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마지막 거인’
말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고 계신가요? 저는 말주변 없는 교사입니다. 당연히 말싸움을 못해요. 저를 오래 본 사람들은 제가 어떻게 교사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차기도 해요. 그만큼 저는 말을 못 하는 쪽이에요. 생각의 속도도 느리고, 말도 느려서 가끔은 머리가 점점 나빠지나 하고 의심이 들 때도 있어요. 저는 누군가 제게 말싸움 거는 것이 싫어서 처음부터 네 네하는 소심한 성향을 갖고 있어요. 말싸움에서 이기면 뭘 하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하는 자조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저처럼 이렇게 살진 않잖아요. 세상에는 말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직성이 풀리고, 자신이 하는 말은 무조건 옳다 우기는 사람도 많아요.
제가 만난 학생 중에도 예외가 없어요. 몇 년 전 교실에서 만난 그 아이는 다른 친구를 때리거나 거친 욕을 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친구들과 대화할 때 교묘하게 말싸움을 걸어서 상대방 아이가 바짝 약이 오르는 게 멀리 있는 제 눈에 보일 정도였죠. 아이들은 단순한 말싸움에서 점점 맘이 상하고 결국엔 담임인 저에게까지 영향이 왔어요. 겉으로는 바쁜 업무 하는 척했지만, 그 아이 목소리가 들리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귀를 쫑긋했어요. 기분이 나쁘다고 저를 찾아온 아이가 있는 반면 괴롭힌 당사자는 너무 태평했어요. 불러다 놓고 대화를 시도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해요. oo야,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말이지.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저는 안 그런데요’하고 오리발을 내미는 얄미운 녀석 때문에 저도 단단히 약이 올랐답니다.
‘아이들을 미워하면 안 돼. 그렇지만 쟤만 보면 나도 모르게 속에서 천불이나.’
‘즐거워야 할 출근길이 지옥길이야. 오늘도 똑같은 문제로 골머리를 앓겠구나.’
‘나는 정말 무능한 교사야. 언제까지 이 고통이 지속될까. 빨리 학기가 끝나면 좋겠다.’
한동안 힘 빠지는 날들이었어요. 누구를 잡고 이야기해 봐도 교과서적인 답변과 위로뿐 신통방통한 해결책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절대 말싸움을 걸지 않던 단 한 명이 있었어요. 저에게까지 말싸움을 걸어 자신의 승리를 의기양양 자랑하던 그 아이가 말이에요. 누구였을까요? 그 아이보다 말싸움을 잘하던 숨은 존재가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말싸움이 아닌 기운으로 누르는 존재였을까요? 아니에요. 아이러니하게 싸움꾼 아이를 단숨에 제압한 아이는 바로 우리 반에서 말을 한마디도 안 하던 아이였어요. 드디어 적수가 나타난 거죠. 말없는 아이는 집에서 가족과는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대화를 이어가지만 학교에서는 절대 한마디도 안 했어요. 바로 그 아이가 숨겨진 고수였던 거예요. 학기 초 아무 말을 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을 때, 몇몇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쟤는 작년에도 말 안 했어요.’ 부끄럽지만 저는 안도했어요. 원래 그런 아이라고 생각하니 지금부터 노력하면 되지 하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 아이 앞에서 이 말싸움꾼의 방법은 통하지 않았어요. 당연하지요. 뭐라가 시비를 걸어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으니까요. 교사로서 부끄럽지만 어찌나 통쾌하던지 화장실 가서 소리 안 나게 입 막고 눈물 나도록 웃었답니다.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한번 당해봐라. 하고 못된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제가 당한 것과 다른 아이들이 당한 것을 한방에 해결하는 통쾌한 순간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전 강력한 한방을 맞았어요. 침묵의 힘을 절절하게 느꼈던 거예요. 침묵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제일 강한 한방이었다는 걸 몸소 깨달았어요. 우리가 흔히 말하던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살면서 와 닿았던 적이 없었어요. 반짝이는 금의 가치만큼 저는 그 아이의 힘을 느꼈어요. 말을 못 해서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는 말은 안 하는 쪽을 선택했고, 우리 반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어요. 생각해보니 충분히 따돌림을 당할 상황이었는데도 아이들은 그 친구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 아이는 침묵으로 자신을 지킨 거였어요. 절대 주눅 들거나 쭈뼛거리지 않고 항상 아이들 속에 당당하게 속해 있었던 그 아이가 새삼 대단해 보였어요.
침묵의 힘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동화책이 있어요. ‘마지막 거인‘이라는 책이에요. 책의 주인공은 침묵을 지키지 못하여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했고, 평생 죄책감에 떠돌았어요.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침묵을 ‘지킨다’는 표현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어요. 어떤 것을 지킨다는 것은 지킬 때는 존재감이 모르지만 지키지 못했을 때 무한 존재감을 드러내요. 그 존재감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기에 침묵을 지킨다는 말에는 굉장한 책임감이 서려 있어요. 침묵하지 못한 죄는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어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참지 못하고 감수하는 고통은 굳이 책의 내용뿐만이 아니겠죠. 지금 우리 삶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이미 말하고 나서는 아무리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어요.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나요?
잔소리는 힘이 없지만, 침묵은 강력해요. 일단 침묵의 힘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침묵의 강력한 한방을 알고 있기에 더욱 입이 무거워져요. 말할 때 신중해져요. 침묵의 힘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으면 좋겠어요. 때로는 열 마디 잔소리보다 한 번의 침묵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