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이 움직이지 않으니 바람 또한 불지 않는다

동사서독 리덕스 시간의 재

by 포레스트 하이
기미동 풍야미취(旗未動 風也未吹)
시인적심자기재동 (是人的心自己在動)
깃발이 움직이지 않으니, 바람 또한 불지 않는구나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이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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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 시간의 재>의 첫 장면이다. 워낙 유명한 표현인데 선종의 화두를 모은 책 <무문관(無門關)>의 「非風非幡」에 수록된 문장을 차용하였다.


有二僧對論, 一云, 幡動, 一云, 風動, 往復曾未契理. 祖云,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二僧悚然.


따로 해석할 필요 없이,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이병헌)의 오버 더 보이스를 떠올리면 된다. ‘나뭇가지’를 ‘깃발’로 대체하는 작은 수고는 어쩔 수 없다. 결론만 말하자면 선우가 보쓰(김영철)의 젊은 애인(신민아)을 사랑하고 복수하는 일련의 사건은 그의 마음이 상상으로 움직인 것이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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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은 무협의 형식을 빌었지만, 매우 정적이고 철학적인 영화이다. 강호 고수들이 옴니버스 방식으로 등장한다. 모두 마음 한켠에는 사랑의 상처가 문질러져 있다. 모든 사건은 구양봉(장국영)을 중심으로 흐른다.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싶은 젊은 구양봉은 약혼녀 자애인(장만옥)의 만류에도 떠난다. 몇 년 후 고수가 되어 돌아와 보니 옛 애인은 형의 아내가 되어 버렸다. 구양봉은 그녀가 살고 있는 백타산이 보이는 사막에 주막을 열고 살인청부업을 한다. 그녀는 매년 경칩이 되면 구양봉에게 취생몽사(醉生夢死) - 술 -를 보내온다. 그는 술에 취해 기억을 잃고자 몸부림친다. 그녀가 형과 결혼한 것은 복수의 마음이었다. 그녀의 독백!


“사랑이란 말로 해야만 영원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든 안 하든 상관없다. 사랑 또한 변하기 마련이니까.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거울을 보고 졌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가장 아름답던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어느 경칩, 그녀는 취생몽사를 보내온다. “잊으려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가질 수는 없어도 잊지는 말자”라는 편지와 함께. 그리고 숨을 거둔다.


2년 후에야 그녀의 편지가 도착한다. 구양봉은 늘 백타산 너머 사막을 바라본다. 사막 너머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기야 사막 너머에는 또 다른 사막만 있을 뿐이다. 그녀를 잃고 나서야 그녀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소중한 것은 늘 가까이 있지만, 있을 땐 희미하고 사라지면 아쉽다. 구양봉의 독백!


“옛날에는 산 너머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혼자의 힘으로 살아오면서 거절당하기 싫으면 먼저 거절하는 게 최선이라 여겼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사막을 떠나, 불이 쇠를 이기는 서쪽으로 향했고, 오랜 후 고향 백타산으로 돌아와 서독(西毒)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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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풍비번(非風非幡) – 바람도 아닌, 깃발도 아닌 - 의 화두는 마음이다. 우리는 늘 세상사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기도 하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입에 달기도 한다. 감정이 북받칠 때 마음이 쓰리고 지리다고 한다. 도대체 마음이 존재하는 위치는 우리 몸의 어디인가? 오래전 사람들은 마음이 가슴속에 있는 것으로 알았다.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을 구분하였고, 뇌 속 송과선이 둘을 연결한다고 했다. 지금은 뇌과학의 발달로 뇌 속 뉴런의 전기 현상이라고도 한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기억 때문이다. 기억이 마음을 지배하고 조절한다. 사랑의 고통도, 이별의 쓰라림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리 고통스러울 리 없지 않은가. 금붕어의 기억은 3초이고, 다람쥐도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숨겨놓고 3/4은 잊어버린다. 그래서 평생을 작은 어항 속에서, 우리 속에서 쳇바퀴를 돌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식의 캔디 증후군이 사람을 망친다. 잊어버려야 한다. 그런데 즐거운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만,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오래간다. 첫사랑은 더욱 그렇다.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이가르닉 효과 Zeigarnik Effect’라고 있다. 밤샘 시험공부로 밀어 넣은 기억들은 시험을 끝내고 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끝내지 못한 일은 심리적 긴장감으로 다른 때보다 더 잘 기억하게 되지만, 일을 마치면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는 효과를 말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지부조화를 말하기도 한다. 특히 끝내지 못한 사랑 – 흔한 첫사랑의 비밀 – 은 평생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 <사랑의 역사>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했던 “사랑이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 영화이다.


뱀의 다리: <동사서독>을 보고 박정대 시인은 ‘장만옥’이란 시를 썼다.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여기저기 많다.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중략)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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