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밑바닥에서나 일어 났다

태극비전 - 진산

by 포레스트 하이

산정의 바람은 고요했다.


세월이 흘렀다. 천하제일인은 여전히 천하제일인이었고, 천하제일가도 여전히 천하제일가였다. 변화라는 것은 높은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산정의 바람은 언제나 고고했다.
변화는 밑바닥에서나 일어났다. 그곳은 언제나 약동하는 힘이 넘쳤다. 변방의 한 성에 신진고수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떤 문파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명문의 혈통도 아닌 자가 지극히 단순한 무공으로 연달아 고수들을 때려눕혔다는 것이다.
- 진산, <태극비전>에서 -


<태극비전>은 신무협의 태동을 구가했던 <태극문> 출간 20주년 헌정 무협소설이다. 여류 무협작가 진산의 단편으로 <태극문이 있었다>에 수록되어 있다. <태극문> 외전으로 보면 되려나? 그러니까 조자건이 천하제일인으로 등극한 오래 후의 강호 이야기이다. 먼저 태극문을 짧게 요약하면,

태극천자는 육합권, 복마검법 등 저잣거리의 평범한 열 개의 무공을 완벽하게 완성하여 천하제일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사후 천하의 기재들이 태극문의 제자로 발을 들이지만 조자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떠난다. 5년의 수련 끝에 강호에 출두하지만 그의 무공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끊임없는 도전과 비무를 통해 마침내 육합성만조천하(六合星滿潮天下)의 초식을 창안하고 천하제일이 된다.

강호의 황금 시절 천하제일인의 무공 수련과정을 적은 책 ‘태극비전’이 있었다. 천하제일가의 노가주는 손자를 천하제일인으로 키우기 위해 태극비전을 손에 쥔다. 또한 태극비전의 사본 하나가 뒷골목의 고아에게 전해진다. 숙명적으로 둘은 만나지만 승부를 보지 못하고, 무공을 완성한 후 만나기로 한다.


천하제일가의 기재는 마계(魔界)로 들어가 육합성만조천하의 초식을 완성하기 마물(魔物)과 싸운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른 후 뒷골목의 건달은 천하제일가를 무너뜨리고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기재는 여전히 마계에서 마물과 싸우고 있다. 마계와 이계에서 둘은 서로의 무공 완성을 기원한다.


인내와 끈기 - 1만 시간의 법칙


“산정의 바람은 언제나 고고했다. 변화는 밑바닥에서나 일어났다.”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어왔다. 가장 무협다운 문체이면서 철학의 냄새를 풍긴다. 무협에는 천하제일을 꿈꾸는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들은 암중에서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한다.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자본주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태극비전을 읽으며 현실에서 맞닥치는 일들을 생각했다.


첫째. ‘1만 시간의 법칙’은 어디에서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끈기와 인내! 수십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긷고 장작을 패고 똑같은 동작을 반복할 수 있는, 비범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전제가 태극문 탄생의 비전이다. 우리가 하루 4시간을 투자하면 1만 시간에 도달하는데 약 8년이 걸린다. 카잘스, 세고비아, 정경화 등 명연주자들도 입문 시기에는 하루 14~5시간의 연습은 필수였고, 거장이 되어서도 단 하루도 연습을 빼먹지 않는다.


첼로의 전설 파블로 카잘스는 95세 때 어느 인터뷰에서 지금도 하루 6시간을 연습하는 이유를 묻자, “매일 조금씩 실력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기타 소리는 결코 작지 않다. 다만 멀리서 들려올 뿐”이란 명언을 남긴 기타의 신(神) 안드레스 세고비아도 매일 5~6시간을 연습했고, 94세로 죽기 2개월 전까지 연주회를 가졌다. 누구라도 인내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작은 변화의 스노 볼 효과


둘째, 변화는 아래에서 시작하여 위로 오름을 강조하고 있다. 진산은 “변화는 밑바닥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나’는 선택의 의미를 더하는 보조사이지만, 이 문장에서는 밑바닥이기 때문에 변화라도 일어났다는 의미로 들린다. 진정한 변화는 높은 곳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점은 자주 지적되곤 한다. 기성세대나 부자들은 이미 가질 만큼 가졌기 때문에 변화가 싫을 뿐이고, 산정에는 물이 고여 썩어 버린다.


회사에서 우리는 가끔 놀라운 발견을 한다. 매일은 똑같이 흘러가는데 몇 년이 지나서 보면 “어! 언제 이렇게 되었지.”하는 경험을 말이다. 이란격석의 과제도 어느 순간 성사되기도 했다. 작은 변화가 모여 축적되고 에너지화되어 스노 볼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누구는 CEO의 역량으로, 누구는 패러다임이 변해서, 누구는 행운이 따랐다고 하지만, 작은 변화들의 조합이 없었더라면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Top-down 방식의 변화가 가장 효과적이지만 수용성이 부족하다. 반면 Bottom-up 방식의 변화는 가장 바람직스럽지만 시간이 걸린다. 경영전략을 추진하는 오퍼레이터들은 과정의 애로로 애를 먹는다. 하는 수 없다. 지금과 같이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다고 믿는 시대에 그러기엔 모두가 위험하다. 그래도 뭔가 하기라도 해야 변하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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