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나를 움직인 문장과 대사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상)

by 포레스트 하이

화양연화와 무협소설


왕가위 감독의 빛나는 영화 “화양연화”는 1962년의 홍콩이 배경이다. 챠우(양조위)와 수리첸(장만옥)을 이어주는 맥커핀으로 등장하는 도구는 무협소설이다. 신문기자인 챠우는 부업으로 무협소설을 쓴다. 왜 하필 무협소설일까? 그 역사를 이해하면 수긍이 갈 것이다. 1960년대는 신파무협(新派武俠)의 태동기였다. 그렇다면 구파무협(舊派武俠)은 무엇인가?


구파무협은 1919년~1949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성행한 무협소설을 말한다. 물론 그 이전인 당과 명나라 시절에도 비슷한 소설은 있었다. 영화로 만들어졌거나 귀에 익숙한 <규염객전>, <자객 섭은낭>, <수호전>, <봉신연의> 같은 작품들이다. 무협소설이라는 명칭은 1915년 린수(林紓)가 그의 단편소설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강호기협전>, <촉산검협전>, <십이금전표>, <와호장룡>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51년 중국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하면서 무협소설의 출판을 전면 금지함으로써 구파무협은 종언을 고한다.

무협소설을 쓰는 챠우, 영화 화양연화 중

신파무협은 1949년부터 홍콩과 대만에서의 무협소설 부흥 조류이다. 홍콩 신만보(新晩報)는 양우생(梁羽生)이 <용호투경화>(1955년), <운행옥궁연> 등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자, 그를 '신파무협의 창시자'라고 불렀던 것이 그 기원이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의 홍콩. 나중에 신필로 불리게 될 김용(金鏞)이 <서검은구록>에 이어 <벽혈검>, <사조영웅전>을 발표한다. 이를 필두로 무협 소설의 붐은 조성되었고, 1960년대에 들어서면 대만의 와룡생, 제갈청운, 사마령 등이 무협의 백가쟁명, 화양연화의 시대를 구가한다. ‘무협 소설은 성인용 동화’라는 조어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다.


<화양연화>의 모티프였던 무협 소설은 이런 배경에서 삽입되었다. 신파무협은 홍콩의 호금전, 장철 감독의 무협영화와 함께 르네상스를 구가하다, 무협의 현대물이라는 <영웅본색> 등 홍콩 누아르의 전성과 함께 1985년 퇴조의 길을 걷게 된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졌다(江湖道義已經不存在了)”라고 한 대목을 상기해 보라.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홍콩과 대만의 무협소설 열풍은 1960년대 우리나라로 상륙했다. 신문의 1면 하단은 광고료가 가장 비싼 지면 중 하나이다. 1969년 3월 14자 동아일보 1면 하단에 <비연(飛燕)>의 광고가 실렸다. 비연의 프리퀄 작품인 <비룡(飛龍)>이 소개되고, “무협 소설의 귀재 와룡생의 일대 걸작 제2호 드디어 출간”이란 광고 카피는 당시 무협소설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1960년대의 분위기를 방증하듯 당대의 문학평론가 故 김현 선생은 <세대(世代)> 1969년 10월 호에 글을 올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무협 평론이라 알려져 있는데,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제하에 “허무주주의의 부정적 표출”이란 부제로 발표되었다. 첫 문장을 읽으면 바로 무협소설 마니아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의 무협소설 광고
무협소설은 기이한 마력을 갖고 있다. 나의 동료 중 하나는 무협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전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무협소설을 읽게 되면 딴 일에 전연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되고, 밥맛도 없고, 잠도 못 잘 정도로 기인(奇人)들의 기묘한 세계 속에 빠져들게 되어 자기 자신의 체력과 전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무협의 시대는 70년대와 80년 중반까지 계속된다. 가장 큰 특징은 중국 번역소설에서 발원하였지만 우리 작가들이 직접 창작한 '한국적 창작무협'이 번창한 점을 들 수 있겠다. 소위 한국 무협 1세대 혹은 구무협의 시대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서효원(대자객교), 야설록(표향옥상), 검궁인(십전서생), 금강(금검경혼), 사마달(절대무존) 등 중국식 이름을 딴 젊은 작가들이 등장했다. 80년대 초반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으로 황금기를 구가하지만, 출판시장의 한계, 신진 작가의 등단 제약, 남작(濫作)으로 인한 독창성의 상실 등으로 곧 위기에 처한다. 무협의 내용 또한 천편일률적인 스토리 전개, 황당무계한 기연의 연속, 음약과 최음제가 난무하는 성행위 묘사(노루표 무협지) 등으로 비난받았고, 독자들도 무협을 떠나기 시작했다. 물론 군사정권 하의 독자들의 허무주의도 작동했고, 군사정권을 비판했다는 작품이란 이유로 작가가 핍박당한 '무림파천황' 사건도 큰 몫을 했다.


무협의 바람은 198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긴 했지만, B급 3류 문화로서 저속한 무협지로 폄하되던 시선을 넘어 장르문학이나 경계문학의 명칭을 얻기까지는 인고의 시간이 축적되어야 했다. 물론 순수 문학의 언저리에 발을 걸친 사례가 있다. 1989년 영화감독 유하 – 당시 시인으로 데뷔 –는 <무림일기>라는 시집을 발간한다. 군사정권이 주도하던 정치판의 모습을 무협의 공간으로 비판한 것이다. 故 김현 선생은 시집 발문에서 ”그는 키치 중독자이며, 키치 반성자이다. 그 이중의 역할이 그의 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 활력의 이름은 건강함이다.“ 적고 있다. 무협소설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말하고 있음이다.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1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태극문, 신무협의 태동


역사는 정반합 변증법적으로 변화한다. 표면적으로는 잔잔한 바다와 같았지만, 변화는 뜻밖의 장소에서 해일과 같이 밀어닥쳤다. 1986년 고려원에서 김용의 소설을 <영웅문 3부작> 18권 -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 으로 출간했는데 대성공을 거뒀다. 곽정과 황용, 양과와 소용녀, 장무기와 조민의 러브라인, 동사와 서독, 남제와 북개 등 수많은 군상들의 활약에 무협에 문외한 여성들까지 영웅문 읽기에 동참하였다. 김용의 다른 작품뿐 아니라 고룡, 양우생 등 중국, 대만 작가들의 작품도 덩달아 인기를 누렸다.


우리 무협소설 시장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바로 당시 뉴 노멀이었던 신무협(新武俠)의 등장이다. 신무협의 비조가 용대운의 <태극문>(전형준)이냐, 좌백의 <대도오>(육홍타)냐의 논쟁은 있지만, 그것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갈린다. 여하튼 2014년 발간된 <태극문이 있었다> 20주년 기념 헌정도서에서 좌백도 용대운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인정하였으므로 <태극문>으로 지목해도 무방하겠다. 진산의 <태극문>에[ 대한 헌정 소설 <태극비전>의 아래 문장은 신무협의 출현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이해하고 있다.


세월은 흘렀다. 천하제일인은 여전히 천하제일인이었고, 천하제일가도 여전히 천하제일가였다. 변화라른 것은 높은 곳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산정의 바람은 언제나 고고했다. 변화는 밑바닥에서나 일어났다. 그곳은 언제나 약동하는 힘이 넘쳤다. 변방의 한 성에 신진고수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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