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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시대

난 나야

by 엔틸드




당신이 기억하는 1990년대의 한국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 때 살고 있던 분들이 아니라도, 대중매체나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각자의 90년대가 있을 겁니다. 더군다나 크게 유행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시기가 80년대 말에서 96년까지이니, 2020년대 한국인에게 90년대는 추억보정과 대중문화적 배경지식이 잘 버무려져 포장된 문화컨텐츠에 다름아닌 것 같습니다.


90년대가 여전히 ‘슈가맨’처럼 꾸준히 소환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독재국가의 붕괴와 자유화, 냉전의 종식, 한국 군사독재정권의 몰락과 문민정부의 탄생, 3저 호황 등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맞물려, 아마도 다시 없을 한국과 일본의 유일무이한 행복의 시대였기 때문이죠.


원인이야 다양한 각도에서 찾아낼 수 있겠지만, 한국 또한 일본의 뒤를 따라 80년대 말부터 거대한 자유와 풍요의 물결을 타고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중산층의 존재가 가장 뚜렷했던 시기였으며, 모두가 삶이 더 나아질거라는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믿던 시기였습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독재정권이 그토록 부르짖던 '하면 된다'의 정신이 실체를 드러내는 듯한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죠. (지금에야 ‘대중’의 눈에 띄기 시작한 여성, 퀴어, 장애인, 비인간존재의 고통은 물론 철저히 가려지고 있었지만요.)


이렇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게 되니, 그 동안 억눌려있던 각자의 욕망이 격렬하게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대를 개성시대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개성 個性 은 사전적으로

개개인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 성격·취향·사고방식 등으로 나타남. 개인성.

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개성은 특히 한국문화 전반에서 새로운 지향을 향해 뿌리를 뻗으며 새로운 모양의 숲을 형성하게 되는데, 특히 재즈와 록과 트로트가 각기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어 군사독재 하에서 이리 저리 꺾이고 억눌렸던 음악계는 그 속에서 기다리며 에너지를 축적한 이들과 그 시기 드물지만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해외 유학파 뮤지션들을 통해 오늘날 K-Pop의 원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새로운 숲을 만들어 냅니다. 그 숲에서 가장 눈에 띄가 자란 나무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입니다.


물론 서태지 한 명만으로 한국 대중음악계가 뒤바뀐 건 아닙니다. 서태지는 이를 상징하는 아이콘일 뿐이고, 김건모, 신승훈, 박미경 등의 이른바 오버그라운드 (주류 음악계)와 들국화, 동물원, 김광석, 유재하, 봄여름가을겨울 등 언더그라운드(오늘날의 인디 음악계와는 흐름상 조금 다른 개념)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90년대 폭발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우리는 개성시대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데, 미디어와 언론은 이를 자기PR시대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개개인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을 성격, 취향, 사고방식으로 나타내는데 거리낌이 없는 세대를 조명하고 응원하는 대중의 정서가 미디어와 얽히면서 개성의 숲에 거대한 수원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거리낌없이 자신의 생각과 색깔을 표현했던 그 시절 노래 가사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해를 바라진 않아 / 나는 나를 믿을 뿐” - 강산에, 아웃사이더


“손엔 하이데거의 책은 있지 / 아무도 이해못할 말을 하고 / 돌아서서 웃는 나는 아웃사이더“ - 봄여름가을겨울, 아웃사이더


아웃사이더가 '아싸'라는 줄임말로 마치 마이너리티의 부정적인 뉘앙스로 변질되어버린 지금과 달리, 이 당시에는 경직되고 천편일률적인 메이저리티를 거부하고 스스로 아웃사이더임을 천명하는 태도가 힙하게 여겨졌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가수들도 있습니다.


“같은 생각하며 살기엔 / 내 인생이 /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어 / 조금 튀게 난 살아갈거야 / 그 누가 뭐라 한다고 해도“ - 리아, 개성


“왜 내가 아는 저 많은 사람은 / 사랑의 과걸 잊는걸까 / 좋았었던 일도 많았을텐데 / 감추려 하는 이유는 뭘까 / 아 난 누구에게도 / 말할 수 있어 내 경험에 대해 / 내가 사랑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 오 언제 까지나“ - 주주클럽, 나는 나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죠 / 어머니는 말하죠 왜 그렇게 사느냐고 / 밤새도록 방황하며 거릴 걷곤 했었지 / 어리다고 말하지만 어리지 않아요“ - 도원경, 난 인형이 아니에요


개성시대의 메시지를 사회와 연결지어 조금은 성찰적으로 바라본 노래도 있습니다.


“나만 혼자 뒤떨어져 /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 걱정스런 눈빛으로 / 날 바라보는 친구여 /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90년대를 살았던 청춘들에게 그 시대는 잃어버린 나를 찾고 표현해야만 하는 시대였습니다. 여전히 사회가 제시하는 인간상에 철저히 부합하도록 강요하는 압력이 강고했던만큼, 젊은이들은 더 뚜렷하고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비록 미국 (제국주의?) 자본의 첨병인 청바지회사 리바이스의 광고이지만 그 광고가 제시한 문구는 그 시절 청춘들의 구호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난 나야"


흥미롭게도 광고에서 이 대사를 말하는 모델은 당시 인기를 끌던 2인조(^^)그룹 패닉의 멤버 김진표였습니다. 지금 이적의 이미지는 조금 달라졌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적과 김진표의 패닉은 말 그대로 '기성세대에게 패닉을 몰고 오는' 파격적인 메시지의 노래를 많이 발표했습니다. 그러니 김진표는 “난 나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모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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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는 저는, 그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난 나야”라는 광고 문구가 몇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삶에 흐르는 강렬한 메시지가 된 걸 보면, 저 또한 개성시대의 수혜를 입은 듯 합니다. 특히 내가 누구인지가 가장 궁금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개성시대가 미친 영향력은 대단했죠.


윤리 교과서에서 봤던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제 삶을 지배하고 지탱해왔습니다. 그 시절 만났던 또 다른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데카르트는 아직까지도 제 삶에 독을 풀어놓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요.


모두가 라는 금광을 찾아 우르르 달려가고 있던, 어찌 보면 개성이라는 다채로움이 역설적으로 획일화라는 병폐를 만들던 그 때, 퇴마록이 열어제낀 판타지 소설의 열풍 속에서 이영도라는 천재적인 작가가 내놓은 데뷔작 <드래곤 라자>에 등장하는 대사가 제게는 하나의 해독제였습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한 마디에 저는 거대한 자아 찾기의 행렬에서 잠시 비껴나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개성시대가 만든 숲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산소를 만들어주는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에야 조금 촌스러울만큼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자화상들이, 그때에는 주먹을 꽉 쥐고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어 꺼낼 수밖에 없는 낯선 모습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때처럼 망설이며 힘겨워하는 또 다른 아웃사이더들이 수없이 많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저는 개성시대가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도래하기를 바라봅니다. 자본주의의 흐름이 가져다 준 우연적인 풍요를 기반으로 하는 개성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시대처럼 경쟁을 강요하는 압력이 가장 약한 가운데, 인간이 먹고 사는 문제 이외의 다른 일상에 충실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개성시대를 다시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인류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생존을 위한 노동이 삶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고, 타인과 관계하며 단수가 아닌 개개인의 창의성과 예술성, 다양한 정체성과 개성이 색색깔로 만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각각의 개성에 어떤 위계나 판단도 덧붙이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K-Pop이 세계를 휩쓸듯 하나의 큰 흐름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 누리고 싶은 크기와 깊이만큼의 다채로운 문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개성시대가 다시금 숲이 되어 다양한 나무들이 얽히는 가운데 아름다운 빛깔을 비추어 새와 동물과 꽃들이 모여드는 세계를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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