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나의 견해는 누가 만들었을까?
복지 논쟁과 과학기술 둘 다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유럽의 다양한 복지제도와 현대 기술과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았다. 왜 복지제도와 현대과학기술을 동시에 얘기할까? 복지제도와 테크노로지는 언뜻 보기엔 관계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주제의 이면에는 '변화'라는 이슈가 공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이슈 즉, 복지제도와 같은 정치, 경제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대중의 태도와 기술과학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시민 다수의 태도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복지제도의 도입에 관한 논쟁과는 다르게 기술과학 분야에 대한 시민 다수의 전망은 그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본질적으로 같은 주제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복지제도와 기술과학에 대중은 왜 이런 상반된 태도와 전망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질문을 묻기 위해서 지금까지 유럽의 여러 복지제도에 이어, 현재 기술과학의 발전 정도를 이 글에서 소개했다. 정말 긴 여행이었지만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복지제도 도입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고 심지어는 반대하면서, 기술과학이 만들어 낼 변화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열광적으로 반응할까? 아이폰을 매년 새로운 제품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면서, 왜 헬조선의 정치, 경제에 관련한 제도에 관해서는 도무지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시민들은 생각할까? 도대체 왜?
복지제도에 대한 세종의 사족
기본소득제나 유럽식의 보편적 복지제도가 도입될 가능성에 대해선 시민 다수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헬조선에선 기본소득이나 보편적인 복지의 수혜자가 복지제도 도입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복지나 기본소득의 수혜자인 시민의 상당수는 이런 제도에 대해 반대도 한다. 이런 역설이 있나? 헬조선의 국민들은 너무 지나치게 '철'든 애어른처럼 자신들의 경제적인 안정보다 국가의 재정건전성을 더 걱정한다. 복지제도는 가령, 의료복지, 교육복지, 주거복지, 연금 등등의 공적 서비스를 시민 다수가 저렴한 가격에 공동구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금과 각종 연금으로 일년에 수백 만원에서 천만원 대의 세금을 내는 국민들은 위에서 언급된 공적 서비스를 가장 저렴한 값에 누릴 권리가 있다. 절대 '무상'이란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이나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무상'이란 단어를 내 뱉으면 그 시끼들은 힘없는 국민을 등쳐먹는 사기꾼임을 인증하는 것이다. 시민 다수가 낸 세금은 대통령, 국회의원, 판사, 그리고 다양한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들 월급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복지란 각종 공적 서비스를 시민의 하인인 공무원이 공동구매 대행을 해 주는 행위이며, 동시에 이것이 공무원들의 의무다. 그런데 시민다수는 세금, 담뱃값, 심지어는 복권값으로 이리 저리 뜯겨서 가난한데 특히, 시민의 하인인 국회의원들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각종 특혜를 누린다. 이시끼들은 하라는 복지는 공동구매 안하고 주인인 시민은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데 머슴인 이 시끼들은 수억원에 이르는 연봉에 고급차, 그리고 다양한 특권을 누리는 이 상황 정말 황당하다. 정부와 국회가 시민의 사회적 권리인 다양한 복지제도의 도입을 방해하고 동시에 '무상'이란 단어를 떠벌리는 행위는 공적 서비스를 구매대행하는 에이전트인 선출직 공무원들이 중간에서 돈 (세금)을 가로채는 행위이자 직무유기다.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의 폭로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슈퍼스타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의 유명한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지젝은 2011년 10월 9일 뉴욕에서 ‘월가를 점령하라 (Occupying Wall Street)’라는 시위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http://www.imposemagazine.com/bytes/slavoj-zizek-at-occupy-wall-street-transcript. 지젝은 연설 후반부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 라고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질문한다. 그리고 그는 답한다: 우리의 상상은 미디어가 정해준 테두리 (프레임) 안에서만 일어난다. 미디어 (& 미디어에 출연하는 전문개; experts)는 우리에게 생명 공학을 포함한 과학기술 관련 부문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인류는 달도 여행할 수 있고 생명공학의 진보로 인해 인간이 영생할 수도 있다고 미디어의 전문개 (?)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 경제적인 부분과 관련해선 미디어의 어조와 내용은 전혀 다르다. 예를 들면, 미디어는 수퍼리치나 기업의 세금을 약간만 올리는 것조차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 기업이 경쟁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계속해서 의료보험제도의 개선을 위해서 약간의 증세가 필요하다고 하면 이 역시 불가능하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이런 의료보험제도는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그 전문가들이 주장한다고 지젝은 폭로한다. 이 연설의 전반부에 지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미래에 관해 시민이 꿈 꿀수 있는 자유마저 지배자들은 미디어를 통해 억압해왔다. 기업의 광고료를 받아 먹고 사는 언론이 현재의 자본 권력을 어느 선까지 감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언론 스스로가 헬조선의 또 하나의 권력집단이 된지 오래다. 언론 권력이 자기 자신과 정치, 경제 권력자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시민이 꿈꿀 수 있는 자유까지 억압해왔다고 지젝은 폭로한다. 소수의 정의로운 생각을 가진 학자와 정치인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책과 입법의 필요성을 외치면 시민 스스로 '그런 사회는 불가능해!'라고 체념하게 만드는 생각을 언론과 그 전문가들이 생산해서 대중의 의식 속에 주입한다고 지젝은 외친다. 평등한 복지국가에 대한 주장을 마치 유토피아적인, 실현 불가능한, 심지어는 종북주의자의 주장, 혹은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외침 정도로 치부해버리도록 미디어가 대중의 의식을 세뇌시켰다고 지젝은 폭로한다.
정치, 경제, 사회 측면의 개혁과 진보는 다 안된다는 사회에서 이상하게도 인공지능, 아이폰, 나노생명공학, 로봇공학과 우주탐사는 전 세계적으로 실험되고,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2004년 기준으로 인간을 화성에 보내는 데에 1인당 1조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엘론 머스크는 2060년 경이면 1인당 화성여행 비용을 우리 돈으로 1억원 아래로 낮출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화성 여행 비용의 만 분의 1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한다 http://www.theverge.com/2016/9/27/13078690/elon-musk-mars-mission-cost-per-person-spacex. 머스크의 이런 약속이 허풍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이 기술 발전의 속도가 전례없이 빠르기 때문이다. 현재 시민 다수가 들고 다니는 아이폰의 컴퓨팅 능력이 1990년대 이전의 수퍼컴퓨터의 능력보다 더 강력하다. 유독 세금에 기반한 시민의 사회적 권리인 복지의 진화만 안되며, 기본 소득 도입은 더더욱 안된다고 한다. 복지는 그저 위에 언급된 공적 서비스 (연금, 교육, 주거, 의료 서비스 등)를 정부가 국민이 낸 세금으로 공동구매하는 거다. 그니까 정치인이 맘만 먹고 머리만 잘 쓰면 위의 여러 공적 서비스를 훨씬 더 저렴한 값에 시민을 위해 제공할 수 있다. 대략 30년 된 빈티지 수퍼컴퓨터보다 더 강력한 아이폰을 전국민이 한 대씩 들고 다니고, 동시에 현재 1인당 화성 여행비용이 1조원이나 되는 걸 1억원으로도 낮출 수 있다는 혁신의 시대에 왜 아파트 값, 병원비, 대학 등록금 가격은 내려가기는 커녕 올라가기만 할까? 보편적 복지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이렇게 계속해서 치솟고 있는 이런 공적서비스를 누구나 누릴수 있을 정도의 저렴한 가격으로 공동구매하자는 제안일 뿐이다. 그런데 '무상이니 이회장 손자'니 하는 이런 얘기는 국민을 기만하는 대표적인 전문개들의 개수작에 불과하다. 이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제도 또한 계속해서 업그레이드시키고, 그 개선의 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필자가 주장한 이러한 개혁과 진화가 우리 헬조선에서 가능할까?라고 스스로 또 물으셨다면 아직도 언론과 그 언론에 출연한 전문개들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 아닐까?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전문개들이 PR (public relation)전문가들이다. 이 전문가들은 언론인 출신도 상당한데, 쉽게 설명하면 정부나 각 정당의 홍보수석, 대변인, 그리고 기업의 홍보이사 등이 이 전문가 그룹에 포함된다. 이들의 주특기는 대중의 '동의를 만들어내는 (engineering consent) 능력'이다. 자신들의 고객인 정치, 경제 권력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러한 온갖 노력에는 거짓말, 사기, 반만 진실인 주장들을 자신들의 고객인 정치, 경제 권력 집단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미디어에 나와 퍼뜨린다.
한 예로 보편적인 복지와 관련된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의료보험, 학교급식, 혹은 기본소득제에 관한 미디어의 토론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떠들면서 자신들이 이 권력집단의 개임을 스스로 인증한다: '이건희 손자에게까지 밥을 공짜로 주어야하나? 그 돈으로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더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건희 회장에게 국민연금도 모자라 기본소득까지 주자고? 상류층의 사람들의 암치료비까지 국가가 보장해줘야한다고? 이런 주장들 일견 합리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그래서 국민들 상당수는 이건희 회장까지 배려하는 보편적 복지보다는 소외계층에 혜택을 집중시키는 소위 선별적 복지를 지지한다. 하지만 이거 다 개수작이다. 국민연금의 소득 대체율, 암치료비의 완전 보장, 학교급식, 거기다가 기본소득제를 도입하기 위해선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 그 재원이 어디서 나올 수 있는가?를 누구보다 더 빠르고 영리하게 알아채는 사람들이 기업가들과 헬조선의 수퍼리치 (1조원 이상의 자산가)들이다. 이들은 항상 보수 정치인들과 홍보 수석과 같은 PR 전문개들한테 '우리 그런 복지 안 해줘도 되! 제발 세금만 올리지 않게 해!'라고 말하면 이 홍보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고객을 위해 미디어에 나와 이렇게 떠든다: '우리 회장님은 세금을 더 내기 싫데!'라고??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소외 계층에 복지 혜택을 집중하는게 부족한 국가 재정상황을 고려할 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혹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이건희 회장에게 국민연금도 아까운데 기본소득까지 주자고? 라고 주장하며 시민의 편에 서있는 척한다. 이런 개수작이 그동안 잘 통해왔다. 직장인들의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의 반을 현재 부담하고 있는 기업가들에게 이런 복지제도의 개선은 정말 극혐하는 담론들이고 이걸 아는 PR 전문가들과 보수 정치인은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지껄인다: 복지를 너무 해주면 국민들이 게을러진다. 무상 (?)복지는 인기영합주의 (populism; 대중의 표를 사기 위해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 행태)일 뿐이다! 이렇게 떠드는 인간들의 면상이 미디어에서 보이면 이시끼들이 수퍼리치의 돈을 아껴주기 위해 시민 다수를 사기치는 개자식들임을 우리가 이제는 알아야 한다.
이런 전문개들의 활약 때문에 대중은 그동안 같은 주제인 과학기술과 복지제도 도입에 대한 전망에 관해 상반된 태도를 가져왔다. 과학기술 그리고 복지제도 둘 다 변화에 관한 문제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영생을 줄 정도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영생을 가능하게 해 줄 의료보험의 보장성 확대에 대해선 안된다고 떠드는 전문개들의 주장에 세뇌당해왔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영생은 가능한데 의료보험 보장성 확대를 위한 정책은 안된다는 이런 말도 안되는 논리에 아무 생각없이 설득되어 왔었다고 필자가 주장하면 여러분이 좀 불편할 수 있다. 그래도 이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전문개 식별법과 그들이 활용하는 세뇌방식 즉, 지배이념의 본성에 대해 집중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시민의 생각과 상상의 자유까지 억압해왔던 이념과 그 이념의 수단들, 더 나아가서 어떻게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글 '불안, 복지, 테크, 그리고 이념'의 최종회의 주제가 보이는 것 같다.
Bibliography
Belsey, C. (2002), ‘Poststructur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Hargreaves, I. (2005), ‘Journ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