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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보 Feb 13. 2019

월급도 안나오는데 식지 않은 열정

견디다보니 위기 극복

얼마 전 상영된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을 봤다. 썩 잘 만들어진 영화라곤 볼 수 없고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부의 실책은 무엇이었는지,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IMF를 앞세운 미국은 구석에 몰린 우리 정부에 얼마나 무리한 지원 조건을 들이댔는지, 약삭빠른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어떻게 챙겼는지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자화상을 역사의 증언처럼 스크린에 담고 있었다. 현장 취재 기자로서 깊게 경험한 참혹한 사태였기에 영화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내내 가슴이 아팠다.


1997년은 출발부터 스산했다. 1월 23일 한보철강 그룹이 부도 처리된 데 이어 3월 19일에는 삼미그룹에 그 대열에 합류했다. 외환위기의 쓰나미가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확산하더니 10월 들어 주가가 폭락하고 달러화가 폭등하는 등 우리나라도 영향권에 들기 시작했다. 11월 1일에는 해태그룹이 부도를 냈다. 한국 경제에 대한 대외신뢰도가 떨어지면서 갚을 때가 된 외채는 만기연장이 안 됐고, 새로 돈을 빌리는 건 불가능해졌다. 1997년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나라의 곳간인 외화 보유액이 바닥을 보였다.


이대로 가면 나라가 부도나는 사상 초유의 상황. 정부는 마침내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긴급 자금을 수혈해달라고 사실상 백기를 든 것이었다. IMF와 실무 협상이 시작됐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서 잘 표현된 대로 IMF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IMF는 급전을 대주는 ‘천사’가 아니었다. 우리의 약점을 철저하게 활용해 미국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무리한 조건들을 들이밀었다. 경제가 결딴난 나라에 30%의 고금리 시행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했다. 부채비율이 높은 한국 기업들이 사경으로 몰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자본시장은 외국 자본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빗장을 활짝 열게 했고,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도 지원 조건에 포함했다. 협상에 참여했던 한 정부 관리가 “fake(이건 사기다)!”라고 외치고 협상장을 박차고 나왔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우린 힘이 없었다. 가혹한 요구 조건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2월 3일 정부와 IMF는 583억 달러의 자금지원에 합의하고 이를 공식 발표했다.


당시 나는 한 매체의 경제부 차장으로 재정경제원을 출입했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위기 취재팀장을 맡았다. 국가가 부도 위기에 몰린 상황이니 종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대형 이슈들이 무더기로 터져나왔다. 새마을 금고 하나만 무너져도 대서특필되던 때였는데 나라가 무너질 판이 됐으니 말이다. 내로라하는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이 휘청거렸다. 세 명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나라가 위기에 직면한 비극적인 상황을 헌신적으로 취재해 국민에게 알렸다.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1997년 11월에 있는 우리 정부와 IMF 협상팀과의 자금지원을 위한 실무 협상 취재였다. 당시 IMF 협상팀은 휴버트 나이스 아시아태평양 국장이 주도했다. 협상은 이들이 묶고 있던 힐튼호텔에서 진행됐다. 기자들이 진을 치고 협상의 진행 상황을 알기 위한 열띤 취재에 들어갔다. 하지만 기자 접근을 차단한 채 비밀리에 진행되는 협상이어서 정보를 얻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나이스 국장이 조식을 하러 호텔 레스토랑에 나타났다. 우리 팀의 막내인 이00 기자가 나이스 국장과 마주 앉았다. 공교롭게 이때 경비들이 다른 기자들의 접근을 막아 이 기자가 나이스 국장과 단독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평소 적극적이고 순수한 이 기자는 나이스 국장에게 짧은 영어로 “Look at my eyes.(내 눈을 보세요) I am courage.(난 용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취재에 응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기자의 열정이 가득한 순수한 말이 나이스 국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나이스 국장은 이 기자의 스타일이 자신의 아들과 비슷해 마음을 열게 됐다고 한다. 이후 나이스 국장은 우리에게 많은 단독 취재 기회를 제공해 타사의 부러움을 샀다. 나이스 국장과의 단독 회견은 물론 협상팀 전체와의 단독 회견 기회까지 허용했다. IMF 협상 팀원 전체와의 단독 회견은 정말 ‘대박’이었다. 밤에 회견을 마치고 힐튼 호텔 건너편에 있던 회사로 돌아와 같이 밤을 새우며 인터뷰 내용을 번역하고 새벽 방송에 리포트를 제작해 송출했던 뿌듯하고 짜릿한 기억이 눈에 선하다. 이후 협상이 종료된 다음 나이스 국장은 이 기자의 집을 직접 방문해 우리 취재팀과 저녁을 같이 했다. 외환위기 10년이 된 2007년에 이 기자와 나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나이스 국장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비밀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국제기구 고위직의 마음을 산 이 기자, 취재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전형을 보여준 자랑스러운 후배이다. 지금은 다른 방송사에서 간부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다시 외환위기 당시로 돌아가 보자. 우리 경제는 IMF로부터 긴급 자금 수혈을 받아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그게 바로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IMF 프로그램에 따라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많은 근로자가 실직의 아픔을 겪게 된다. 이 여파가 회사에도 미치기 시작했다. 멀쩡한 대기업들이 부도가 나고, 거의 모든 기업이 경영난을 겪으면서 광고 물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995년에 개국해 아직 적자를 내고 있던 회사는 ‘바람 앞의 등불’같은 신세가 됐다. 1998년 초부터 회사 금고가 바닥나 월급을 줄 수 없게 됐다.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년이나 이어지니 직원들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적금은 깨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보험까지 해지해야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은 매일 나가야 하는데 후배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조차 미안한 상황이었다.

  

나는 위기일수록 더 마음을 추스르기로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타사기자들에게 청승맞은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나가기로 했다. 후배들에게 종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자고 독려했다. 선배로서 솔선수범하기 위해 출입처인 재정경제원에 아침 일찍 나갔다. 사무실을 청소하는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게 다반사였다. 재정경제원 관리들이 한 명 두 명 사무실에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커피를 하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한 명 한 명 만나는 일상을 되풀이했다. 그러다 보니 제법 많은 정보가 쌓여 후배들이 사무실에 올 때쯤 되면 기사 한두 건을 제작할 수 있는 정도가 될 때가 많았다. 후배들도 잘 따라주었다. 자신들이 보완 취재를 해서 기사의 완성도를 높인 다음 리포트를 제작했다. 후배들 스스로도 열심히 취재를 했다. 언론계의 고정관념이란 게 있다. 상대적으로 심층 취재를 한 긴 글을 쓰는 신문기자들은 제작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느라 출입처에 잘 나오지도 못하고 1분 30초 정도의 짧은 리포트만을 하는 방송기자들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신문기자를 하다가 방송기자로 전직한 나는 이걸 알기에 그런 대접을 받기가 무척 싫었다. 월급도 받지 못하면서 우리는 말그대로 미친 듯이(?) 일했다.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등 다수의 특종기사를 만들어 냈고, 신문기자들은 이를 받아쓸 수밖에 없었다. “저 친구들 월급도 못받는데 미친 것 아니냐”는 말이 실제로 기자실에서 나왔다고 한다.


후일 공기업들의 투자가 이뤄지면서 회사는 회생의 길로 들어섰다. 위기 상황에서 회사를 지키며, 취재 현장을 지키며 끈질긴 기자정신으로 회사의 성가를 드높인 우리 재경팀, 정말 자랑스럽다. 당시가 나로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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