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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자본주의와 성차별주의

"태일하라"에 부쳐

2016.8.20


최근 번역된 "새로운 자본 읽기"는 독일의 "새롭게 맑스 읽기" 학파의 선두에 서 있는 미하엘 하인리히의 책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맑스주의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가치이론"에 대한 전제를 일격에 뒤집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맑스-엥겔스 전집이 발간되어 "정전을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맑스가 "자본"에서 당대의 고전주의 경제학파를 비롯해 심지어 맑스주의자들조차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던 "상품의 교환가치"와 "화폐의 가치"를 당연시하는 것이 바로 "물신숭배"라고 주장했음을 밝힙니다. 이는 맑스주의 연구사에서 기념비적인 전환입니다. 또한 자본가는 그 개개인이 자본주의의 물신숭배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깨달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안에서 "자본의 증식"이라는 자본주의 본연의 성격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인리히는 나아가 맑스가 "공기처럼 퍼져있는 이러한 물신숭배에서 깨어나야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역사를 통틀어 여성이 차별당해 온 역사는 History를 대체할 단어로 Herstory가 제안된 것으로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기처럼 퍼져있는 이러한 성차별주의에서 깨어나야 성차별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성차별주의에서 피해 당사자이자 변혁의 주체로 나선 여성들의 주장입니다.


며칠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주제 중 하나가 안중근과 윤봉길을 한남으로 묘사하고 깎아내린 워**의 게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노동운동을 하다 분신자살을 한 전태일을 두고 "한남들도 태일하라 (재기하라와 같은 의미)"고 표현한 게시물이 올라와, 한국의 노동/진보운동에 매진하는 이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안중근과 윤봉길 게시물에 비해"태일하라"는 별 이슈가 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도 또한 생각해봐야할 지점입니다.)


안중근과 윤봉길은 제쳐두고, 전태일에 대해 "태일하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이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표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여성들에게는 안중근이나 윤봉길, 전태일은 각자 훌륭한 위인으로 여겨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두 '남자'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노동/진보운동을 해왔던 수많은 '훌륭한' 남자들이 가정에서나 자신의 단체에서는 '한남충'이어서 비판을 받는 것과 같은 선상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워**의 저러한 게시물을 이 지점에 대한 '미러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어떤 훌륭한 사람이었대도 그가 남성인 이상은 "공기처럼 퍼져있는 성차별주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새삼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중요한 지점입니다. 물론 저 게시물을 올린 당사자가 "그냥 남자라서 깠을 뿐인데 혼자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 재기해라"고 말한대도, 어쩔수 없습니다. 굳이 저런 게시물을 가까이 두고 싶지도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기처럼 퍼져있는 성차별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저를 깨우치는 하나의 회초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성차별주의이니, 생물학적남성으로서 그것을 깨우쳐주는 방식들 - 미러링을 포함해서 - 을 단지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욕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물신숭배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공기처럼퍼져 있음을 자각하기 힘듭니다. 성차별주의는 우리가 기울어진 운동장과 젠더권력구조를 깨닫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공기처럼 퍼져있음을 자각하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철폐 운동과 성차별주의 철폐 운동은 어느 정도 비슷한 궤를 갖습니다. "숨겨진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그렇다 해도 아직은 현실적으로 두 운동이 같이 가기는 힘듭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에 대한 싸움은 역사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나며 드러나고 있지만 성차별주의는 자본주의와의 싸움의 와중에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존재가 그러했듯이요. 그러므로 저는 노동/진보운동에 몸담고 있는 남성들이 이 "태일하라"에서 메시지를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 상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전태일까지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반응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예수하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의아해졌습니다. 여성신학에서는 "남성 예수가 여성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기독론적인 질문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살면서 누구 하나 진지하게 생각하기 힘든, 한국땅에서는 더욱 그런 질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도 무책임하게 자기 어머니를 제자들에게 맡겨놓고 저 혼자 죽을 길로 달려들어간 "한남"일 수있습니다. 처음 보는 여인에게 "개년"(한국말로 굳이 옮기자면 그렇습니다.)이라고 욕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물론 뒤에 태도가 바뀌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예수, 당대의 많은 이들보다는 나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혐의가 보이는 예수를 가지고 "니네도 예수하라"고 말할때, 좀 힘들겠지만 "이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성차별주의를 철폐하는데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을 전환해보면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남성은 오늘도 "공기처럼 흐르는 성차별주의"에서 젠더권력의 에너지를 뽑아먹는 "죄"를 범하고 있고 이를 깨달으라는 촉구 - 미러링을 포함해서 - 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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