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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by 엔틸드


제가 한국 축구, K리그에 본격적으로 입문할때쯤 이정효가 광주FC에 감독으로 부임하고, K리그 2부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2부 꼴찌가 예상되던 그 해, 이정효의 광주FC는 단숨에 독보적 1위와 리그 사상 최다 승점,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우고 다음 해 1부 리그에서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어요.


3위 팀의 자격으로 AFC가 주관하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엘리트)에 출전한 이정효의 광주는 J리그의 강팀 요코하마 마리노스를 7대3으로 쌈싸먹는 등 돌풍을 일으키며 팀 사상 처음으로 - 그리고 웬만한 K리그 구단들도 이루지 못한 - 8강 진출에 성공합니다.


2025년 올해, 광주FC 구단이라는 거대한 무능덩어리가 멍청한 행정으로 적자를 내고, 자본잠식상태를 극복하지 못해 협회로부터 선수 영입 불가라는 철퇴를 맞고, 그로 인한 적자를 메우고자 이정효가 키운 뛰어난 선수들을 팔아제끼며 습자지처럼 선수층이 얇아진 올해조차 오직 이정효 사단의 힘으로 팀을 멱살잡고 중위권에 안착시켜놨습니다.


이제 이정효가 광주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고, 지원이 부족한 (무능한) 이 구단에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죠. 심지어 광주 팬들조차 이정효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정효는 대표적인 월드컵 스타 안정환과 친구였고 오랫동안 몸담은 부산에서도 인정받는 선수였지만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조차 이름값만 보고 뽑기로 유명한 멍청한 한국 축구판의 문화에서는 이정효와 같은 무명이 1부 리그 감독의 자리에 앉기란 상상할 수 없죠. 이정효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패자부활전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늘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하게 노력하고 공부해 실력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언제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시즌이 끝나면 짧은 휴식기를 이용해 영국에 가서 프리미어리그 팀 경기를 보며 공부하기로 유명합니다. 광주에서는 프리미어리그의 탄탄한 팀인 브라이튼을 게임 모델로 삼기도 했습니다. 올해도 역시 시즌이 끝나자마자 자기 사단의 사람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관전했습니다. 이정효는 자기 사단의 코치를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각자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본인과 협업하는 관계로 보는 것이죠.




그런데 얼마 안가, 썰쟁이와 기자들 사이에 이정효의 수원삼성블루윙즈(이하 수삼. 수삼보다는 홍삼?)의 연결설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수삼은 팬덤 규모나 배출한 선수, 감독의 면면만 보아도 전통의 명가이자 슈퍼클럽이라는 이름이 걸맞는 팀입니다. 선수로는 이운재, 서정원, 고종수, 염기훈, 감독으로는 김호, 서정원, 차범근 등 축구 좀 본 사람이라면 아는 이들이 잔뜩이고, 특히 감독에 수원과 인연이 있는 사람만 뽑는 "리얼 블루" 정책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수삼과 이정효의 조합은 예전의 수삼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만, 지금 수삼의 처지를 생각하면 대번에 이해가 됩니다. 수삼은 절박합니다. 전통의 강호로 늘 1부리그 중상위권을 오가다, 모기업인 삼성이 경영권을 자회사인 제일기획에 넘기고 지원을 줄이면서 점점 힘이 떨어졌습니다. 결국 2023년, 충격적인 다이렉트 강등을 당했습니다. K리그의 승강제는 꼴찌 팀은 군말없이 2부 리그로 내려가는 강등 시스템을 운영중입니다. 2024년과 2025년, 2년 연속 1부 승격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구단은 어마어마하게 욕을 먹고, 팬들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신뢰할만한 소스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얼마 전 수삼의 모기업인 제일기획의 고위관계자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통의 명가가 2년째 2부에 머무는 굴욕적인 상황인데도 오히려 팬들이 더 많이 모여들어, 비인기 리그인 2부 리그의 관중 흥행기록을 죄다 갈아치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충성스런 팬들(고객, 소비자)"의 존재를 보고, 다시 스포츠에 투자할만 하겠다고 생각했다는군요.




이렇게 광주라는 좁고 낡은 틀을 떠나 새로운 도전의 장이 필요했던 이정효, 그리고 명가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허세를 버리고 간절하게 절치부심하려는 수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수삼은 이미 올해 여름부터 이정효에게 접촉했다고 합니다.


계약이 임박한 지금 시점에 드러난 조건은 K리그에 유래없는 파격입니다. 기존 팀의 코치진을 싹 정리하고 이정효 사단의 코치진을 그대로 데려오고, 1-2부를 통틀어 가장 고액의 연봉을 보장했으며, 3년 기본에 추가로 1년 계약 연장 옵션, 심지어 거기에 이정효가 더 높은 수준의 리그나 팀의 제안을 받았을 경우 아무 조건없이 떠날 수 있도록 하는 보장까지.


이건 이정효가 광주에서 그랬듯이 당장 내년 수삼을 압도적인 1위로 1부로 승격시키고 바로 1부 중상위권으로 올려놓으리라는 기대와 일정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조건입니다. 지금껏 어떤 국내감독도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잘나가는 월드컵스타 출신인 황선홍, 홍명보 등등도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한 인생을 살며 여기까지 올라온 이정효에 비해 능력이나 대우면에서 초라할 뿐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금껏 제가 응원했던 팀 중에 라이벌 관계가 있다면 그 두 팀은 거의 다 빨강-파랑 색을 썼습니다. 야구에서 삼성보다는 기아(해태)를, 농구도 연대보다는 고대를,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빨강의 리버풀을 응원했습니다. K리그에서도 이정효의 광주FC는 오렌지색이었고, 또 다른 애착팀인 안양FC는 자주색, 이번에 2부에서 승격한 또 하나의 애착팀 부천FC는 빨간색입니다. 아예 색깔을 보고 팀을 고른 적도 많았습니다. 파란색보다는 빨간색이 더 정이 갔습니다. 그래서 민주당과 내란극우당이 서로 색깔을 바꿨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런 패턴이 요즘들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프리미어리그 강팀인 리버풀이 엉망이 되면서 파란 갈매기색인 브라이턴의 축구에 관심이 가고, 이정효가 좋아서 광주를 응원하던 차에 이정효가 수삼으로 가면서 파랑의 수삼을 자주 쳐다보게 생겼습니다. 사주에도 저한테 맞는 색이 파란색이라던데, 이렇게 인생의 또다른 국면이 찾아오는 건가 싶네요. (물론 이와중에도 민주당 지지자는 아닙니다만.)


물론 빨간 휴지든 파란 휴지든 잘 닦이는 휴지가 좋습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정당한) 목표(가치)만을 바라보고 남들이 파격이라고 하든 말든 가리지 않고 (정당한) 온갖 방법으로 치열하게 노력하는 이정효 감독도 아마 파랗든 빨갛든 잘 닦이는 휴지를 좋아할 것 같네요. 한국사회가 단 한번도 시스템을 거쳐 이정효와 같은 유형의 인물을 키워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더더욱 절박한 심정으로 이정효를 응원하게 됩니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이름없고 평범한 제 인생도,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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