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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돋아나는 새순

by 우보

사진 찍는 게 취미다. 풍경 사진을 주로 찍는다. 가슴에 와 닿는 경치를 내가 원하는 프레임에 넣어본다. 의도했던 사진이 나오거나 생각보다 사진이 좋으면 행복하다. 출사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도 들판에 나가 나목을 찍곤 한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는 제각각 표정이 있다. 겨울을 렌즈로 관찰하다 보면 벌거벗은 나무가 겨울을 건너가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추위를 사람이라면 들판에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나무는 온몸이 꽁꽁 얼어버릴 것 같은 그 겨울을 묵묵히 견딘다. 침묵의 인내로 겨울을 나는 것이다. 그러다 사색이 되다시피 한 나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여겨 저기서 새순이 돋아나고 새싹도 얼굴을 내민다. 긴 겨울이 봄으로 양질전환(良質轉換)을 한다.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견디는 힘’이 만들어 낸 새로운 시간의 창조이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삶이 늘 순탄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문제는 인생이 뜻대로, 예측대로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숨이 가쁘게 힘든 고갯길을 올라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심하면 절벽 앞에 서기도 한다.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큰 사고를 당하거나, 중요한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뜨거나, 일자리를 잃거나 하는 일들 앞에 망연자실하게 된다. 삶이 흔들리는 고난의 순간이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오욕칠정(五慾七情) 중 칠정(五慾七情), 즉 일곱 가지 감정을 살펴보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미움, 욕망, 사랑이다. 이 중 좋은 감정은 기쁨, 즐거움, 사랑 세 가지에 그치지만 나머지 네 가지 감정인 노여움, 슬픔, 미움, 욕망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느낌이다. 그만큼 우리를 고난의 길로 이끌어 가는 일이 더 많다는 얘기다. 힘든 일이 닥치면 그때부터가 진정한 ‘삶의 승부’의 시간이다. 겨울의 터널을 빠져나와 봄의 도로로 들어서기까지 묵묵히 견디며 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견디는 힘’이 중요한 시기이다.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인내로 다부진 발걸음을 해야 한다. 목적지가 실재하는 객관적인 봄일지 아닐지 그건 알 수가 없다. 상황이 실제로 봄으로 바뀔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이든 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이 자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또한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1년 반전에 예기치도 못하게 삶이 멈춰 섰다. ‘대기권 밖’에 나와 있는 기분이다. 구구절절하게 그 사연을 밝히고 싶지는 않다. 삶은 정말 예측 불능이다. 경제방송인 머니투데이방송 사장을 하다가 2017년 10월 ‘친정’인 YTN 사장 공모에 지원했고, 최종적으로 사장으로 선임되는 감사한 일이 생겼다. 기쁨은 여기까지였다. 이후 극심한 노사분규가 이어졌고 다음 해인 2018년 5월 사장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집단의 모욕은 해도 너무했다. 역부족이었다. 삶이 정지됐다. 절벽 앞에 섰다. 처음엔 현실감이 없어 멍하게 지냈다. 워낙 큰 충격이어서였다. 정확하게 상황을 깨닫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삶이 면도날로 잘린듯한 통증. 주저앉을 수 없고 무너질 수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취미인 사진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블로그를 개설하고 기회가 되는 대로 글을 써서 올렸다. 1년 반 만에 파워블로거 수준으로 올라섰으니 얼마나 많은 글을 쓴 것인가. 한 출판사가 감사하게도 출간 기회를 주셔서 명예회복을 위한 자서전도 집필했다. 유튜브도 시작했다. 시간을 내 편집을 배우고,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내가 지금의 상황을 견디는 방식이다. 문득문득 아프긴 하지만 상처는 마음속 깊은 곳에 구겨 넣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다. 봄을 향해서. ‘견디는 힘’이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울 것을 믿기에. 이런 마음으로 시 한 편을 써봤다.


절벽 위에 섰거든



땅에서 눈을 떼라 너는,

깨진 유리 조각 같은 말들과

할복 같은 선고에서 등 돌려

바람에 마음 곁을 내주고

마른 눈망울에 젖은 꽃을 심어

퇴화한 날개

하늘로 하늘로 펼쳐보아라

헛되이 찢겨 나간 꿈은

별빛의 치유에 맡기고

겨울 한기에 갇혀 있던 마음

이젠 자유의 결에 흐르게 하라


온몸에 힘을 빼 끝없이 추락하라

너의 떠오르는 부력은

바닥에 닿아야만 눈을 뜨거늘

깨달음은 늘 완행이고

회생은 더디게 오지만

겪을 걸 겪어내야 솟아나는 새 살

끊긴 길 이어가는 건

눈꺼풀 벗겨진 새 시선

관성의 껍질을 벗어

스스로 일으킨 원심력,

새길로 곧게 튀어 올라라

직립보행은 늘 제힘으로만 시작되거늘

고난에 굴하지 않고 삶을 일으켜 세운 사례는 많이 있다. 그런 얘기를 통해 우리는 힘을 얻는다. 필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얘기를 하고 싶다. 다산 선생은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인간 승리 그 자체이다. 정약용은 22세에 초시에 합격했고, 28세에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해 벼슬길로 나아갔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된다. 특히 1801년 권력을 장악한 노론 벽파가 천주교도들을 탄압한 신유사화가 일어났다. 셋째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은 참수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된다. 1801년 3월 천주교도의 책장에서 정약용 집안의 서찰이 나온 '책롱 사건'으로 인해 정약용도 포항의 장기로 유배됐다가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장소를 옮긴다. 인생이 통째로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벼슬길이 막힌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이 참수되거나 유배됐으며, 가문은 폐족이 되었다. 귀양살이는 끝없이 이어졌으니 희망조차 사라진 상황이었다. 더구나 가족이 있는 경기도 광주의 마현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 강진에서 속절없이 고독한 고난의 시간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도 인간이기에 마음이 출렁거렸지만 스스로를 다잡으며 책을 읽고 저술 활동을 하는 학문 세계로 더 깊게 탐닉했다. 인간 승리의 드라마이다. 책 '내가 살아온 날들'에 실린 그의 서한과 글에는 그의 올곧은 정신세계와 마음가짐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아침에 햇볕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먼저 지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것이 진리이다. 운명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때의 재난 때문에 청운의 뜻까지 꺾여서는 안 된다.'(하피첩)



절제하며 현재를 즐기는 삶의 자세를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고난 속에서 삶의 여유를 잃지 않은 ‘거인’을 만나는 듯하다.



'가버린 곳은 좇을 수 없고 장차 올 것은 기약하지 못한다. 천하에 지금 눈앞의 처지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하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높은 집과 큰 수레에 목말라하고 논밭에 애태우며 즐거움을 찾는다. 땀을 뻘뻘 흘리고 가쁜 숨을 내쉬면서 죽을 때까지 미혹을 못 떨치고 오로지 '저것'만을 바란다. 하여 '이것'이 누릴 만한 것임을 잊은 지가 오래되었다'(어사재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을 때 한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그곳에서 첫 4년을 보내게 된다. 정약용은 자신이 머물던 주막집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로 지었다. 그 네 가지는 맑고 담백한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과 신중한 행동을 말한다. 고난에 주눅 들지 않고 수신(修身)의 기회를 삼는 다산의 기개가 놀랍다. 정약용의 호가 다산(茶山)으로 정해진 유래는 이렇다. 정약용은 1808년 봄에 강진 만덕리 율동의 다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차나무가 많아 다산으로 불리는 이 산야에서 살게 되면서 정약용은 '다산'을 자신의 호로 정한다.



다산은 57세인 1818년 봄에 '목민심서' 48권을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9월 14일 40세부터 시작된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 마현의 집으로 돌아간다. 한 천재의 올곧은 삶도 75세에 이곳에서 마감된다. 다산의 위대함은 외형적으로는 그의 천재적 업적 그 자체이다. 하지만 더욱 돋보이는 것은 이 같은 업적이 인생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고난을 견디며 이뤄졌다는 점이다. 그의 ‘마음의 힘’이 이뤄낸 위대한 삶이다.



정약용과 같은 시기에 권력의 정점까지 올라갔다가 수직 낙하한 홍국영의 삶을 정약용과 비교해보면, 다산의 삶이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때는 조선 1776년. 그해 3월 영조가 세상을 뜨자 정조가 제22대 왕으로 즉위한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즉위는 정조 자신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 건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홍국영의 도움을 받아 국사를 펴나간다.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홍국영은 출세 가도를 달린다. 동부승지에서 도승지로 승격된 데 이어 숙위대장을 겸직하게 된다. 하지만 정조는 홍국영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그가 조정에서 물러나도록 권고한다. 홍국영은 결국 왕비 독살계획이 발각돼 1780년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쫓겨난다. 그의 나이 32세 때의 일이다. 홍국영은 큰 충격을 받고 병을 얻어 이듬해인 1781년 사망한다. 아직 젊은 나이어서 후일을 기약하며 인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홍국영은 이 기간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견디는 힘’이 얼마나 운명을 다르게 하는지를 정약용과 홍국영의 엇갈린 삶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고난 앞에 특효약은 없다. 인내하는 마음의 힘이 유일한 ‘보약’이다. 희망은 다른 누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스스로 끊임없이 ‘의미의 불씨’를 지켜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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