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이미토 폰 도데러

아터제 호수의 예술가들

by 박종수


“나뭇잎이 가을 분위기로 덮인 계단에 서면 오래된 계단은 지나간 일들을 떠오르게 한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이 껴안고 있던 시간들,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던 일, 이끼 낀 돌계단들 모두 세월에 지쳐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빠져있었지만 그 기억들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 하이모토 폰 도데러 -



Prologue: 아터제 호수의 ‘예술가의 길’


아터제(Attersee) 호수 남쪽 바이센바흐(Weissenbach) 지역에는 ‘바이센바흐 예술가의 길’(Weissenbach Künstlerweg)이 있다. 이 산책로는 2009년 여름 개장했는데 이 ‘예술가의 길’은 슈타인바흐와 바이센바흐에 거주했거나 방문했던 예술가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들의 흔적을 좇아 산책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 ‘예술가의 길’에는 구스타프 말러(음악가), 프리드리히 굴다(음악가), 프란츠 폰 쇤탄(배우), 샬롯 볼터(오페라가수), 헤드비히 블라이브트로이(배우), 구스타프 클림트(화가), 그리고 하이미토 폰 더데러(소설가)가 거주했다.


지금은 모두 하늘의 별이 되어 아터제의 수호신처럼 이곳을 지키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아터제 호수의 장미향을 맡으며 그 매혹적인 주변 환경에서 영감을 받아 예술활동을 했다. 오늘은 이들 중에서 하이미토 폰 도데러(Heimito von Doderer, 1896. 8. 5-1966. 12. 23)의 흔적을 찾아가 본다.


하이미토 폰 도데러는 1946년 봄부터 이곳 바이센바흐에 있는 그의 삼촌 집에서 살았다. 그의 삼촌은 당시 슈타인바흐 지역 산림청 직원으로 일을 했다. 도데러는 그의 주요 작품인 소설 《The Strudlhofstiege》(슈트루르들호프 계단, 1951)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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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터제의 예술가들을 지역별로 표시한 그림, 2) 바이센바흐의 예술가의 길 안내도(붉은 선 표시가 하이미토 도데러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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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센바흐 '예술가의 길'에 있는 하이미토 폰 도데러 기념탑(사진 위 부분은 자필 원고 보관함), 아래 글은, 그의 삼촌집에서 '수트루들호프 계단'을 썼다는 안내글



1. 하이미토 폰 도데러의 인생역전


하이미토 폰 도데러(Heimito von Doderer, 1896-1966), 그는 1896년 9월 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건축가이자 철도 엔지니어인 아버지의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도데러는 1914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15년 지원병으로 군에 입대한다.


그는 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기병대 장교로 복무하다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수년간 벌목꾼으로 일을 해야 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 혁명이 마무리되자 1920년 도데러는 포로수용소를 벗어나 비엔나로 귀환한다.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잠자고 있던 그의 문학적 관심을 자극했다. 도데러가 겪은 갈등과 고민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게 되면서, 특히 그가 직접 전쟁포로가 되면서 작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귀국 후 그는 역사를 공부하고 1925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귀족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문학적 재질을 보였다. 그러나 도데러가 젊은 시절 극단적 애국주의의 발로로 1933년 NSDAP(나치당)에 가입을 한다. 그러나 이후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1939년 폴라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하이미토 폰 도데러는 나치당을 탈당한다.


이러한 그의 경험들은 그의 문학적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때 그의 첫 번째 소설 작품으로 심리 스릴러 소설인《모든 사람은 살인자다》(Ein Mord, den jeder begeht, 1938)와 몇 편의 소설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 후 1940년에 그는 천주교로 개종하고 이번에는 군종 장교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전쟁 중에도 그는 소설 《The Strudlhofstiege》(슈트루들호프 계단, 1951)를 집필하기 시작하는데 1948년에 초고를 완성한다.


그에게 영예를 안겨준 작품《슈트루들호프 계단》은 1951년이 되어서야 발표된다. 그의 나이 55세 때이다. 이 작품은 그가 러시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때부터 이미 구상을 해온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출판하자마자 어느 날 갑자기 도데러는 유명세를 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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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rudlhofstiege》1951년 발간된 독일어판 1,2 권 표지, 오른쪽은 영어판 책 표지


이 작품 이후 도데러는 또다시 그의 인생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악령들》(Die Dämonen, 1956)을 발표한다. 도데러의 두 번째 역작이라 할 수 있는《악령들》역시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와 인간 내면의 세계를 깊이 탐구한 대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이 《악령들》작품은 비엔나 사회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그린 걸작으로 도데러를 전후 독일, 오스트리아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현재 그는 전후 오스트리아 문학의 대표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1957년 오스트리아 문학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받으며 계속해서 성공적인 출판을 이어간다. 그러는 사이 도데러는 두 번 결혼을 한다. 그리고 그는 1966년 12월 23일 하이미토 폰 도데러는 70세를 일기로 비엔나에서 숨을 거둔다.


하이미토 폰 도데러 소설의 핵심은 주제가 아니라 글을 쓰는 작법(테크닉)이라고 주장한다. 내용 보다 언어와 구조의 정교함을 중시하는 ‘문학적 형식주의’라 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도데러는 오스트리아 사회의 계층과 인간 욕망과 도덕적 갈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개인의 삶과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그의 대표작품인 《슈트루들호프 계단》(Strudlhofstiege)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시대적 격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중상류층 슈탕겔러 가문의 친척과 지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이 겪은 수많은 갈등과 환희의 순간들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겪고 있는 연애와 간통으로 얼룩진 일그러진 삶과 그들이 어떻게 복잡하게 얽힌 운명적 삶을 살아가는지를 비엔나 9구에 위치한 ‘슈트루들호프’ 골목을 오가며 그려낸다.


비엔나 9구에 있는 계단, ‘슈트루들호프 계단’은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한 도데러의 소설에서 이곳은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고 마치 세계의 중심처럼 역할을 한다. 이 계단은 비엔나를 상징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로서 개인적 시간뿐 아니라 비엔나의 거의 모든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마치 블랙홀이 모든 시간과 공간을 빨아들이듯 소설 속 이야기의 모든 서사가 이 계단에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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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텔 Strudlhof, 2) 슈트루들호프 바로 오른쪽에 윗동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3) 슈트루들호프 계단


주요 장면들 대부분이 이 계단에서 펼쳐지며, 수많은 등장인물들 역시 이곳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친다. 그들은 ‘슈트루들호프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면서 시간이 흐르고 멈추면서 기억과 추억이 교차하고 갈등과 회의가 교차하는 곳이 바로 그 계단에서 인생의 참모습들이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설 속 인물들 대부분 이 근처에 살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와 사랑 이야기가 이 계단을 통해 연결된다. 이야기의 중심에 슈탕겔러 가문의 세 남매와 젊은 멜처 소령이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상하권으로 된 9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 《슈트루들호프 계단》은 화려하고 풍부한 언어 구사가 특징이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줄거리는 특별난 게 없다. ‘슈트루들호프의 계단’은 오히려 비밀스러운 사랑과 불행한 결혼의 순환고리일 뿐이고, 그저 사람들 사는 이야기가 다소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떤 주인공이라기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비엔나’라는 도시 그 자체이다. 1918년에 붕괴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모든 위엄과 비극이 이 도시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주요 시간대는 1911년과 1925년 여름이며, 과거 회상과 미래 예측을 통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설에서 시간의 경험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위는 서로 다른 시간대가 융합되는 것을 상징하는 통로처럼 해석될 수 있다.


그렇기에 하이미토 폰 도데러가 생각하는 ‘슈트루들호프 계단’은 마치 ‘인생의 오페라 무대’처럼 생각한 듯하다.(* "여기서 그는 마치 인생의 무대 하나가 펼쳐진 듯한 기분을 느꼈고, 그 위에서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 했다. 계단과 경사로를 내려다보며 그는 이곳에서 펼쳐질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 즉 내려갔다가 올라가 중간에서 만나는, 마치 오페라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을 마음속 깊이 떠올렸다."(슈트루들호프 계단,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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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루들호프 계단'을 내려서면 '리히텐슈타인' 공국 소유의 성과 공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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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등장하는 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슈트루들호프 계단' 부근에 산다.

1) '슈트루들 계단' 아래 리히텐슈타인가세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만나는 바이젠하우스가세(Weisenhausgasse, 현재 이 골목 이름은 1913년에 볼츠만 가세(Boltzmanngasse)로 개명했는데, 계단은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연결하는 구심점이다. 그래서 모든 일들이 슈트루들호프 계단에서 일어난다.

2) '슈트루들호프 계단 중간에 하이미토 폰 도데러 소설의 한 구절을 적은 팻말이 박혀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뭇잎이 가을 분위기로 덮인 계단에 서면 오래된 계단은 지나간 일들을 떠오르게 한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이 껴안고 있던 시간들,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던 일, 이끼 낀 돌계단들 모두 세월에 지쳐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빠져있었지만 그 기억들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 하이모토 폰 도데러 -


《슈트루들호프 계단》은 사실 뚜렷한 주인공도 없고, 연속적인 줄거리도 없다. 단지 비엔나 9구에 있는 두 거리를 연결하는 계단인 ‘슈트루들호프 계단’이 소설의 복잡하게 얽힌 줄거리 속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대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슈트루들호프 계단’ 오르내리기는 시간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위는 1911년과 1925년이라는 두 주요 시대가 융합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에는 기억과 삶의 경험들이 모두 담겨 있다. 두 시대적 초점의 내재적인 연속성은 계절에서도 드러난다.


한여름과 늦여름의 정취가 언어와 분위기를 통해 강렬하게 표현되며 하나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처럼 제국 시대와 공화정 시대라는 두 역사적 시대 또한 매끄럽게 연결된다.


《슈트루들호프 계단》은 도데러의 첫 번째 주요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출간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1951년 같은 해에 그는 《악령들》(Die Dämonen) 집필을 재개했고, 이 소설은 1956년에 출간된다.

《악령들》은 《슈트루들호프 계단》보다 거의 두 배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도데러는 곧 오스트리아 전후 문학의 선두 주자이자 대표적인 작가로 인정받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 5번이나 거론된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 나치당을 가입한 전력으로 인해 노벨상은 결국 받지 못했다.


그러나《슈트루들호프 계단》은 여전히 오스트리아 문단의 흐름을 새로이 부각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른 도데러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작품은 화려한 언어를 사용하여 전후 독일어권 문학의 주류와는 차별화되고 있다.



2. 악령들이 사는 비엔나


많은 이들이 당대 오스트리아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는 하이미토 폰 도데러의 《악령들》(Die Dämonen, 1956)은 파국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기로에 선 비엔나 사회를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하이미토 폰 도데러는 이 소설을 쓰면서 마치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처럼 구상했다. 그는 건축 도면과 여러 계획서를 참고하여 모든 참고 자료와 세부 사항을 꼼꼼하게 기록하며 소설을 설계했다. 그는 거의 1,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걸쳐 1920년대 후반 비엔나의 전경을 그려낸다. 다양한 거리와 아파트, 커피숍, 주점, 궁전, 정원, 도서관, 신문사 편집실 등 도시의 모든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또한 소설 속 ‘비엔나’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중 약 50여 명의 삶을 따라간다. 사회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상류층과 귀족, 지식인과 노동자, 퇴폐적인 분위기의 사람들과 암흑가 사람들까지 거의 모든 계층 사람들을 아우른다. 그중에는 매춘부와 살롱 여인들뿐 아니라 은행가와 부유한 상속녀도 있다.


은퇴한 공무원 게오르크 폰 게이렌호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독자들을 비엔나의 카페와 부엌, 침실과 뒷골목, 소박한 아파트와 예술가의 작업실, 호화로운 응접실과 숲이 우거진 공원, 지하실과 불타는 궁전을 넘나드는 친밀하고 다층적인 여정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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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악령들》1,2권 표지와 하이미토 폰 도데러 삽화


하이미토 폰 도데러가 25년에 걸쳐 쓴 이 소설의 역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역설에서 비롯된다. 표면적인 평화와 질서는 덧씌워진 채 서서히 쇠퇴하고 절망에 빠져 있다가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폭발하는 모습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줄거리는 책의 작은 부분만을 차지할 뿐, 훨씬 더 의미 있는 내용들은 서로 얽혀 있는 작은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하이미토 폰 도데러는 “각각의 음표는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전체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소설은 1927년경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삶의 모습과 그들이 직면했던 끊임없는 변화까지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뿐 아니라 이 책은 1927년 7월 15일 비엔나 법원에서 발생한 노동자 폭동과 화재 사건으로 빚어진 비극적인 이야기까지 다루면서 결말을 맞이한다.


하이미토 폰 도데러는 1930년에 이 소설의 첫 부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제국 문학회에 가입했고 일찍이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나치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고, 그는 곧 가톨릭으로 돌아선다. 하지만 법원이 불타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던 비엔나의 7월 봉기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악령들’은 우리에게 부엌에서 나는 아주 작은 불길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세계사적 격변 속에 숨겨진 영혼들을 보라고 촉구한다.


《악령들》(Die Dämonen, 1956)은 하이미토 폰 도데러의 대표작으로서 전후 오스트리아 사회의 혼란과 인간 내면의 어두운 욕망을 그린 대작이다. 줄거리는 비엔나 사회의 다양한 인물들이 얽히고설켜 폭력과 정치적 극단주의, 성적 욕망, 종교적 갈등이 뒤섞이는 과정을 보여주며 결국 인간 존재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1920년대의 비엔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극단주의가 팽배한 시기에 당시 귀족과 예술가, 군인 성직자,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각 인물들의 욕망과 갈등이 교차하며 비엔나 사회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드러낸다. 폭력과 개인적 극단주의가 점차 고조되며 사회전체가 불안정한 상태로 치닫는다. 개인의 내면적 욕망, 특히 성적 충동과 권력욕, 종교적 갈등이 사회적 혼란과 맞물리면서 ‘악마적’ 파괴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개인적 욕망과 갈등은 결국 한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긴장이 폭발하며 인간 존재의 어두운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는 경고를 하게 된다. 인간이 갖고 있는 내면의 ‘악마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문과 질문이 결국 결론으로 제시되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소설은 총 142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정치적 격변 속 비엔나 사회의 광범위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줄거리 구조는 없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인물들의 성장과 사회 비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며, 특히 1927년 법원 방화 사건과 같은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진 폭력적인 정치적 분위기를 다루면서 비엔나 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1927년-비엔나법원건물화재.jpg 1927년 법원건물 화재와 시위대 모습(자료사진)


도데러는 이 작품에서 일반적인 줄거리 형태를 제시하기보다 일반적인 사회구조의 분석을 지향하듯 언어와 구조의 정교함을 중시하면서 ‘악령들’이 무엇이고 어떤 사회가 이 악령들을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작품을 전개하면서 그가 보여주는 소설의 완성도는 철저하게 계산된 구도와 진행을 보여주면서 그야말로 짜임새 있는 구조와 세련된 언어적 감각을 드러내 그의 기법적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당시 오스트리아 문단은 그를 오스트리아 거장으로 자리매김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엔나의 사회적 가치와 인간내면의 갈등 등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장벽처럼 우뚝 솟아 있기에 그의 작품 가치가 돋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악령들》은 소설 제목처럼 악령들이 지배하는 비엔나의 수많은 갈등과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인간상들이 예나 지금이나 꾸준하게 비엔나를 떠돌며 방황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걸작이라 하겠다.


《슈트루들호프 계단》(Die Strudlhofstiege, 1951)과 《악령들》(Die Dämonen, 1956), 이 두 작품은 하이미토 폰 도데러를 대표하는 쌍두마차 같은 작품이라 하겠다. 도데러가 러시아 포로수용소에서 비엔나로 돌아와 포로수용소에서 구상했던 작품 《슈트루들호프 계단》은, 그야말로 ‘슈트루들호프 거리’에 있는 계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관계를 심층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시도했다.


이 작품은 도데러의 문학적 재기를 알린 작품으로서 비엔나 사회의 치명적 갈등과 가치를 분석적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악령들》의 경우에는 당시 비엔나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극단주의와 폭력, 성적 욕망과 종교적 갈등을 통해 인간 내면의 ‘악마성’을 탐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결국 도데러를 전후 오스트리아 문학의 정점에 있음을 재확인한 작품이라 하겠다.


두 작품 모두 2차 대전이 종료된 후 비엔나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통해 사회적 혼란과 인간 내면의 욕망을 탐구하는 파노라마적 서술을 보여준다. 따라서 소설 형식과 구조의 정교함을 중시하는 도데러의 문학적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두 작품은 같으면서도 다른 측면도 보여준다. 《슈트루들호프 계단》이 비교적 일상적이고 서정적인 사회적 풍경을 보여주면서 도데러의 문학적 재기를 알린 작품인데 반해, 《악령들》의 경우는 《슈트루들호프 계단》보다 훨씬 더 어둡고 폭력적인 인간 내면을 탐구하며 그의 문학세계의 정점으로 평가한다.


하이미트 폰 도데러가 ‘슈트루들호프의 계단’을 걸어올라 문학적 재기를 한 후 비엔나의 ‘악령들’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문학적 정점을 찍게 된다. 나치당원에서 전쟁포로가 된 그가 어떻게 변신과 재기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인생역전 스토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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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엔나 시민공원, 2) 비엔나의 제일 높은 건물 슈테판스돔 성당, 3) 돔 성당에서 바라본 비엔나 시내 전경



부록: 하이미토 폰 도데러 작가상


하이미토 폰 도데러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문인들이 모여 1996년에 “하이미토 폰 도데러 작가상”(Heimito von Doderer Award)을 제정한다. 이 상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을 기리고, "도데러의 전통을 잇는 높은 감수성과 독창성의 언어"에 탁월한 현대 작가의 단일 작품 또는 평생 작품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그러나 하이미토 폰 도데러 작가상은 2010년에 마지막으로 수여되고 더 이상 수여되지 않았다.


하이미토 폰 도데러의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모든 사람은 살인자다 (1938)

- 슈트루들호프 계단 (1951)

- 마지막 모험 (1953)

- 악령들 (1956)

- 메로윙기안 (1962)

- 슬루니의 폭포 (1963)


《슈트루들호프 계단》(Strudlhofstiege, 1951)은 1987년 오스트리아 TV ORF와 ‘Satel Film’ 제작사가 공동 제작한 2부작 《멜처와 그해 어느 날, Melzer oder Die Tiefe der Jahre》 (Georg Madeja 감독)를 제작, 방송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오스트리아 ORF와 독일 NDR에서 3부작으로 라디오 각색판을 제작했으며, 이것을 2008년 ‘Der Hörverlag’ 에서 4장의 CD로 발매하기도 했다.


바이센바흐의 예술가의 길(Kuenstlerweg)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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