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며칠 대중의 관심경제 자원을 한방에 쓸어간 논란은 '강형욱씨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요즘 들어 그런 논란에서 일부러 관심을 끄고 (관심경제적 자원을 투여하지 않고) 있었지만, 요즘 읽은 책과 상통하는 지점이 있어 논란이 불거진지 며칠이 지난 오늘 업로드된 해명 영상을 보았다.
영상을 보고 나니, 근 2년간 했던 일이 생각났다. 일종의 여러 기업의 청년 노무를 관리하는 사업이었는데, 거기에도 정말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났었다.
때로는 회사가, 때로는 노동자가 상대방의 어이없는 짓거리를 그저 참고 넘어가는 게 최선인 경우가 많았다. 열이면 아홉, 한 번 불거진 갈등은 해결되지 못했다. 개중에는 그 영역에서 유명하고 신망있는 기업 혹은 대표를 보고 들어간 청년 노동자들도 있었는데, 안과 밖의 간극때문에 힘들어하다가 중도에 그만 두기도 했다.
강형욱씨 부부의 해명 영상을 보면서 그 케이스가 생각났다. 유명하니까, 믿을만 하니까 (나름의 환상을 가지고) 입사했는데 자기 기준에 뭔가 아니다 싶은 일을 겪고 갈등을 빚다가 그만 두는 경우 말이다.
동시에 강형욱씨가 좋은 조직문화를 만드는 대표는 아니라는 생각이 곳곳에서 들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농삼진칠로 대표들도 자격증 제도가 있어서 정기적으로 소정의 교육과 시험 과정을 이수해야 대표 자격을 유지하게끔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직원에 대한 인사평가는 당연하지만 대표에 대한 평가는 누가 하겠는가?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한국 사회의 단면이자 큰 문제다.
직원과의 기본적인 소통, 조직 및 인사관리에 소홀하거나 부족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 물론 이 경우 몇몇 질 나쁜 직원들이 난리를 치는 통에 이런 끔찍한 사태까지 발생했지만, 몇몇 문제에서는 경영자가 문제의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몸담았던 사업에서도 그렇게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서 개똥자존심 부리며 오해와 곡해를 일삼아 기업 전체를 곤경에 빠뜨렸던 그런 청년 노동자들이 꽤 있었다. 나 자신이 노동자이자 반자본주의자이기에 노동자에 친화적임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
<망설이는 사랑>이라는 책은 아이돌 논란에 대한 팬덤의 정동을 다뤘는데, 논란이 발화되고 확산되어 렉카와 대중이 달려들고, 황색 언론이 부추기고, 대중은 재판관이 되어 도덕관념을 들이대고, 그 와중에 몇몇 개인이 희생되고, 어떤 집단에게는 낙인이 찍히고, 그러다 관심경제에 투여되는 정동의 자원이 줄어들거나 질이 달라지면 수그러들었다가 또 다른 대상에게서 반복되는 게 아이돌판에서의 논란 진행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강형욱은 개인의 캐릭터와 서사를 가지고 기업을 설립했기에, 그 개인이 아이돌이 내재하는 '인격의 상품화'와 꽤나 맞닿아있다. 그래서인지 잠깐 확인한 영상 댓글에는 역시나 "강형욱을 믿고 있었는데 해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고 안심이 된다"는 반응이 많다.
그런데, 어차피 진실은 사실에 대한 해석이고 사건이 발생한 순간부터 사람들이 캐치하게 되는 것은 유사사실들일 뿐이다. 유사사실이라 의미없다는 게 아니라, 공론장을 구성하는 유사사실들은 서로 얽히고 떨어지면서 많은 진실들을 양산하고, 거기에는 (이 경우에는) 특정 개인을 향한 사랑이나 신뢰, 반대로 불신이나 혐오가 투여되어 작동한다. 여기에서 완전히 순수하고 무결한 팩트를 찾아내겠다고 애쓰는 건 감정과 이성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짧은 근대의 환상일 뿐이다. 공론장은 이성이 아니라 정동의 복잡한 작용 속에서 살아움직인다.
강형욱에 별 관심없는데도 어떤 논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덕질'이란 것을 수행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길게 적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궁금했다. 수많은 논란 앞에서 왜 '대중'은 저렇게 움직이는가? '이때싶' 들이대며 이분법을 강요하고, 스스로 지엄한 재판정에 올라 누군가를 판단하여 비난하고, 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바퀴벌레 사라지듯 스르르 사라지는가? 나 또한 예전에는 훨씬 더 자주 그런 대중의 모습이었기에, 결코 쉽게 버릴 수 없는 질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대중으로 인해 목숨마저도 버려야 했던 이들이 (유명인이 아니라도) 너무 많았기에.
어차피 대중에 대한 저 질문에 뚜렷한 답은 없다. 다만 양상을 밝히며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요원하겠지만 난 초중고 교과과정에 인권과 노동에 대한, 나아가서는 권리 전반에 대한 교육이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은 경영인을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누군가는 X선비같은 생각이라고 이죽거릴수도 있겠지만, 적잖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삶과 책 속에서 끊임없이 이 문제에 천착했던 바, 어차피 모든 걸 단시간에 바꿔버릴 해결책같은 건 없다. 그런 건 흑과 백 뿐인 이분법적인 세상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강형욱씨는 영상 말미에 "보듬은 이제 더 이상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지 않지만, 이번 일로 인해 보듬 출신의 훈련사들이 손가락질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궁금해 못참겠다는 얼굴로 "강형욱 논란이 진짜냐?"고 물을 것이고, 누군가는 힘내라고 위로할 것이고, 누군가는 끝까지 낙인을 찍으려 쫓아다닐 것이다. 이 모든 반응들이 잠잠해져 완전히 잊히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거기에 적절한 조건들까지 협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어려운 망각으로의 길 위에서 많은 '피해자'가 양산될 것이다.
<망설이는 사랑>의 제목처럼 나는 애정을 갖고 망설이는 사람이 이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피해 당사자에게서 자주 터져나오는 안타까운 호소 중에는 "당신의 가족이 이런 일을 당했어도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가 있다.
이 말은, 누군가와 감정/정서/정동적으로 얽혀있다면 그를 둘러싼 사건이나 이야기에 대해서 다르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객관-주관, 이성-감정이라는 근대가 만든 신기루같은 이분법을 깨버리는 치료제로 작용한다. 우리는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빠르고 선명한 이분법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유보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든다. 타인과 사회가 내세우는 '정상적인' 도덕윤리규범에도 맞서야 하고, 자신에게 이미 내재된 규범과도 늘 긴장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런 자신에게 서둘러 부착되는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라는 낙인에 대해서도 방어해야한다. 논란(과 공론장) 한 가운데서 그런 분투를 이어가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이 있고, 우리가 주목하고 응원하며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이들은 그들이다. 그 귀기울임 자체가 그들에게는 연대이자 지지이고, 모두를 위한 변화의 단초를 찾는 작업의 시작점이다.
+) 빠르고 선명한 도덕적 판단을 부채질하는 데 SNS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에 대해서는 <혼란유발자들>이라는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으니 시간을 내어 한번 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SNS의 폐해를 다룬 책이 많지만, 내가 봤던 책 중에서는 저 책이 가장 밀도와 깊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