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14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 그는 1872년 3월 7일 네덜란드 중부지방인 위트레흐트 주 외곽에 있는 아머르스포르트(Amersfort)에서 태어난다.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 피테르 코르넬리스 몬드리안(Pieter Cornelius Mondriaan)과 어머니 요한나 크리스티안 데 콕(Johnanna Christian de Kok) 사이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테어나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아 피테르 코르넬리스 몬드리안이라고 이름을 짓는다. 하지만 파리에 정착한 후 스스로 피트 몬드리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Mondriaan’도 ‘Mondrian’으로 바꾼다.
몬드리안은 일찍이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한 아버지와 풍경화가인 삼촌 프리츠 몬드리안(Fritz Mondriaan)에게 회화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1892년부터 1897년까지 암스테르담의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데, 이곳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따른 차분한 색조의 정물과 풍경화들이 대부분이었다.
1) 국화꽃, 1921(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2) 거리 풍경, 1899, 개인 소장(2015년 몬드리안 추모전에 전시)
그 후 몬드리안은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첫 번째 ‘현대 예술그룹’ 전시회에서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입체파 회화를 접한 후 파리행을 결심한다. 드디어 1911년 말 파리로 이주한 몬드리안은 그가 동경하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에서 상당한 자극을 받는다. 이때부터 그는 영적 본질과 세계의 물리적 외형을 결합시키고자 꽃, 나무, 인간의 형체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몬드리안은 1912년 이후 화면 위의 검은 선들을 격자무늬 형태로 그렸다. 검은 선들은 사물을 바라보는 그만의 독자적인 방식이었고, 그는 그물 조직과 같은 검은 선들을 통해 자연의 형태를 점차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나간다. 특히 색채는 회색과 갈색, 검은색으로만 한정했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나무’ 연작을 보면, 나무를 사실적으로 그린 회화에서 점차 거미줄 같은 선으로 분해시켜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추상 형태로 전이해 가는 과정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몬드리안은 파리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면서 입체주의로부터 벗어난 그는 엄격한 추상주의로 전향하여 선과 색의 완전한 단순화를 추구한다. 1917년 몬드리안은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테오 판 뒤스부르흐(Theo van Doesburg)와 함께 ‘더 스테일’(De Stijl) 그룹을 결성하고, 잡지 ‘De Stijl’을 창간한다. 이를 통해 신조형주의에 대한 주요 이론들을 게재하기 시작한다.
* 몬드리안 기념관에 전시된 물품들
* 몬드리안이 사랑한 백설공주 액자와 도자기 인형, 몬드리안은 7 난쟁이와 백설공주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이 액자와 도자기 인형이 몬드리안의 방에 있던 유일한 액세서리인 셈이다.
몬드리안은 엄격하고 기하학적이며 추상적인 회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시각을 ‘신조형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우주적 진실을 표현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형식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나타내면서 선을 수평과 수직의 축으로 환원하여 색채를 삼원색과 흰색, 검은색, 회색만으로 표현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을 택했다. 그에게 수직선은 생기를, 수평선은 평온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 두 선들이 적절한 각도에서 서로 교차하면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몬드리안은 1919년 파리로 다시 간다. ‘더 스테일’과는 계속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대각선 요소를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판 뒤스부르흐와 이견이 생기면서 결국 멀어져 바우하우스 이론에 접근하기도 한다.
몬드리안의 회화는 수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직각으로 교차되는 선과 흰색, 검은색, 회색의 무채색에 대립되는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을 농도와 명도가 일정하도록 채색함으로써 이를 가시화한다. 이를 바탕으로 1921년 몬드리안은 ‘구성’이라는 연작을 발표한다. 이 연작은 절정기에 이른 그의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커다란 빨강과 파란색면이 전해주는 힘과 색채가 삶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색채의 움직임을 실험하면서 몬드리안은 중심이 비어 있는 구성을 발견하는데, 힘의 발산을 암시하는 하얀 색면은 1921년 이후로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다. 1930년과 1931년에 몬드리안은 흰색 배경에 검은 선을 수직과 수평으로 그려 넣은 매우 급진적인 추상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는 그로 하여금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지점에 이르게 된 것처럼 보였다.
1932년 이후 그는 반복과 연작, 모사의 원리로 돌아간다. 그는 이전에도 대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일련의 모사를 시작한 바 있었는데 이제는 검은 선 자체를 모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중선’이라는 특징적인 형태를 이끌어내게 되고, 그는 1930년대 내내 이를 복잡한 선의 망조직 속에서 발전시켜 나간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현대적이고 기계적으로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적인 비례와 조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1)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 1927. 2)Composition no.II 1913
1)Tableau no,1 1913, 2)Composition no,xi c.1912, 3)Composition 10 in black and white 1915
* 위 작품들은 모두 크뢸러 뮐러 박물관 소장
1938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우자 몬드리안은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는 1940년 다시 뉴욕으로 간다. 뉴욕에 거주하면서 몬드리안은 그동안의 세계와 전혀 다른 색과 선을 접하면서 새로운 조형미를 꾸미기 시작한다. 드디어 선에 우선하는 복잡한 색채 평면을 표현함으로써 형식 실험의 진전된 단계에 도달한다.
뿐만 아니라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뉴욕에서 최신 재즈음악을 접하면서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역동성에 매료되어 그의 작품은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뉴욕에서 몬드리안은 이전의 작품에 등장하던 특유의 검은 선들을 삼원색의 띠 형태로 대체시킨 ‘뉴욕시티’ 연작을 선보인다.
그의 작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검은 수직선과 수평선이 사라지고 노란색 띠에 작은 색면들이 스타카토 식으로 더해진 그림으로 시각적 음악이라고 할 만큼 생생하고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또한 뉴욕을 환히 비추는 네온사인 불빛에 비친 대도시 생활을 신조형주의와 네덜란드적인 시각에서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의 표현양식의 마지막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1944년 2월 1일 뉴욕에서 폐렴으로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그는 마지막 작품으로 ‘Victory Boogie-Woogie’를 남겼다.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원하며 이름 붙인 듯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사실상 미완성으로 남는다.
1)Composition in colour A 1917 2)Composition with grid 6: lozenge, composition with colours 1919
3)Composition with grid 5: lozenge, composition with colours 1919
4)Victory Boogie Woogie, 1944, 헤이그 시립박물관 소장(몬드리안의 마지막 작품이다.)
* 위 작품들은 4)를 제외하고 모두 크뢸러 뮐러 박물관 소장
*참고: 아래 링크는 'A Journey Through Modern Art'란 제목의 비디오인데, 그의 작품 전체를 볼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fmiKOOvLUo
1)Tableau I 1921, 2)Evening, Red Tree, 1908, 3)Composition II in RedBlue Yellow 1930
* 위 작품과 사진은 모두 헤이그 시립박물관 소장
정사각형의 흰 캔버스, 엄격한 수직으로 교차하는 검정색 선, 그리고 그것이 만든 빈 사각형을 채운 빨강, 파랑, 노랑의 색면. 일련의 공식과도 같은 기본 요소로 무수한 변주를 만들어내는 몬드리안의 구성은, 이제 추상회화의 고전으로서 몬드리안의 방으로 다시 태어난다.
1917년 반 뒤스부르흐와 함께 만든 더 스테일(De Stijl) 창간호에 처음 수록하기 시작해 말년까지 지속적으로 발표한 몬드리안의 글들은 놀라운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사회적인 삶 전체와 새로운 미술이론이 하나가 되는, 신조형주의가 실현된 유토피아의 추구였다. 몬드리안은 그의 신조형주의 이론에 관한 핵심적인 글 3편을 모아 그의 회화작품과 함께 편집한 책 ‘몬드리안의 방’을 펴낸다.
몬드리안은 건축이야말로 신조형주의가 가장 잘 구현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문학, 음악 등 예술 전반에 걸쳐 신조형주의가 필요한 이유를 피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을 하나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규율로 발전시킨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향한 원리 말이다. 그의 이론을 단지 특정의 화풍을 설명하는 이론적 논거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철학적 관점에서 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드디어 몬드리안은 1920년대 초, 자신의 평소 생각했던 대로 파리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신조형주의 양식에 맞추어 개조한다. 몬드리안의 방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몬드리안은 단순한 가구 몇 점과 오래된 난로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물들까지 색을 칠한다. 작업실 벽면은 삼원색과 흰색, 검은색, 회색의 직사각형으로 꾸미고, 모든 가구들은 흰색과 검은색으로 칠한다. 그러나 오디오만은 선명한 빨간색으로 채색한다.
*몬드리안의 방(몬드리안의 파리 아뜰리에) 이와 똑같은 방을 아머르스포르트 몬드리안 기념관에 만들어 놓았다.
1) 왼쪽 사진은, 홀로그램으로 몬드리안이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동영상)
2)오른쪽은, 몬드리안이 부억에서 요리를 하는 모습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해 보여주고 있다.(홀로그램이 동영상으로 되어 있어 실제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꽃병에 조화 튤립을 한 송이 꽂아 놓고 그 잎사귀를 초록색을 싫어하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흰색으로 덧입힌다.(* 몬드리안이 초록색 오로라를 봤다면 무어라 했을지 궁금하군.) 그는 작업실을 개인의 신화 공간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새로운 미술을 등장시킬 무대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어느 신문기자가 흰색으로 칠한 꽃잎을 보고 그 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삶에서 사라진 여성을 상징하며 그 여성은 예술을 위해 봉헌되었다”라고 대답을 한다. 어쩌면 이 말은 그가 독신으로 사는 이유를 의미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좀 과장된 면이 있다. 왜냐하면 다음번 글에서 밝히겠지만 약혼까지 하고도 도망치듯 파리로 떠나온 사람이 그녀를 “예술을 위해 봉헌되었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신비주의로 몰고 가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단순한 작업공간으로서의 작업실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업실의 가구 배치나 색의 조화 등은 다분히 그가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구성한 나름대로 하나의 작품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기하학적 구도의 작업실, 심지어 그 방의 어디에 앉아야 어울릴까를 고민하는 몬드리안, 그는 자신의 방에서는 자신까지도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작품 속 인물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기에 그가 작업실 어느 한편에 앉아서 포즈를 취한 장면은 쉽게 보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오히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지금 홀로그램으로 자유롭게 그 방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드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르겠다. 몬드리안의 방에서 홀로그램에서 뿜어대는 담배 한 모금의 장면이 마치 긴 숨소리의 여운처럼 느끼게 되는 것은 몬드리안이 여전히 빨강, 파랑, 노랑으로의 단순화를 강조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몬드리안이 제기한 신조형주의 100주년(1917-2017)을 기념해서 De Stijl Utrecht & Amersfort는 '100Jaar De Stijl, 100Jaar Innovatie'란 주제로 네덜란드 디자인에 미친 영향 등을 주제로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아래 사이트 주소를 참조할 것.
https://www.facebook.com/destijlutrechtamersfoort/videos/278749179210823/
* 크뢸러 뮐러 박물관을 가기전에 아머르스포르트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아담하고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가 오래동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쉬어가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은 숙소로 정한 호텔에서 저녁을 먹으며 맛있는 하우스브랜드 맥주를 대접받는 순간 최고조에 달했다.
*아머르스포르트의 운하 성곽(예전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 흔적이 깊은 상처처럼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