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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존 홀러웨이 삼부작과 함께

by 엔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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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홀러웨이의 삼부작. 이른바 할머니, 엄마, 손녀 책




#1. <일상으로의 초대>, (신해철)


여러분은 언제 삶의 행복을 느끼시나요? 예전에는 원하는 직업을 갖거나, 목표를 이룰 때라고들 많이 대답했는데, 요즘은 많이 달라진 듯 합니다. 행복의 기준이 거창한 소유나 성취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즐거움, 이를테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뜨개질을 해서 반려견에게 입힐 옷을 만드는 것, 빵을 만들어서 친한 이웃에게 선물하고 기뻐하는 얼굴을 보는 것…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한 순간들의 가짓수는 지구상에 머무는 사람의 숫자만큼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언제 삶의 불행을 느끼시나요? 위의 순간들 방해하는 순간이라고 하면 될까요? 좀 더 근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원하는 직업을 갖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짬을 낼 수 없는 때 우리는 불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먹고사니즘(-ism)"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서울에 사는 30대 여성 김 모씨의 경우입니다. 1인 가구로 거주하는 강서구에서 직장인 여의도까지 이래저래 계산하면 1시간 가까이 걸리기 때문에 출근시간인 9시까지 도착하려면 아니, 직장 특성상 늦어도 10분 전까지 도착하려면 일어나서 씻고 화장하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늦어도 오전 7시에는 기상합니다. 요즘은 조직문화가 나아져서 저녁회식도 거의 없고 업무상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직장은 여전히 스트레스입니다. 칼퇴만 바라며 적당히 딴 짓도 하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고 일부러 직장을 멀리 돌아 바람을 쐬다가 들어갑니다. 칼퇴하면 다행이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하고, 그러고나서 집에 도착하면 오전 7시 기상을 위해 바로 취침해야 합니다. 그나마 주말은 보고 싶은 뮤지컬도 보고 친구들을 만나 수다도 떨지만, 월요일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 직장 안 다녀도 매달 따박따박 돈이 꽂히면 좋겠다… 아니 애초에 돈이 필요없는 세상이라면 좋겠다… 로또라도 돼라… 비트코인은 너무 어려워…


실은 어떤 정보도 없이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제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러분의 이야기이도 할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줄곧 저런 모양이었습니다. 이 모양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는, 탈출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게 행복을 주는 일상을 살기 위해서 나를 갉아먹는 일상을 오랫동안 살아야 간신히 빵부스러기만큼 얻을 수 있는 세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해 보입니다.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는 "나를 갉(갈)아먹는 일상"인 먹고사니즘이 있습니다. 이걸 놓아버리는 순간 찾아올(것만 같은) 붕괴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직장에서 게으름을 피고, 다른 일상을 꿈꿉니다. 노동자‘로서’의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지만, 노동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반복되는 모습을 벗어나 다른 세상에서 내가 그리는 일상을 살 방법은 현세에는 정녕 없는 것일까요? 오늘 소개할 책은 이런 사람들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한 책입니다.




#2. 우리는 절규한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YB)


존 홀러웨이 삼부작의 첫 책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절규한다.


여기에서 ‘우리’we는 비정형적입니다. 다시 말해 형태가 정해져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당신과 나 단둘일 수도 있고, 한국사회 구성원일수도 있고, 인류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삼부작 전체에서 이런 비정형성(반정체성주의)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절규’할까요? 여기에서 절규는 불합리한 상황, 부당한 처사, 고통스러운 사건, 억울한 일, 거대한 슬픔 앞에서 내지르는 비명과도 같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절규'합니다. 세상이 거대한 불합리, 부정의, 고통, 억울, 슬픔의 총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총체성'은 마르크스와 저자 모두에게 중요한 개념이므로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알고있는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이나 남미에서) 공유되는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1950년대 미국은 매카시 열풍에 미국공산당이 몰락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미국의 강한 영향 아래 있는 한국(남한)은 독재자 이승만의 집권으로 철저한 반공주의 국가가 됩니다. 게다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의 존재로 인해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는 늘 왜곡과 탄압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에 반해 유럽과 미주 대륙 등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다양한 갈래로 발전했습니다. 일국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소련과 중국, 북한이 독재국가로 귀결되면서 일찌감치 변화를 꾀하던 마르크스주의는 1968년 이른바 68혁명을 계기로 거대한 분화를 맞이합니다.


현재 마르크스주의는 공히 '먹고사니즘'에 대한 학문으로 여겨집니다. 마르크스는 그의 주저인 <자본>에서 철저히 부르주아 경제학의 개념들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에 내재한 논리를 파고들어 분석하고 비판합니다. 존 홀러웨이에 따르면 오늘날의 사회과학 방법론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자신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 살고 있음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비판을 가했습니다. 객관성이나 중립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비참한 세계 현실을 주조한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모순(적대)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계를 만들 수도, 끝낼 수도 있는 존재, 이 모든 사태의 주인공이 바로 ’인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이것이 유물론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생애 내내 절규하는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 논리 내부의 모순(적대)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떤 정체성에도 껴맞춰질 수 없고, 늘 ‘안에서-대항하여-넘쳐흐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열어줄 ‘희망’이 바로 이 ‘적대(모순)’에 있습니다. 존 홀러웨이에게 희망은 전혀 외부적인 무엇의 개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데서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적대들, 위에서 언급했던 우리의 일상 속 노동현실, 여가현실, 경제적 현실 속에서 겪는 부딪침, 어긋남misfit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은 늘 '아직-아님'에 속합니다. 정해진 완벽한 유토피아를 좇으며 만들어내는 희망은 외부의 개입, 영웅의 출현, 국가의 권능, 정당의 선도에 의존합니다. 이전의 반자본주의적 운동,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그랬습니다. 이 모든 움직임이 어떤 실패로 귀결되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세력도 늘 '안에서-대항하여-넘쳐흐르는' 인간의 절규와 저항과 반란과 균열에 응답해 희망을 '지금-여기'에 실현해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적대하고 저항하는 순간 그 자체가 희망하는 시간, '아직-아님'을 인식하는 순간입니다.


어차피 희망이란 게 늘 신기루같고 어지러우니 그렇다치고, 그러면 뭘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삶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존 홀러웨이는 그 핵심을 ‘적대(모순)’로 보는데, 대체 그게 뭘까요? 이러한 질문 앞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존 홀러웨이가 그의 삼부작에서 내놓은 답의 입구는 ‘노동’에 있습니다. 우리가 늘상 하고 있는, 하지 않으면 굶어죽게 만드는 그 ‘일’ 말입니다.




#3. 끝없이 돌을 밀어올리는 시지스프 외로운 삶처럼 살아온 것 같아 (<엘도라도>, 개구장애)


마르크스와 홀러웨이에게 ‘노동’은 ‘가치와 잉여가치’를 발생시켜 자본을 증식시키는 핵심적 에너지입니다. 여기서 인간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은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자본주의가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기 전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부르던 시기에는 생산자와 생산수단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야 분리되어 있었지만, 사회적 흐름 안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존 홀러웨이는 자본주의가 바로 그 ‘사회적 흐름’을 파열시키고, 각각을 (동일성주의 하에) 명사화/개념화/범주화시켜서 사회적으로 응집시켰다(재구조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해, 그의 비유대로 노동자-노동-생산수단… 이런 식으로 수없이 분리된 개념들을 거미줄로 엮어 (우리의 의지에 상관없이) 제맘대로 여기저기에 갖다놓았다는 뜻입니다.


애초에 자본주의가 정의하는 방식의 노동자가 아니었던 우리는 오랜 기간의 수탈과 폭력과 훈육에 시달린 결과 늘 '안에서-넘쳐흘러-넘어서서' 어긋나고 있음에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인 것처럼 '노동자'라는 명사화된 정체성에 묶여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지만 이는 늘 노동자에게 100% 돌아오지 못하고 '잉여'를 발생시키며, 이 잉여가치가 자본이 증식하는 하나뿐인 에너지원입니다. 홀러웨이에게 있어 이 자본은 궁극적으로 '화폐'를 핵심으로 합니다.


위에서 자본주의가 ’사회적 흐름‘을 파열시킨다고 했습니다. 마르크스나 홀러웨이 모두 '사회적 평균 노동', '사회적 응집' 등 사회라는 개념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 자본주의 내부 논리에 포섭된 개념입니다. 홀러웨이가 '사회' 개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유일한 맥락은 바로 여기뿐인데,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이 세계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되살려야 할 '연결/흐름'입니다. 그 '사회적 흐름'은 정해진 시간에 하기 싫은 일을 하러 회사에 가기 위해 억지로 눈을 떠야 하는 일상을 벗어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뜨개질을 하고, 빵을 굽고, 노래를 부르고, 함께 시원한 강변을 산책하고, 슬픔에 빠진 친구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일상이 그 순간이자 하나의 힌트입니다.


굳이 대단한 학자가 '사회적 흐름'이 파열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아도 우리는 숨쉬며 존재하는 순간마다 이를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그 파열의 원흉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마르크스와 홀러웨이는 그 원흉이 '자본'이라고 적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노동과 그 결과물인 생산물은 '화폐'를 매개로 하는 '상품'이 되어 '유통'되고, 이 과정이 회전하여 갈수록 빠르게 반복되며 오늘날에 이르러 ‘화폐에 뒤덮인 지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홀러웨이는 마르크스 초기의 사상을 따라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된 노동’으로 파열되고 분리되기 이전의 인간의 행위를 ‘활동’Acting이라고 부릅니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행위 이외의 모든 행위에서 활동을 조금씩 맛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는 '소외된 노동 vs 의식적 삶-활동' 사이의 관계를 적대Antagonism라고 보면서, 우리의 구체적인 행위가 추상노동으로 먹혀들어가지만 거기에는 ‘안에서-넘쳐흘러-넘어섬’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 선생님은 학생들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팔릴만한 노동력으로 생산하는 데 일조하지만, 동시에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기도 합니다. 간호사는 자신을 고용한 병원을 위한 이윤을 생산함과 동시에 환자를 돌보는 활동을 합니다. 공장노동자 또한 공장주를 위한 이윤을 생산하고 본인은 착취를 당하는 노동자이지만 일터에서 짬짬이 기타 튕기는 상상을 하며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합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적대 속에서 활동(구체노동)은 추상화(추상노동)됩니다.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이라는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은 추상화와 물화(물신주의)의 결과입니다. 추상화란 무엇일까요? 뜨개질과 빵굽기와 목공(말하자면 구체노동)이 서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노동이라는 개념에 흡수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서로 다른 특유한 행위(활동)들이 노동이라는 이름을 퉁쳐진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행위로 인한 결과물도 상품이라는 개념에 포획되어 가격이 매겨지고, 이것들의 움직임이 ‘화폐를 통해 매개‘됩니다. 우리는 옷을 입으려면, 빵을 먹으려면, 책상을 사려면 '노동'을 해서 '화폐'를 얻고 그 화폐를 ‘교환’해야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이렇게 물질만 추상화되고 물화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됩니다. 우리 대부분은 ‘노동자’입니다. ‘노동’, ‘노동의 결과물’, ‘생산양식(기계 등)’과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가 아닌 나’와도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도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데, 그 자유는 ‘노동자로서 고용주와 계약을 맺을 자유’뿐입니다. 이게 정말 자유인가? 의문을 품어도, 그 누구도 이 자유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를 그렇게 길들여왔습니다. 하지만 그 길들임은 늘 미끄러집니다. 우리는 ‘노동자이고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홀러웨이가 말하는 반동일성주의입니다. 우리는 흑인이고 흑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성이고 여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주민이고 선주민이 아닙니다, … … 동일성에 적대하는 우리, 여기에 희망의 조각이 있습니다.


#4.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희망가>)


잠시 정리를 해 봅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본래 사회적 흐름에 연결되어 있던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명사들로, 범주로 분리되었습니다. 노동, 노동자, 자본, 자본가, 화폐, 남성, 여성, 경제, 정치, 국가,진보, 보수 등등… (동일성주의, 추상화, 물신주의) 그 분리된 것들은 이전의 사회와는 다른 모습으로 새로 짜입니다. 거미줄에 걸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로 말입니다. (사회적 응집, 총체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을 하고 그 결과로 얻은 화폐로 상품을 구매하는 ‘일상’,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일상은 당연하지도, 오래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제 또한 이러한 일상을 굴리기 위해 쉬지 않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또한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희망의 시작은 우리에게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자본의 논리와 적대합니다. 자본 논리 ’안에서-‘ 살지만, 그것에 ’저항하여-‘ 어디로든 ’넘쳐흐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자본 또한 우리를 ’가두려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올려놓고 톱을 들이댑니다. 우리는 비록 묶여있지만 어떻게든 몸부림쳐 톱을 피합니다. 업무중에 딴 짓을 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도우며,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을 기대하여 요리를 하는 그런 행위(활동)들이 자본이 우리를 영원히 묶어놓을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존 홀러웨이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 책 <크랙 캐피털리즘>은 제목 그대로 자본주의 체제에 균열을 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제목부터 강렬한 손녀 책인 <폭풍 다음에 불>에서는 균열 개념을 더욱 발전시키는데, 양쪽에서 우리를 짓누르려 다가오는 거대한 빙벽인 자본을 깨뜨리기 위한 균열을 내는 데 있어서 그 벽이 우리 쪽으로 무너지지 않고 바깥쪽으로 무너지도록 하는 단층선을 찾는 것과, 비록 작아보이고 금방 다시 얼어버리는 저항과 균열일지라도 여기저기서 또 다른 우리들이 내는 균열들이 연결될 수 있음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균열을 내는 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코로나 팬더믹의 한가운데서 집필한 <폭풍 다음에 불>은 그 균열의 핵심에 ’화폐‘가 있으며, 화폐를 죽이면 벽이 바깥쪽으로 무너질 수 있다고, 우리가 낸 작아보이는 균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길 법합니다.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행동보다는 국가가, 정당이, 노동조합이, 어떤 강력한 지도자가 움직일 때 더 거대하고 확실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움직임에 합류하는 게 더 나아 보인다. 하지만 존 홀러웨이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러한 입장은 홀러웨이가 비판한 '동일성주의'에 갇힌 저항입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역사와 같이, 노동자 계급, 진보 정당, 진보를 표방한 (사회주의) 국가의 저항과 투쟁과 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모두 동일성주의에 갇혀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목적 달성을 궁극의 목표로 하다보니 변화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로는 동일성주의가 바로 자본 내부의 논리이기 때문에, 그 논리에 적대하지 않는 한 '화폐(자본)'라는 히드라의 몸통을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드라는 머리가 여럿 달려 있습니다. 국가, 성별, 지역 등등 … 이것들은 잘라내면 다시 돋아납니다. 이러한 사태는 역사가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일성주의에 기반한 투쟁은 결코 자본을 내파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적대로 가득합니다. 여기에서 적대는 단순히 감정적으로 서로 으르렁거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안에서-대항하여-넘쳐흐를‘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의미에서의 적대입니다. <폭풍 다음에 불>에서 완성시키는 적대의 핵심에는 '부와 풍요의 적대'가 있습니다. ’부‘는 자본, 화폐 등으로 부를 수 있는, ’풍요‘에 대한 추상화입니다. 쉽게 말해 풍요richness가 자본주의를 만나면 부wealth가 됩니다. 부를 자본(화폐)의 축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치솟는 주가, 국경을 뛰어넘는 사모펀드, 모두가 미쳐 날뛰는 비트코인 열풍 등이 이를 형상화합니다.


그렇다면 부에 적대하는, 다시 말해 부의 ’안에서-대항하여-넘쳐흐르는‘ 풍요는 무엇일까요? 홀러웨이는 ’우리의 창조적 잠재력의 절대적인 발휘‘라고 말하며, 일상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위에서 계속 예로 든 활동들, 쉽게 말해 ’노동‘이 아닌 행위들 모두가 풍요라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이 풍요는 자기결정이며, 상호인정이고, 상호존중입니다. 아나키즘에서 말하듯 어떤 권력관계나 위계에 갇히지 않으면서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운데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토론하고 갈등하고 논쟁하는 공동/공통체되기Communing의 흐름입니다.


부의 주체는 계급-화(-fied)된 노동계급입니다. 노동자라는 정체성에 가두어져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말합니다. 반면 풍요의 주체는 바로 ’그 안에서-대항하고-넘어서는‘ 우리,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의) 다루기 힘든 손‘, ’프롤레타리아트‘, ’어떤 이름도 없는 주체‘입니다. 명사형으로 결정짓기 싫어하는 홀러웨이는 여기서만큼은 이 주체를 잠정적으로 무리rabble라고 표현합니다. 혹은 ’우리!?‘입니다. !는 분노와 부정성을, ?는 불확실성, 비규정성, 개방성을 의미합니다.


무리/우리!?가 맞서 싸우는 데 있어 2008년 세계공황과 코로나 팬더믹은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는데, 자본은 자신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 자신 나름의 투쟁을 매 순간 쉬지 않고 반복합니다. 자본이라는 히드라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잉여가치라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마르크스가 제안한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공황) 속에서 우리가 행하는 투쟁으로 인해 이 에너지를 더 끌어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자본(가)이 택한 방법은 위기를 자꾸만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자본 그 자체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한 번 리셋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국가(특히 미국)와 연방은행은 그럴 수 없습니다. 리셋했다가는 생존의 위협에 몰린 무리들의 저항이 폭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동계급을 뛰어넘은 전세계적인 좌파적 투쟁뿐 아니라 극우의 투쟁 모두 자본(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이 두려움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라고 홀러웨이는 주장합니다.


위기가 미뤄지면 질수록 ’돈 놓고 돈을 먹는‘, ’화폐의 절대량이 폭증하고 주가가 치솟는‘ 가상화폐의 시대는 뚜렷해집니다. 홀러웨이의 비유에 따르면 이는 절벽 끝에서 점프해서 마치 땅이 있는양 계속 다리를 휘저으며 하늘로 향하는 애니메이션의 연출효과를 연상시킵니다. 언제 어떤 계기에 의해 추락하게 될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갈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금 강조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러한 세계금융적 사태가 곧 희망인 것은 아닙니다. 무리들의 폭발적인 저항이 곧바로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희망이 이어지려면 바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서의 적대, ’일상 안에서-그것에 저항하여-흘러넘치는‘ 우리의 삶과 행위를 끊임없이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 흘러넘쳐야 합니다. 자본으로부터, 자본이 부과한 정체성들로부터 부단히 어긋나는 나를 발견하고 자본에 비복종하는 행위를 이어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무너진다고 해서 유토피아가 다다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때에도, 지금처럼, 창조적인 자기결정과 상호존중과 상호부조에 기초한 공동/공통체되기를 통해 일상을 끊임없이 바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모든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참 많은 것들이 바뀌어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성적 희망, 홀러웨이가 전달하고 싶었던 그것입니다.




후기 : 개인적인 이야기


나이를 먹으면서, "혁명"이니 "진보"니 하는 말들에서 점점 멀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심드렁해졌다. 왜냐하면 물음표만 늘어갔기 때문이다.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라는 어떤 시사평론가 블로그의 제목이 동감이 되는, 진보는 기술적 진보와 자본주의의 진보로 오염(?)된 세상이다. 세상이 홰까닥 뒤집히는 일이 예수가 말한 하느님나라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을 심지어 "희망과 저항과 반역"을 부르짖는 정치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하고 있고, 자본주의의 폭주 앞에서 마르크스 이론가들이 집단적 우울증에 빠지는 때이니 오죽하겠는가.


2022072219144318425_l.jpg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던진 "이렇게 살 순 없지 않나?"라는 질문은 나에게 한 번 울림을 준 뒤 여지껏 떠나지 않는다. 12.3 내란 이후 우리들 사이에 울려난 "순응하려고 태어났어? 저항 좀 해!"라는 외침도 마찬가지다. 나는 다시 어떻게 저항하지? 무엇을 지향하지?


결국 답은 일상이다. 평범하고 싶은 일상. 그럼 그 일상의 내용은?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하는 행위들. 먹고, 자고, 싸고, 입고, 놀고, 걷고, 뛰고, 기고, 보고, 듣고, 쉬고, 닦고, 씻고, 치우고, 웃고, 울고, 아프고, 돌보고, 노래하고, 그림그리고, 글을 쓰고, 조각하고, 만들고 ... 아기든 어르신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게이든 바이섹슈얼이든 레즈비언이든 트랜스젠더든 아프리카에 살든 유럽에 살든 아시아에 살든 부자든 노숙인이든 장애인이든 ... 누구든 이 "행위-활동"을 한다. 이게 일상의 내용이다.


찾았다 오마이ㄱ...아니 내 저항과 지향. 일상을 만드는 자기결정권. 하지만 타인과 이미 스며들고 얽혀있음을 잘 알고 행위하는 (feat. 신유물론) 상호존중과 상호부조의 공동/공통체. 이건 존 홀러웨이의 표현이긴 하지만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경제도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이러쿵저러쿵 자본 논리 (동일성주의)에 의해 분리되고 다시 짜여진 거미줄을 끊고 사회적 흐름이 물결쳐 넘쳐흐르는 사건을 원한다. 그 사건을 바라며 저항한다.


존 홀러웨이는 삼부작 마지막 책 <폭풍 다음에 불>에서 검고 낮은 구름이 짙게 깔린 공원 벤치에 앉은 소녀가 비스킷을 꺼내 먹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소녀는 비스킷을 먹은 후 말한다. 모자라, 모자라, 모자라... 이 갈망,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을 새로이하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사람으로 살게 한다. 자본주의를 부수고, 자본주의너머로, 끊임없이 나아가게 한다. 사빠띠스타의 정신처럼 "끊임없이 걸으며 질문하게"한다. 당신도 이미 그 길에 함께하는 중이다. 인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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