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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Jan 23. 2017

붉은 옷을 입은 여인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15


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도 특히 네덜란드 화단에는 수많은 거장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말할 것도 없이 렘브란트와 반 고흐, 그리고 몬드리안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네덜란드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인 거장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몬드리안의 연인에 관한 이야기, 아니 정확히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에 대한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몬드리안의 초기 작품 중 ‘붉은 옷을 입은 여인’(1908)이라는 작품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작품을 몬드리안이 그린 작품임을 알고 있지만 그림 속 모델이 누구였는지는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는 어떻게 모델을 하게 된 건지 그녀를 만나러 가 보자.


그녀의 이름은 아가사 제트래우스(Agatha Zethraeus: 1872-1966), 암스테르담에서 1872년에 태어나 1966년 암스테르담에서 94세까지 살았다. 아가사는 18세가 되던 해인 1893년 암스테르담에 있는 미술학교(Dagteekenschool)에 입학하여 1898년 졸업을 하는데 이 즈음에 몬드리안을 처음 만난다. 몬드리안과 아가사는 사실 동갑내기이기에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몬드리안이 일 년 먼저 학교에 들어가 아가사보다 일 년 먼저 학교를 졸업한다.


아가사 제트래우스 특별전시회에 붙여놓은  아가사 경력소개 내용


* 몬드리안 기념관에서 아가사 제트래우스 특별전시회 개최를 위한 전야제가 열리는 중

아가사 제트래우스 풍경화 작품들 전시 모습



암스테르담에서 미술교육을 수료한 그녀는 암스테르담 예술가협회 회원으로 1904년 등록을 하고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05년 그녀는 예술가협회 ‘Pictura Veluvensis’에서 개최하는 전시회에 처음으로 참여한다. 한편 그녀는 1906년 몬드리안한테서 회화수업을 받게 되는 기회를 가진다. 그녀가 미술학교를 다닐 당시 데상과 유화 등을 배웠지만 특별난 재능을 가진 몬드리안에게서 그가 가진 특별난 미술 이론과 회화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된다.


이때부터 아가사는 몬드리안의 제자이자 연인으로서 관계를 맺는다. 그녀의 그림이 주로 자연과 도시 풍경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건 어쩌면 이 당시 몬드리안의 화풍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초기의 몬드리안이 다루던 주제와 아가사의 주제가 일치하고 그녀의 화풍 또한 초기 몬드리안의 화풍과 흡사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가사의 미술선생 노릇을 하던 몬드리안은 1906년에 묘령의 아가씨와 약혼을 한다. 몬드리안은 상인의 딸인 그레타 헤이브뢱(Greta Heybroek)이라는 여인과 사진 촬영을 하기도 했는데, 거의 결혼을 할 것 같던 몬드리안은 결국 결혼을 하지 않는다. 이미 이 시기에 아가사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몬드리안이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인생철학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몬드리안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은 평소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그의 생각과 그의 영적 생활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에 몬드리안은 약혼을 했던 여인에게 편지를 쓴다. "당신은 내가 결혼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 “이었다고, 하지만 몬드리안에게 있어 사랑이란 것은 단지 환상일 뿐 예술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몬드리안, 붉은 옷을 입은 여인, 1908, 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그래서인지 몬드리안은 더욱더 아가사에게 관심과 열정을 쏟게 된다. 몬드리안의 지도를 받으며 아가사는 날로 그림실력이 늘게 되고 한편으로는 몬드리안의 모델 노릇을 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어느덧 단순한 제자나 모델로서의 관계를 넘어서 이미 연인관계로까지 발전을 한다. 


몬드리안이 암스테르담을 떠나 파리로 향하기 전까지 몬드리안은 그녀와 그렇게 몇 년간 동거를 하며 지낸다. 이때 그린 그림이 바로 ‘붉은 옷을 입은 여인’(1908)이란 작품이다. 어쩌면 이 그림은 몬드리안이 그녀를 가장 마음에 깊이 담고 있을 때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이란 그렇게 마음속에 진하게 박혀있는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일 테니 말이다.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작품이 태어나는 1908년을 전후해 두 사람의 관계는 절정에 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몬드리안은 이때 ‘햇빛 속의 풍차’(1908, 헤이그 시립박물관 소장)도 그린다. 이 그림은 유난히 햇볕이 따사로운 어느 날 그린 그림인데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의 고민은 풍차 자체의 형상보다는 어떻게 삼원색, 즉 빨강, 노랑, 파란색을 조화롭게 칠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후 1910년에 이르러 그는 또다시 이번에는 ‘빨강 나무’(헤이그 시립박물관 소장)를 그린다. 이 그림에서 2년 전 작품에서 처럼 어떻게 삼원색을 배치하고 어떤 구도로 배치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결국 그는 이 작품 이후 다른 나무 그림들을 통해 서서히 변모해가는 자신의 구성적인 특징, 즉 본질적 물음에 스스로 답하기 시작한다.


1912년의 ‘꽃피는 사과나무’와 1914년 ‘구성 4’라는 작품을 통해 몬드리안은 스스로 본질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몬드리안이 보여준 자연의 본질은 모든 사물과 자연을 단순화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점과 선, 그리고 색이라는 세 가지 요소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실이 바로 신조형주의 작품으로 귀결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몬드리안, 햇빛비추는 풍차, 1908, 헤이그 시립미술관

1) 회색 나무, 1911.           2) 칼러 구상면을 가진 타원형 2, 1914



아무튼 몬드리안은 1911년 추상주의와의 결합을 꿈꾸며 파리로 떠나고 아가사는 암스테르담에 홀로 남아 계속 그림을 그린다. 아가사는 몬드리안을 떠나보내고 홀로서기를 한다.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녀 역시 고독과 싸우며 몬드리안에 대한 연정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려 한다. 그녀가 암스테르담에서 몬드리안과 함께 거닐던 거리며 몬드리안이 그렸던 풍차들, 이런 대상들을 찾아다니며 그녀 역시 추억과 기억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 흡사 몬드리안의 초기 작품들을 보는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단순히 우연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몬드리안이 파리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녀 역시 1911년 연말에 열리는 파리 국제 살롱전 Des Beaux-Arts의 초대를 받아 참여한다. 이제 그녀의 대외적인 활동, 특히 국제적인 전시회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몬드리안이 신조형주의를 정착시키며 이론적 발전을 꾀하고 있을 때 그녀 역시 화가로서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고 그녀의 입지를 서서히 넓혀 나간다. 


몬드리안은 1914년 잠시 네덜란드로 귀환한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이때 1차 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1919년까지 네덜란드에 머문다. 몬드리안은 암스테르담에 머물며 아가사의 도움으로 그의 삼원색 구상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제작하는데, 이때 크뢸러 뮐러 부인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된다. 


몬드리안, 저녁노을속 풍차, 1908, 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1) 몬드리안, 진화, 1911,  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2) 복합 격자무늬 9, 1919,  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1) 몬드리안, 넓은 빨강면과 노랑, 파란색면을 가진 구성, 1921,  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2) 몬드리안, 격자무늬와 칼러를 가진 구성, 1937,  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그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더 스테일’ 운동을 네덜란드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의 신조형주의에 대한 이론적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몬드리안이 암스테르담에 머무는 동안 그의 활동에 알게 모르게 아가사는 큰 도움을 준다.


1919년 몬드리안은 일차 대전이 종료되자 또다시 파리로 간다. 몬드리안은 신조형주의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작품 제작을 해나간다. 그러던 중 1928년 어느 봄날 아가사는 파리에서 몬드리안과 오랜만에 해후를 하게 된다. 몬드리안이 암스테르담에서 활동을 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간 후에도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편지를 주고받으며 미술에 대한 이야기며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 등을 편지에 담아 보낸다. 


그런데 아가사가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자 당시 몬드리안은 나이 56세에 같은 네덜란드 출신 지인의 딸 리리 판다라는 여인과 교제를 시작한다. 이때 몬드리안은 그의 아틀리에에 뜻하지 않은 자연색 꽃화분을 장식해 놓고 딸 같은 아가씨와 사랑을 나눈다.


 ‘몬드리안의 방’을 꾸미며 그는 튤립의 초록 잎새를 흰색으로 칠한 것에 대해 “자신의 삶에서 사라진 여성을 상징하며 그 여성은 예술을 위해 봉헌되었다”라고 대답을 했던 몬드리안이 눈앞의 사랑을 위해서는 초록잎이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사랑에는 누구나 눈이 머는지 몬드리안 역시 서서히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아무튼 리리의 나이가 아직 20살밖에 안되어 그녀의 부모들은 반대가 극심했다. 그러나 여전히 몬드리안과 그녀의 관계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 사이에도 아가사는 여전히 몬드리안에게 편지(그녀는 이 당시 전람회에 출품해 수상을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몬드리안에게 썼다.)를 보낸다. 결국 리리의 아버지가 강력히 반대를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녀는 네덜란드로 돌아가야만 했다.(* 출처: 나무 위키)


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 몬드리안의 여성관과 사랑에 대한 인식 등을 소개한 글, 위 가운데 사진이 아가사 제트래우스 



그사이 아가사는 어느새 몬드리안의 명성을 따라갈 정도로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풍경화의 대가로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그녀가 1939년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에서 풍경화가로서 특별전시회를 개최할 정도로 유명해진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은 또다시 2차 세계대전의 폭풍에 휩싸이게 되면서 더 이상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 같은 단순하고 청초한 분위기는 무너져 내리고 만다. 전쟁은 암흑과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그래서 몬드리안은 더 이상 밝은 삼원색만을 고집하지 않고 검은색 선을 진하게 강조하게 된다.


1938년 몬드리안은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간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또다시 미국으로 간다. 재즈를 좋아하고 베토벤도 좋아했던 몬드리안은 나름대로의 구성 작품들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는데 아가사와는 여전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작품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몬드리안은 뉴욕에서 그동안 유럽에서 보아오던 직사각형의 거리 풍경들 대신 반듯한 직사각형의 도시를 만나게 된다. 몬드리안은 순간 새로이 샘솟는 활력과 흥분을 느낀다. 반듯반듯 자로 잰 듯한 직각으로 정리된 도시의 거리들이 묘한 수직 수평선으로 환원되면서 새로운 그림을 구상하게 된다. 이때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3)를 제작한다.


몬드리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1943



이미 68살이 된 화가는 그동안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랑객처럼 떠돌던 유럽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새로운 도시 뉴욕에서 그야말로 또 다른 구상을 떠올리며 흥분을 하고 있었다. 뉴욕은 그에게 글자 그대로 새로운 세계, 즉 멋진 신세계였다. 더군다나 그가 좋아하던 재즈의 선율이 들리는듯한 도시의 분위기는 암울하던 유럽에서 전쟁으로 침울해진 분위기를 잊게 해 주는 생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몬드리안은 서서히 뉴욕의 마력에 빠져들면서 도시의 활력과 율동적인 분위기를 작품으로 구상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제 몬드리안은 단순히 화려한 색감의 문제가 아니라 율동과 감정이 함축된 새로운 조형을 바탕으로 뉴욕을,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새로운 조형물을 구상하게 된다. 어느새 몬드리안의 그림 속 구성에서 검은색이 사라지고 노란색 선이 등장해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을 길게 이어 붙이며 뉴욕의 활력들을 표현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뉴욕의 거리를 묘사한 게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그의 마음을 드러낸 작품, ‘빅토리 부기우기’(1944)이기도 했다.


몬드리안은 이 그림을 제작하면서 아가사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본 뉴욕은 단순한 직선과 삼원색이 아니라 재즈와 승리의 환희가 춤추고 있는 도시”라고 말이다. 그동안 몬드리안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대부분 그가 작품을 완성하거나 진행 중일 때 그녀에게 자랑스럽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이유와 과정을 적어 보냈다. 그러면 아가사는 그에게 답장으로 몬드리안의 작품 구상에 대한 조언을 적어 보내곤 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몬드리안에게 뉴욕에서의 성공적인 안착과 새로운 작품 ‘빅토리 부기우기’에 대한 작품 구성을 축하해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40여 년간 관계를 이어온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몬드리안은 아쉽게도 그녀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미쳐 받아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는 1944년 몬드리안이 숨을 거둔 다음날 도착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편지에는, 몬드리안과 그녀가 처음으로 데이트를 즐기며 산책을 하던 암스테르담의 운하 근처에 있는 카페가 독일군의 폭격으로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몬드리안과의 추억은 흔적까지 점차 사라져 갈 모양이라고 애정 어린 넋두리도 늘어놓았다.


* 아가사가  몬드리안과 주고받은 서신들, 아머르스포르트 몬드리안 하우스 소장



그녀는 1952년 네덜란드 예술가 단체인 ‘De Onafhankelijken’의 명예회원이 된다. 그 후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위트레흐트라는 도시를 찾는다. 이 도시에서 그녀는 87세가 되던 1959년에 권위 있는 위트레흐트 예술 중개상의 배려로 ‘De Jacobitoren’에서 회고전을 개최한다. 그 덕분에 아가사의 작품들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녀는 이제 몬드리안의 작품 속 모델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화가로서 세상과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1966년 94세를 일기로 암스테르담에서 숨을 거둔다.


아가사 제트래우스, 자화상, 파스텔, 1907, 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 아래는 모두 Agatha Zethraeus가 그린 작품들이다.

* 몬드리안 하우스에 전시된 아가사의 작품들은 모두 100여 점에 이르렀는데 그녀의 작품들 중 일부만 게재한다.(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다.)

2014년 10월5일부터 개최된 아가사 제트래우스 특별전시회 포스터 

* 아가사 제트래우스 특별전시회 전야제가 열린 10월 4일 저녁에 아머스포르트에 도착해 전시회를 미리 관람하고 사진까지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아가사의 영혼 덕분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포스터 문구가 재미있다. "피트 몬드리안의 연인이자 제자, 그리고 모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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