교수는 외과의사였고 두 번이나 시장으로 선출된 인물이었다. 드디어 그림은 완성되었고 이 그림으로 렘브란트는 이제 집단초상화의 거두로 자리를 잡는다.


해부학강의, 1632, 마우리츠 박물관 소장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사를 했을 때 그가 처음 머물렀던 집은 예술품 거래상인 헨드릭 반 우일렌부르흐(Hendrick van Uylenburgh)의 집이었다. 그 덕분에 1634년에 렘브란트는 나이 28살에 헨드릭의 사촌인 사스키아(Saskia van Uylenburgh)를 만나 결혼을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네덜란드 북쪽에 있는 레바르덴(Leeuwarden) 시의 시장이자 변호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사스키아가 어려서 숨을 거두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사스키아에게 재산을 적지 않게 물려준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녀는 언니 헤트 빌트(Het Bildt)와 함께 살았는데 렘브란트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암스테르담에서 결혼식을 하지 않고 렘브란트와 사스키아의 친인척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네덜란드 북쪽 지방에 있는 성 안나파로키(St. Annaparochie)라는 조용한 시골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치른다.


네덜란드 북쪽지방에 위치한 성 안나파로클(St. Annaparochle)에 있는 교회



렘브란트는 이미 암스테르담에서 초상화 화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유명인사로 자리를 잡는다. 또한 이때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화가 조합의 회원이 된다. 이와 동시에 렘브란트는 그의 유명세 덕분에 많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어 어느새 암스테르담에서 유지로서의 위상을 행세하게 된다. 그 덕분에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차세대 화단을 이끌게 되는 화가들, 예를 들면 후에 네덜란드 역사화의 대가가 되는 페르디난드 볼(Ferdinand Bol)과 호페르트 플린크(Govert Flinck) 같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다.


1635년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암스테르담의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니베 돌렌스트라트(Nieuwe Doelenstraat) 거리에 있는 화려한 집을 하나 임대해 이사를 한다. 그 후 1639년이 되자 렘브란트 부부는 또다시 요덴브레스트라트(Jodenbreestraat 4,1011 NK Amsterdam)에 새로 지은 고급 주택 '브레스트라트‘(* Breestraat: 영어로 Broadway라는 뜻, 현재 ’Rembrandt House Museum‘으로 사용 중이다.)로 이사를 한다.


렘브란트는 이미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화가로 자리를 잡은 덕분에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 이사한 건물에서 렘브란트는 아뜨리에를 열고 제자들과 공동작업을 하거나 제자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을 한다. 하지만 1만 3천 길더라는 거금을 빚을 내 이사하는 바람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만다.


1639년 렘브란트 부부가 입주한 암스테르담에 있는 렘브란트 하우스, 현재 렘브란트 기념관으로 사용중이다.

* 암스테르담 렘브란트 하우스에서 가까운 곳에 렘브란트 작품 '야경'에 등장하는 시민군을 작품으로 만들어 놓은 공원이 있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겪게 되는 진짜 어려움은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그의 가정생활 그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렘브란트가 겪어야 할 수많은 시련들이 서서히 닥쳐오고 있었다. 그의 아들 룸바르투스(Rumbartus)가 1635년에 태어나지만 안탑깝게도 두 달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 둘째 딸 코르넬리아(Cornelia)가 1638년에 태어나 3주 만에 사망을 하는데, 또다시 1640년에 첫 번째 딸과 똑같은 이름을 붙인 코르넬리아(Cornelia)를 낳지만 거의 한 달을 못 넘기고 세상을 등지고 만다.


1641년 9월 22일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는 네 번째 아이를 낳는다. 아이의 이름은 티투스(Titus)였다. 위로 세명의 아이들을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모두 잃은 그녀는 근심 속에서 몇 달을 보냈는데 다행히 티투스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티투스를 낳은 지 1년이 채 안 된 1642년 6월 14일 서른 살의 나이에 사스키아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사스키아는 죽기 전에 유언장을 작성해두었는데, 자신의 유산을 렘브란트와 티투스에게 남긴다는 내용이었는데, 약 4만 길더의 유산을 렘브란트와 티투스에게 반반씩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사스키아의 유언장에는 렘브란트가 티투스의 영혼을 지켜주기를 바라며, 티투스를 고아원에 맡기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그리고 그가 만일 재혼을 한다면 유산은 무효가 된다는 조건도 붙어 있었다. 렘브란트가 티투스의 유모를 사랑했고 여성편력이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사스키아가 병이 들었을 때 게르트예 디르흐(Geertje Dircx)가 아들 티투스(Titus)의 간병인이자 간호사로 고용되는데 나중에는 렘브란트의 연인이 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렘브란트는 그녀와 이별을 선언한다. 그녀는 렘브란트를 혼인빙자로 고소를 하는데 법원은 렘브란트에게 그녀에게 벌금으로 매년 200 길드씩을 지급하도록 결정을 한다.


*2006년도에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서 렘브란트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 렘브란트 400주년을 기념하는 영상작품 공연과 팸플릿 전시 등이 있었다.

* 1) 렘브란트의 '야경'(1642),   2)'야경' 작품에 비추는 조명등 일부를 꺼버리면  나타나는 작품 속 또 다른 발광 작품 '야경', 마치 발광물질을 칠해 놓은 듯 하나의 작품을 가지고 마치 두 개의 작품처럼 보여준다. 400주년 특별전시회에서...

* 1715년에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이 작품을 옮겨 왔을 때 작품의 일부가 잘려(왼쪽에서 약 20% 정도가 제거되었다.) 있었다. 처음 제작된 작품 설치 시 왕궁의 벽면이 실제 그림보다 작아서 벽면 크기에 맞추느라 일부를 제거했다고 함.



그러나 1640년대 말경에 렘브란트는 처음에 그가 하녀로 부리던 헨드리크예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와 또다시 관계를 갖는다. 그러다 1654년에 그들은 코르넬리아(Cornelia)라는 이름을 가진 딸을 낳는데, 헨드리크예는 개혁 교회의 소환장을 받고 "그녀가 화가 렘브란트와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에 대한 답변을 해야만 했다. 이 일은 그녀와 렘브란트가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두 사람은 관습법에 따라 법적으로 결혼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렘브란트는 헨드리크예와 끝내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는다. 만일 렘브란트가 재혼을 한다면 사스키아가 아들 티투스를 위해 남긴 그녀의 유산을 모두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어느덧 종말을 향하고 있었다. 1668년 9월 4일,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가 그의 나이 스물일곱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년 후 1669년 10월 4일, 렘브란트도 예순셋의 나이로 예술가의 삶을 마감한다. 렘브란트는 사망 후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안네프랑크집 건너편에 있는 베스터케르크(Westerkerk)라는 교회에 안장된다.


그 후 그의 유골은 사후 20년이 지나면 대부분의 유골을 제거하거나 이장하는 교회의 규칙에 따라 다른 이름 없는 사람들 유골과 함께 교회에 속한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것이 그의 무덤인지 알 수가 없다. 렘브란트가 묻힌 베스트케르크 교회에는 그가 이 교회에 묻혔다는 사실을 적은 비문만이 걸려있을 뿐이다.


빛과 어둠의 향연을 즐긴 화가 렘브란트, 그의 삶은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강렬한 명암의 콘트라스트처럼 ‘빛과 어둠의 이중주’였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내리는 평가이자 칭송이었다.


* 암스테르담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베스터케르크(Westerkerk)에 붙어 있는 렘브란트 기념석

베스터케르크 교회첨탑에서 유일하게 암스테르담 시내 전경을 볼수있다. 오른쪽 앞에 '안네프랑크집'이 보인다.



2.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그는 네덜란드의 황금시기를 이끈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마술 감정사들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600여 점의 그림과 400점의 에칭, 그리고 2,000여 점의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고 하는데 1960년대부터 시작된 렘브란트 프로젝트에 따르면 렘브란트의 그림 300여 점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젊은 시절 누구보다 화려하고 당당한 생활을 영위하던 렘브란트는 그가 사랑하던 부인 사스키아와 자녀들을 모두 여위고 말년에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독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대작을 남기지만 여전히 그의 내면은 어느새 인간적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심지어 렘브란트의 모습은 작품 활동을 하기에도 힘에 부치는 듯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부인 사스키아가 죽은 후 방탕한 생활과 과소비를 일삼으며 렘브란트는 자신을 잊으려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의 성격이 원래 그랬던 것인지 후천적으로 생겨난 버릇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당시의 그의 생활은 분명 그를 지치고 힘들게 만든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여인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대부분 갈등만을 야기하고 금전적인 손해와 낭비로 점철되었다. 결국 그 때문에 말년의 렘브란트는 그의 그린 대작의 성공과는 반대로 비참하고 쓸쓸한 시간 속으로 침잠해가야만 했고 심지어 부랑아처럼 취급되어 빈민촌으로 쫓겨나 살아야 했다.


젊은 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린 렘브란트는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거만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바로 그의 아들과 딸의 이름을 로마 황제의 이름(Titus)과 로마제국의 명망 있는 가문의 여인(Cornelia)을 지칭하는 이름을 사용한데서 알 수가 있다. 그는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세례명을 사용하기보다 로마제국의 권세를 빌어다 자식들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 2006년도에 렘브란트 400주년 기념 전시의 일환으로 암스테르담 시가 준비한 각종 렘브란트 기념물들, 여러 건물에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 렘브란트 대표작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아무튼 당시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은 물론 유럽 최고의 작가로 알려지면서 대단한 자신의 입지와 권세를 즐기며 지냈을 터이니 생활의 무절제함은 극치를 보여주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원하는 루벤스의 그림은 물론 맘에 드는 작품이나 액세서리 등이 보이면 금액에 상관없이 무조건 사들이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렘브란트가 가지고 있던 재산은 순식간에 탕진되었고 그의 인생 말년에는 그가 지닌 명성의 크기만큼이나 상대적인 절망과 고독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렘브란트의 역작들은 대부분 그의 인생 마지막 시기에 제작된다. 젊은 시절 역동적이던 그의 그림들은 점차 고요한 느낌으로 다가오면서 움직임은 어느새 느슨해지고 물감을 칠한 붓놀림은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힘이 있어 보인다. 특히 렘브란트가 말기에 그린 초상화들은 그의 내적 심리상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어 그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렘브란트는 일생동안 100여 점의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웃고 있는 자화상’은 기존의 자화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1668년 그가 죽기 한해 전에 완성한 자신의 얼굴 모습이다. 렘브란트는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에 자신의 모습을 초라한 노인처럼 보이는 얼굴로 그렸다. 그는 왜 그런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일까?


그뿐 아니라 렘브란트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해에 ‘돌아온 탕자’를 그린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신께 드리는 마지막 기도처럼 스스로에게 지나온 세월을 회환으로 그리려 한 게 아니었을 가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돌아온 탕자’로 비유하며 자신을 돌아보며 숨을 거두게 되는 렘브란트, 어쩌면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를 통해 어느새 스스로 자신에게 마지막 안녕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 선술집의 탕자(사스키아와 함께 그린 렘브란트 초상화), 1635, 레이크스 국립박물관 소장

2) 렘브란트 초상화(부분), 1668, Wallraf-Richartz Museum, Cologne(독일)

3) 돌아온 탕자, 1669,  레이크스 국립박물관 소장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과의 혼인, 화가로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지나친 외도로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던 렘브란트, 그가 생의 마지막 해에 그린 ‘돌아온 탕자’는 표현 양식과 서술적인 측면 모두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바로 자신의 고난을 통한 회개의 묵상을 투영함으로써 젊은 시절 강렬한 빛의 대비를 통해 극적이고 외형적인 서술을 강조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빛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내적이고 깊이 있는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그의 부인 사스키아가 죽고 두 번째 세 번째 여인과 어쭙잖은 사랑 노름을 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모습이 탕자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렘브란트가 말년에 그린 ‘돌아온 탕자’는 바로 그런 점에서 자신의 자전적 심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스스로 심판을 받으며 쓴웃음을 지은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렘브란트는 빈민촌에서 마지막 여생을 오로지 성경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특히 자기의 얼굴을 사도 바울의 모습으로 표현하면서 겸손하고 약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울의 고백을 보여준다. 렘브란트가 숨을 거둘 당시 그의 전 재산은 헌 옷가지 외에는 낡은 성경책 한 권과 그림 도구만이 전부였다고 전해진다.


○ 참고문헌  

Wikipedia(Rembrant)

파스칼 보나푸, 렘브란트 빛과 혼의 화가, 시공사, 1996.




○ 아래 작품들은 모두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작품들이다.

1) 1628년 22살 때의 초상화,   2) 사스키아 초상화(1635),   3) 아들 티투스 초상화(1660)

1) 렘브란트 초상화(1661),   2)'유대인 신부'로 알려진 이삭과 레베카 초상화(1669): 반 고흐가 이 작품을 바라보며, "일주일만 이 작품 앞에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감탄을 한 작품

1) 예언자 안나(1631),  2) Haesje van Cleyburg 초상화(1634),  3) 포목상 조합원들, 1662

1)(노인네 초상화(1667),  2) 요하네스 브텐보해르트 초상화(1633),  3) 질책당하는 안나(1626)

1) Saul and David(1658),   2) 비탄에 빠진 예레미야(1630),   3) The Music Lesson(1626)

1) 사스키아 초상화(1633)

2) 렘브란트 초상화(1655), 비인 예술사 박물관 소장,   3) 렘브란트 초상화(1652),  비인 예술사 박물관 소장

1) Self-portrait in a cap, with eyes wide open, etching and burin, 1630

2) Self portrait with Saskia, etching and burin, 1636




○ 아래 작품들은 모두 암스테르담 마우리츠 박물관이 소장한 작품들이다.

1) Simeon's Song of Praise(1631),   2) Andromeda(1630),   3) Homer (1663)

1) Susanna(1636),    2) The Laughing Man(1630)

1) Still Life with Peacocks(1639),   2) Two Moors(1661),  

3)'Tronie' of a Man with a Feathered Beret(1640)

렘브란트의 마지막 초상화(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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