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이성적인 소수가 여전히 감정적인 대중을 영화나 드라마로 지배하려 한다면?

by 생각공장








영주 스포일러


영주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남동생 영인을 돌보며 사는 소녀 가장이다. 부모의 죽음으로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알바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사고 치는 남동생 때문에 합의금을 구하다 좌절한 영주는 부모를 교통사고로 죽인 가해자를 찾아가 복수를 시도한다. 하지만 복수하러 간 영주는 가해자 부인 향숙의 따뜻함에 끌리기 시작한다. 영주는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가해자(상문과 향숙 부부)의 가게에서 돈을 훔치려다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죽게 한 상문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주는 향숙과 상문의 집에서 마치 딸처럼 사랑받는다.

영주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상문 또한 사고로 인한 가책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상문과 향숙의 십 대 아들이 의식 없이 누워있는 걸 보게 된다. 영주는 향숙과 상문이 주는 사랑과 배려에 반응하면서, 처음에 가졌던 복수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영주는 자신이 세상에 덩그렇게 혼자 남겨진 것이 아닐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동생 영인이 누나 영주가 향숙과 상문의 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영주는 향숙과 상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영주는 이들이 준 행복한 이불속에 자신을 맡기려 하지만 향숙의 속마음을 그만 엿듣게 된다. '영주를 십자가로 생각하며 평생 지겠다.'는 향숙의 말을 몰래 듣게 된 영주는 한강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지려다 주저앉아 통곡한다. 동이 트는 서울 하늘을 배경으로 영주는 뚜벅뚜벅 걸어간다.





감독의 인터뷰 그리고 내 불만?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실을 겪은 사람들, 원치 않은 비극을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다(https://www.sedaily.com/NewsView/1S732I3Z7E).' 영주를 보면서 든 생각을 그냥 적어 보겠다. 먼저 영주가 자신이 자신들이 죽인 피해자의 딸이란 고백을 듣자 향숙과 상문 특히 향숙은 충격을 받고 그동안 영주에게 보였던 사랑의 감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혹감과 죄책감이 거의 모성에 가까웠던 향숙의 감정을 차갑게 식게 했다. 상문 또한 자신이 의도적으로 영주의 부모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가해자로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나마 상문이 좀 더 이성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의도치 않게 죽인 피해자의 딸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일 때문인지 영주가 피해자의 딸임을 고백했을 때, 어느 정도 영주를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살짝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주가 누군에겐가 의지하지 않고 향숙과 상문을 뒤로하고 자신의 삶을 혼자 힘으로 살아내려 한다는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일 수 있다. 하지만, 영주가 향숙과 상문의 집에 일원이 되지 못했다는 면에서는 비극적인 결말이라 볼 수 있겠다. 왜 이런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냈을까? 나는 비극을 좋아한다. 비극은 운명이 한 인간에게 가하는 무지막지함을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운명 앞에 선 한 인간의 무력함을 아프지만 정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영주의 비극은 맘에 들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느낀 감정에서 비롯한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었는데 감정에서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판단이 각자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정에서 비롯한 비극이 많았었는데 왜일까?






향숙은 영주가 자백하기 이전에는 영주를 마치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아들을 대신해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극진히 아낀다. 하지만 영주가 고백한 후 향숙의 그 따뜻했던 배려는 무거운 의무감으로 바뀐다. 영주는 남편 상문을 살려낸 은인인데도 말이다. 이 지점에서 영주의 막 피어나려던 희망이 짓밟힌다.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내 희망도 함께. 영주는 상실, 용서 그리고 치유에 관한 이야기란다. 하지만 난 다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비평하겠다. 영화에 대한 해석은 관객인 내 권리이니까.





감정은 진화가 인간에게 준 매우 유용했던 지능의 한 종류다

감정은 진화의 과정이 인류에게 준 또 다른 종류의 지능이다. 인류가 수십만 년을 유목민으로 살며 두려움, 역겨움, 질투심, 그리고 측은함 등과 같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감정을 진화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린아이가 양쪽 부모의 절대적인 보호가 있어야 독립적인 성인이 될 수 있기에 여성들에게 질투란 감정이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두려움, 역겨움, 그리고 측은함 모두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유형의 지능이라고 한다(D. Evans, 2003, pp. 25-8). 생존 수단으로써의 감성 지능이 인류의 행동을 지배해왔다. 대략 만 년 전에 유목민 생활을 접고 농업 혁명을 이룬 후에도, 몇 세기 전에 산업 혁명을 이룬 후에도, 정보 혁명을 겪고, 사차 산업혁명을 눈앞에 두고 있는 2018년에도 감정이 절대다수의 인간 행동을 결정한다.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은 늘 소수만 해왔다. 문제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이들은 감정에 사로잡힌 절대다수의 대중을 가끔 ‘개, 돼지’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부르는 놈들이 수많은 개, 돼지에게 욕먹고 봉변당하지만 곧 이 분노는 사그라들고, 우리는 망각한다. 잠깐 미끄러졌던 그 인간은 우리가 망각한 사이 제 자리로 복귀해 다시 우리를 지배한다. 차가운 이성을 가진 소수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절대다수를 그 뜨거운 가슴(감정)을 조종해 늘 지배했다. 감성 충만한 소설, 드라마, 영화로 우리를 늘 길들였다. 문학 이론의 오랜 경고지만 늘 대중은 이런 은밀하고 교활한(?) 문학의 역할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J. Culler, 2000, pp. 35-7). 그래서 개, 돼지인 우리는 늘 지배당했고 앞으로도 쭉 그럴 거다.






영주를 보면서 가장 불편했던 지점을 얘기해 보겠다. 영화는 대중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 향숙이 이성과 합리성에서 비롯한 따뜻함으로 영주를 받아들였다면, 이성에 바탕을 둔 사랑으로 죄책감과 당혹감에서 비롯한 무거운 의무감을 극복했다면, 이 영화를 본 관객은 적어도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다. ‘향숙이 영주가 피해자의 딸인 거를 모르면 몰라도 알면서는 영주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못할 거!’ 난 이런 향숙의 감정과 이에서 비롯한 의무감은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십만 년 전에 동굴에 살던, 즉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살던 인간의 감정에서 비롯한 것으로 난 생각한다. 아무리 대중이 감성적으로 판단한다고 해서 영화에서조차 향숙이 대중과 똑같이 감정에 바탕을 두고 판단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 현재 대중의 판단 방식 또한 동굴의 벽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본 대중은 감정에 바탕을 둔 판단을 따라 할 혹은 그런 판단에 동조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말이다.






영화가 현재의 제도나 현대인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그걸 관객이 영화로 보면서 현재의 것들을 재확인하면, 관객은 현재의 제도나 관행을 인정할 가능성이 커진다(J. Culler, 2000, pp. 38-9). 예술의 사실주의는 매우 보수적이며 심지어 어떤 측면에선 수구적이기까지 할 수 있다.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국가주의 영화나 적에 맞서 싸우는 전쟁영화 같은 것들은 타국에 있는 인간을 우리와 똑같은 가치를 가진 한 인간임을 잊게 만든다. 민족주의라는 매우 퇴행적인 혹은 반동적인 생각의 감옥에 대중의 의식을 가둬버린다. 이런 이유로, 대중을 진정으로 위하는 예술은 현실을 늘 비판적으로 인식해 대중이 보지 못한 편견과 그들 자신을 구속하는 규범과 전통을 폭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은 현실에 대한 개혁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또한 자신들이 가진 편견을 상식으로 여겨 진보적인 변화마저 거부하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 변화가 자신을 해방하게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향숙의 감정이 영주의 실낱 같은 희망을 날려버렸고, 상문의 죄책감이 그의 생명을 거의 앗아갈 뻔했다. 감정에 치우친 향숙의 판단을 보며 관객이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인간에겐 감정이 더 우선이야!'란 생각 혹은 자기 확신을 하게 된다면 그게 어떤 예술이든 대중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반동적(reactionary)이다. 이는 대중의 의식을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막는 것이며, 우리를 개, 돼지라 부르는 이성을 사용한 소수의 인간은 계속해서 우리를 마치 ‘뇌가 없는 거대한 동물’ 길들이듯 통제하려 할 것이다. 이래서 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대중예술, 특히 드라마와 영화를 극히 혐오한다. 영화 영주가 대중에게 미친 이념적 영향이 내가 예상한 대로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Bibliography


Culler, J. (2000), ‘Literary theor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Evans, D. (2003), ‘Emotions’,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