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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알 Aug 27. 2021

여행의 중간엔 플렉스가 필요하다

이카에서 리마로, 페루여행 중가장 비쌌던 숙소

 여행에는 큰 각오가 필요하다. 장기간의 시간을 확보해야 하고 명품가방 하나 살 수 있을 만큼의 비용도 마련해야 한다. 집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으니 보통의 직장인들이 10일이나 되는 장기휴가를 해외여행으로 소진할 땐 보통의 각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명절 연휴에 붙여 겨우 휴가를 낸다고 해도 어디 돈 씀씀이를 펑펑 쓸 수 있겠는가. 특히나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여행지에서 숙박에 큰 비용을 지출한다는 것은 당시의 우리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몇 년 사이 나이를 먹고 체력이 형편없어진 지금은 하룻밤을 자더라도 제대로 자야 한다는 신념이 있지만 말이다. 



 버기카 투어를 마친 뒤 짐을 찾고 택시를 불러 몇 시간 만에 다시 돌아온 이카 크루즈 델 수르 터미널. 리마로 출발하는 버스에 오르기 전 우리는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2층 화장실로 직행하여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르기로 했다. 와카치나 크루즈 델 수르 사무실에서 만난 청년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너무나 당연할 정도로 우리 온몸이 - 특히 사막에서 굴러버린 알의 얼굴이 - 모래로 뒤덮여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일단 모래가 가득 들어 갑갑한 신발을 벗어 뒤집으니 상상보다 많은 양의 모래가 떨어졌다. - 혹시 몰라 휴지통 위에서 털었는데 천만다행 - 손바닥, 얼굴 할 것 없이 모래가 떨어지고 바지 주머니를 뒤집자 거기서도 모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사르륵' 소리를 내며 끝도 없이 떨어지는 모래들. 꽤나 깨끗한 화장실이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온몸에서 떨어지는 모래는 고운 입자만큼이나 소리도 고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녁에 도착할 리마 숙소를 페루 여행 중 가장 비싼 숙소로 잡았다는 점이었으니, 오늘은 기필코 제대로 씻어야 했다. 


몇 번 탔다고 신비감을 잃은 크루즈 델 수르 2층 버스 


 사막 투어의 후유증으로 버스에서 거의 기절하듯 잠들어 - 이젠 짐도 신경 쓰지 않는다 - 한 밤중에 도착한 리마. 버스 예매를 하며 늦은 시간에 도착할 것을 예상하고 숙소 호스트에게 픽업 서비스를 요청해 두었던 것이 빛을 발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젊은 여성 드라이버가 우리를 맞이하는 것과 좋은 세단 승용차 서비스로 한 밤중의 리마는 그리 무섭지 않았다. 

 10여 분 만에 도착한 숙소. 우리에게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자 했던 기사분은 운전은 잘하셨으나 영어는 잘 못하셨기에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끝까지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커다란 대문이 굳게 닫힌 한 건물 앞에 우리를 내려주셨다. 그리곤 픽업 택시비를 어떻게 정산해야 하는지를 사전에 안내받지 못해 기사님께 요금을 물어보니 50 솔이라기에 간단하게 지불하고 끝. - 나중에 알고 보니 집주인에게 한 번에 정산해줘야 하는 것이었다 -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밤에 커다란 대문 앞. 몇 번 밀어보았지만 열리지도 않고 근처 다른 출입구가 보이지도 않아 망설임 끝에 초인종을 누르니 의외로 통성명도 없이 문이 쉽게 열렸다. 숙소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중년의 남자 사장이 엔틱 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고풍스러운 거실에서 유창한 영어로 숙박 안내를 해줬고 굳이 우리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이 동네는 치안이 안전하고 언제든 나갔다 와도 되며 저 멀리 보이는 저 마트는 24시간이다'라고 안내를 했지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이 쫄보들은 밤 산책은 요만큼도 생각이 없었다. 


페루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로비 컨디션


 이 숙소는 이번 페루 여행에서 우리가 묵을 곳 들 중 가장 비쌌는데 '미라플로레스'에 있으니 기본적으로 부동산 값이 비싼 것도 영향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라디에이터를 갖추고 있었고 침구도 깨끗했고, 거실이나 복도, 화장실 등 어디 하나 흠잡을 것 없이 깨끗했다. 그리고 그 깨끗하고 향기로운 화장실에 우리는 사막 후유증으로 말도 안 되는 양의 모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막에서 그 누구보다 극심하게 뒹군 탓으로 알이 먼저 씻었는데 씻으면서도 "야, 모래가 계속 나와."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을 두고 나는 그냥 웃으며 "터미널에서 좀 털어내서 그 정도일 걸"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나와 내가 사워 부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샤워 부스 구석에 알이 먼저 쌓은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보이는 베이지 빛깔의 모래를 보았다. 

 "으하하하. 이게 뭐야. 야, 씻었으면 이거 쓸려 보내야지!" 

 "어? 아직도 남았어??? 아니 왜 계속 나와!!" 

 그렇다. 조치를 취했음에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이제는 내가 씻기 위해 옷을 벗고 머리를 터는데 다시 한번 '사르륵'하는 모래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귀를 팔 때도 끊임없이 모래가 나왔다. 땀과 함께 엉킨 모래를 깨끗이 씻어낼 수 있는 완벽한 컨디션의 욕실의 이처럼 반가운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와카치나에 사는 분들 괜찮으신 걸까....? 


 페루 여행 중 다시 만날 수 없을 정도의 고급 컨디션의 숙소에서 샤워를 마친 우리는 사진을 찍는 것도, 오늘 있었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도 모두 잊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고생스런 다음날의 숙소 플렉스는 모든 여행객들에게 권고사항으로 알려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숙소 사진도 전날 밤 찍지 못하고 아침에 겨우 찍느라 짐들이 널브러져 있다.




<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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