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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알 Sep 28. 2021

높은 곳 위에 더 높은 곳

경이로운 풍경과 경이로운 호흡 곤란 사이, 친체로

 페루 여행 중 유일하게, 아니 뇽과 나의 여행 역사를 통틀어 최초로 패키지 투어로 움직였던 날이다. 패키지의 장점은 한 번에 많은 장소를 볼 수 있다는 점이요, 단점은 보기 싫은 게 있어도 꼼짝없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상시라면 전혀 고려하지 않을 옵션이지만, 초행길에 시간은 없는데 보고 싶은 게 많다면 다른 선택지가 없다. 특히 말이 안 통한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오전에 친체로, 모라이, 살리네라스를 찍고 오얀타이탐보 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가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건너가는 빡빡한 일정이다. 중간에 화장실 갈 시간은 없어 보여서 배탈을 예방하기 위해   아침식사는 사골국으로 때웠다.

 배낭에 여벌 옷과 세면도구, 화장품, 침낭, 그리고 만일을 대비한 산소통 두 개를 챙겼다. 쿠스코에서 사흘째라 고산병을 탈출한 것 같다며 뇽이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나는 당일 컨디션보다 누적 데이터를 신뢰하는 사람으로서 주저 없이 산소통을 챙겼다.  


굿모닝, 쿠스코

오늘의 쿠스코 날씨도 맑음. 사흘 연속 하늘이 파랗고 공기는 깨끗하고 햇살은 눈이 부시다. 그리고 우리가 탑승할 파비앙 여행사의 버스 앞에는 한국인이 가득하다. 아무리 한국인 전문 여행사라지만 이렇게까지 한국인만 모일 수가 있는 건가? 다른 여행사의 차는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는데, 우리가 탄 투어버스는 인솔자를 제외한 전원이 한국인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버스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멀찌감치 올려다보았던 산속 마을에 들어간다니 여행 첫날처럼 설렌다. 평소 같으면 출발과 동시에 잠이 들었을 텐데, 그렇게 정신이 맑을 수가 없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위쪽으로 끝없이 이어졌고, 그렇게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에도 웬만한 편의시설은 갖춰져 있었다. 사람 사는 마을인데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다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일상의 풍경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신기했다. 특히 그 높은 지대 위로 길게 이어지는 계단은 과연 어디서 끝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전차가 지나가는 길

 

 마을의 규모가 얼마나 큰 건지 전차가 지나가는 길도 보였다. 패키지 투어가 아니었다면 전차를 타고 마을 한 바퀴를 돌다가 아무 데서나 내려서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을 텐데.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친체로를 제대로 보는 대신 모라이, 살리네라스를 포기했어도 아쉬운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저 이 순간 허락된 장면에 집중하는 수밖에.


 구름이 점점 땅에 붙을 듯 가깝게 보일 무렵 친체로에 도착했다. 고층 건물에서 전망을 바라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었다. 손에 잡힐 듯 하늘이 가깝고, 늘 내 머리 위로 날았던 새들이 여기서는 눈높이에 있었다. 만인이 앞다투어 하늘의 자손임을 주장했던  그 옛날,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살았던 잉카인들의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 같다.

 이틀간의 고산병 트레이닝을 거쳐 컨디션 최고를 자랑하던 뇽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보다도 앞서 신나게 계단을 뛰어올랐다. 발걸음도 경쾌하게 통통통 소리를 내며 올라가더니, 꼭대기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다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산병의 급습이었다.


 멋진 경치 속에서 등장하는 암살자, 고산병

 급하게 산소통을 꺼내 위급 상황은 모면했으나, 우리는 일행이 전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고산병은 한번 겪었다고 해서 예방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해발 3,700m의 높이는 경이로운 풍경과 경이로운 호흡 곤란 사이의 복불복 게임이었다. <아프리카 청춘이다> 노래 가사의 주인공은 여권이 없고 비자가 없고 돈이 없어 여행을 못 간다는데, 친체로는 여기에 선택받은 체질까지 추가해야 했다.

 하필이면 일행 홀로 벌칙에 당첨되어 외롭게 고통받는 뇽을 보며 하산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놀이를 향한 뇽의 집념은 나의 건강보다 위대했다. 산소통을 생명줄처럼 쥔 채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겨 일행들을 발견했을 때, 디에고는 계단식 농경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친체로의 계단식 농경지에 대해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내용이라곤 계단식 농경지 아래 심은 나무들이 전부 유칼립투스라는 것이다. "여기에 왜 유칼립투스가 있을까? 코알라가 있어서?"라는 디에고의 조크에 혼자 웃음이 터져서는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진짜 이유는 유칼립투스가 곧게 자라는 나무라서 호주에서 굳이 여기까지 데려와 심었다는 것이라는데, 코알라까지 데려왔으면 고산병 때문에 살기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농경지를 계단식으로 일군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 들었건만 유칼립투스와 코알라가 다 집어삼켜서 내 머릿속에 남은 게 없다.


사방천지 예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사실 친체로는 그 계단식 농경지보다 주변 경관이 대단했다. 하얀 외벽이 예쁜 친체로 성당, 큼지막한 바위산, 카푸치노 거품처럼 지평선 가까이 풍성하게 얹어진 구름까지 눈이 가는 곳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뇽도 시름시름 앓는 와중에 풍경이 예쁘다며 있는 힘을 쥐어짜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하지만 다음 일정이 줄줄이라 디에고는 금방 자리를 떴고 우리도 급하게 뒤를 따라야 했다. 성당 앞 광장에 이제 막 좌판이 벌어지는 참이었는데 돈을 못 쓴다니 안타까웠다. 패키지 관광은 쓸데없이 쇼핑을 시킨다고 누가 그랬나요. 알파카들아 내 돈을 가져가!
 
 다음 코스는 잉카인들의 천연 염색 체험장이었다. 원주민들이 따끈한 코카차를 나눠줬는데, 고산병 치료 효과는 여전히 없었지만 따뜻해서 위장이 편안해지는 건 좋았다. 전통 복식을 차려입은 원주민 여자들이 한켠에서 기념품 노점을 운영했는데, 숄이 대부분이었고 지갑은 없었으며 머리끈은 헐거워서 마음에 차지 않았다. 물건이 마음에 들 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을 땐 물건이 없다니. 다음 장소에서는 부디 돈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와라, 마법의 실

 젊은 원주민 여자 한 명이 나와서 천연 염색에 대해 설명했는데,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여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마법의 항아리에서 염색된 실을 쑤욱 뽑는 퍼포먼스를 보며 오오오 하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천지 외국어를 못하는 건 나뿐인 건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 물론 부끄러움은 잠시 뿐, 2021년 현재까지 파파고를 열고 있는 나다 -

 
 모라이까지 가는 길은 시간이 꽤 걸렸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이국의 자연이 아름다웠지만 뇽은 고산병에 이어 평상시에 없던 멀미에까지 시달리느라 거의 구경을 못했다. 뇽 말고도 창가에 혼자 앉은 어떤 남자도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고통받고 있었다. 모라이는 해발 3,400~3,500m 정도라고 하니, 그나마 친체로보다는 저지대니까 뇽의 컨디션이 기적처럼 좋아지기를 빌어 본다.  


구름 속의 산책


 노오란 유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부드러운 질감의 들판에 드문드문 풀을 뜯는 동물들과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잉카인들의 모습이 그림 같았다. 그들의 뒤로 거대한 구름이 산처럼 걸쳐져 있었다. 조형물이 아니고 진짜 구름이라니! 손오공의 근두운이 여기서라면 실화가 될 것 같다. 고산병만 아니었다면 뇽과 함께 이 놀라운 풍경을 실컷 누렸을 텐데, 혼자 보고 있자니 너무 아깝고 안타까웠다. 태양신이여, 부디 이 가엾은 이방인에게 숨 쉬기를 허락하소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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