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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덕질

하이큐!! Haikyu!!

만화, 애니메이션

by 엔틸드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생각.

"내가 왜 저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이건 과학적인 탐구를 위한 질문이 아니라 How can it be? 와 같은 감탄사에 가깝습니다.


이 <하이큐!! Haikyu!!> 리뷰도 "내가 왜 하이큐를 좋아하는 걸까? 하이큐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라는 개인적인 질문에서 출발했기에, 이 글은 본격 문예비평도 아니고 소년스포츠만화에 대한 해박한 배경지식을 갖고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하이큐를 더 잘 소개할 수 있을까? "와 이렇게 하이큐를 덕질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놀라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하이큐는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작품으로, 2012년 일본의 <주간 소년 점프>지 연재를 시작으로 2019년 4월 현재 340화를 넘겨 연재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3기까지 방영되었으며, 2019년 말~2020년 상반기 중 4기가 방영될 예정으로 제작중입니다.




- 포스트 슬램덩크?


90년대를 휩쓴 열혈 스포츠물, 슬램덩크


하이큐를 처음 접한 분이라면 받을 첫인상은 '이거 슬램덩크랑 너무 비슷한데?'일 겁니다. (슬램덩크를 아는 세대라면 더더욱 그렇죠.) 90년대 일본과 한국, 나아가 전 세계를 농구 열풍으로 몰아넣고 수많은 길거리 농구 플레이어, NBA 덕후를 양산한 전설의 고교 열혈 스포츠 만화가 바로 <슬램덩크>입니다.


생초보에 잠재력과 열정만 가득한 강백호는 히나타 쇼요, 같은 팀의 천재로 늘 강백호와 투닥이는 서태웅은 카게야마 토비오, 든든한 주장 채치수는 사와무라 다이치, 성실한 권준호는 스가와라 코시, 잠시 농구를 그만 두었다가 돌아온 정대만은 아즈마네 아사히, 그와 대립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송태섭은 니시노야 유와 일치합니다.


다른 팀에도 슬램덩크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도내 최강 팀 에이스인 해남의 이정환은 시라토리자와 에이스 우시지마 와카토시, 그 뒤를 좇는 능남의 윤대협은 아오바죠사이 (약칭 세이죠)의 주장 오이카와 토오루와 매우 비슷합니다. 심지어 윤대협과 서태웅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 관계 구도와 특정 에피소드의 내용까지 비슷합니다. 장신이 대거 포진한 상양은 철벽의 다테공고를 생각나게도 하죠.


이 쯤 되면 작가는 그냥 슬램덩크 덕후라서 종목만 농구에서 배구로 옮겨 편하게 그리고 있는 건가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렇기만 했다면 판매부수 3000만부를 넘기며 꾸준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는 인기를 누릴 수는 없었겠죠. 설정의 차용만으로 '배구판 슬램덩크'라고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슬램덩크가 히트한 90년대는 일본의 버블 경제가 끝난 시점입니다. 한국은 그보다 약 10년 늦게 IMF 외환위기로 경제 호황을 끝내게 되죠. (미국와 일본, 일본과 한국의 시간표가 10년씩 차이난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인으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인 시간이었을 겁니다. 황금기인줄도 모르고 지냈던 풍요의 시간들이 그야말로 전설처럼 지나버리고 그것보다는 냉혹한 현실이 그야말로 현실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므로 단순하게 비현실적인 주인공의 비현실적인 성공기는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슬램덩크는 실재하는 육체가 부딪치는 스포츠의 리얼하고 다이나믹한 세계를 냉혹한 현실을 배경으로 펼쳐냅니다.


강백호는 농구선수로서 필요한 자질을 타고났습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경제 사정으로 싸움질을 일삼으며 살아가죠. 그러던 그가 만난 농구코트는 비록 전쟁같은 현실과 비슷할지언정 그에게 발전과 개선의 여지가 있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발전과 개선은 주로 '자신의 육체'를 통해 달성됩니다. 강백호에게 극적인 계기를 마련해주는 주변인들이 있지만, 그런 그들 또한 자신의 발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달성해냅니다.


슬램덩크를 가장 현실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주인공 강백호의 결말입니다. 그는 가장 강한 상대와 맞서는 경기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싸워 이긴 후, 재활에 들어갑니다. 강백호가 빠진 팀이 다음 경기에서 이겼을 리 만무, 그렇게 우승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 팀은 새로운 체제로 들어갑니다.


정리하자면 <슬램덩크>는 더 이상 풍요롭지도 강하지도 않은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고, 세계화의 물결이 몰려와 반강제적으로 삶을 바꿔놓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면서 그것을 개인의 자질에 더해진 노력과 열정으로 극복하는 새로운 열혈 스포츠물로써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이큐의 시작이자 중심, 괴짜 속공 콤비 히나타와 카게야마


그렇다면 <하이큐>가 연재를 시작한 2010년대는 어떨까요? 그 20여년 사이 사회는 또 다시 변화하여, 사람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도 거대한 이념과 목표를 제시하려는 이야기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극현실과 극이상, 극과 극인 것들을 거부하게 된 것이죠. 이른바 "거대서사가 종언"된 것(오오츠카 에이지)입니다. 20년 전과 비교해서 '현실적'인 풍경도 많이 바뀌었고, 그에 대한 태도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하이큐가 슬램덩크와 설정상 비슷하면서도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이큐의 주인공 히나타 쇼요는 강백호처럼 불우한 가정환경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일본 경제가 실제로 그러하죠. 어렵다는 언론의 선전은 여전하지만, 그렇다고 핸드폰 하나 갖고 다니지 못해 차별을 경험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하이큐에서 더 이상 "90년대적 불우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히나타는 전형적인 열혈 만화의 주인공 버프로 쓰인 '비현실적인 점프력'을 제외하면 신체적인 잠재력이 월등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연히 본 TV 속 '작은 거인'에 감명을 받아 '불가능에 도전'하는 여정에 나선 것 뿐이죠. 세계 제일, 국위선양 등의 목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추구한다고 해도 실력의 상승에 따른 결과물로서 이해됩니다. 게다가 카라스노의 목표가 슬램덩크의 북산과 달리 "전국제패"가 아니라 "전국대회 진출"이라는 점은, 이들이 가진 "열정"이 누구나 삼을 법한 목표를 향하지 않고 자신만의 목표를 설정한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다음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츠키시마 케이가 자신의 형과의 일 때문에 갖게 된 상처를 드러내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품는 순수한 의문, "그렇게 열심히 해서 전국 제일이 된다 한들 또 그 위가 있을텐데 왜들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라는 질문에 '전국 5대 에이스'로 꼽히는 보쿠토는 "자신의 실력을 전부 발휘했을 때의 쾌감이 전부다!"라고 답합니다. 질문도 대답도 거대한 그 무엇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츠키시마나 네코마의 세터인 코즈메 켄마는 슬램덩크와 비교할 때, 변화한 지금의 일본 사회 정서를 드러내는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츳키(츠키시마)가 제기하는 질문은 슬램덩크와 하이큐를 가르는 중요한 경계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스포츠물 슬램덩크조차 단 한번도 "열심히 하는 행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럴 수밖에 없는 각자의 사정을 보여줍니다. 경제적인 것이든 그 외의 것이든 열정을 분출하는 이유는 90년대 일본이 마주한 사회 현실과 연동됩니다. 하지만 하이큐는 열심히 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의문을 통해 2010년대 일본 사회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또 다른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카게야마 토비오도 서태웅과는 다릅니다. 서태웅이 농구에 대한 열정을 묵묵하게 훈련과 실력으로 표출하는 내향적인 캐릭터였다면, 카게야마는 기본 성격은 비슷함에도 세터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끊임없이 타인과 소통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며 변화되고 그 과정 또한 여느 '사춘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귀여운 동생의 투정과 흡사합니다. '육식남'이 각광받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초식남'이 아예 표준이 되어버린 일본의 풍경을 반영합니다. 다른 캐릭터들 또한 쉽게 삐치기도, 울기도 합니다. 열정이 가득하지만 일상에 드러나는 성격이 소소하다는 점이 특징이죠. 이는 <하이큐!!> 전체가 갖는 색채입니다.


귀여운 두근두근 히나타! "우리집 개가 배고플 때 먹이를 보면 저런 표정을 지어!"




- 배구라는 스포츠의 매력 발견 : 개인 능력과 타인과의 연계


슬램덩크와 하이큐의 차이가 “운동 종목의 차이다”라고 말하면 일견 싱거워 보이지만, 하이큐가 택한 배구라는 종목의 특성은 슬램덩크와 하이큐를 전혀 다른 시대의 전혀 다른 컬러의 만화로 만들어 주는 핵심입니다.


위에서 말했듯 슬램덩크의 농구는 육체와 육체가 집접 부딪치며 힘을 겨루는 경기입니다. 코트가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상대편이 언제든 내가 확보한 공간에 침입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근대적인 관계맺기 방식으로서, 개인의 영역과 경계가 존재하지만 그것이 매우 가변적이고 때로는 강탈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이큐의 배구는 일단 상대편뿐만 아니라 우리 편과도 몸이 부딪칠 일이 없고, 각자 정해진 포지션에 따른 역할과 책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혼자서 공을 두 번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농구와는 다른 방식의 극도의 정확한 컨트롤 실력과 순간적인 재치, 순발력, 상황 판단 능력이 요구되지요.


이를 현대적인 관계맺기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간 경계가 분명하고 그에 따라 책임과 역할이 확실한 반면 어느 누가 특출나다고 해서 그것이 전체의 성취나 발전으로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개인이 최선을 다함과 동시에 타인과의 연계에도 힘써야 팀 전체의 수준이 상승하는 것이죠. 하이큐에서는 개인의 책임과 발전, 그리고 팀의 신뢰관계와 연계를 교차해서 드러내 주는데, 상대를 공략하기 위해 약한 개인을 집중적으로 노려서 개인의 정신력을 무력화하는 전략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팀이 이기기 위해서는 개인의 역할과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개인 레벨 업에 힘쓰는 동시에 서로를 이해하고 관찰하며 지원하고 보완하는 상호작용, 즉 네트워킹의 수준을 높이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는 현대의 네트워킹 매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를 반대되는 특성으로 여기지 않고 타인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서로 보완함으로서 모두 흡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격 성공! 함께 기뻐하는 동료들! 아직은 혼자 기뻐하는 츳키!


승리를 위해서는 공격이 필요한데, - 다시 말해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한데, - 이를 위해서는 선수 개개인의 능력치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는 것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하이큐는 만화적인 요소로서 타고난 조건과 잠재력이 들쭉날쭉한 히나타를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서 타인이 개인의 약점을 보완하는 연계의 중요성을 뚜렷하게 해줍니다.


세터가 월등해도 윙 스파이커나 미들 블로커의 능력치가 떨어져 다채로운 공격의 조합을 구사할 수 없다면 모든 선수의 능력치가 평균이면서 연계가 좋은 팀보다 경기력이 떨어지는 게 배구입니다. 슬램덩크의 농구처럼 서태웅이 혼자 20득점 이상을 뽑아낼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배구에서 자칫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는 히나타는 선배들과 세터의 전폭적인 신뢰와 보살핌 하에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며 카라스노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공격력의 팀으로 탈바꿈시킵니다.


개인의 능력과 연계가 잘 맞물려야 하는 (타케다 선생의 표현을 빌려 ‘톱니바퀴’) 배구의 특성상, 만화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주인공의 능력치 보정은 제한됩니다. 그러다 보니 히나타와 콤비를 이루는 포지션인 세터 카게야마의 능력치가 엄청나게 높아지는 결과를 낳는데, 이는 비단 카게야마에만 해당되지 않고 배구의 사령탑이기에 가장 높은 능력치의 선수를 필요로 하는 세터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뭐든 잘하는 천재 서태웅을 질투하면서도 그를 보고 배우며 성장하지만, 히나타는 포지션이 다르기에 단지 그렇게만 할 수는 없어 자신만의 무기를 스스로 찾기 위해 분투합니다.


개인의 성장과 팀의 수준 향상을 위한 연계는 코트 밖에서도 보여지는데, 배구부의 고문인 타케다 선생과 우카이 케이신 감독, 키요코와 야치 매니저, 심지어 라이벌이자 연습상대로 등장하는 강자들까지 주인공과 카라스노 배구부의 발전을 위해 협력과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주인공인 히나타도 수혜를 받는 쪽에 그치지 않고 잠재적인 맞수에게 조언을 건넵니다. 하이큐에서 주조연의 비중을 맡고 있는 팀과 개인은 모두 이러한 연계의 혜택을 받으며 동반 성장합니다. 적자생존, 각자도생이 진리처럼 여겨졌던 불과 십 몇년 전의 사회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그림을 연출하고 있지요.


앞서 90년대의 일본이 버블 경제의 단꿈에서 깨어 개인에게 주어진 경쟁 압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그 시대를 지나며 지쳐버린 이들이 다시 갈망하게 된 것은 타인과의 협력 (비록 개인의 생존이라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것일지라도)이었고, 하이큐는 이러한 바람을 배구를 통해 훌륭하게 구현해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 혼자서는 안 돼! 나의 승리를 위해서라도 내 편이라고 믿을 수 있는 타인과 협력해야 해!”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을 만화 전체에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이큐입니다.


개인과 타인의 연계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강함"의 하나, 후쿠로다니




- 스테레오 타입의 훌륭한 변주 : 풍성하고 입체적인 캐릭터


까다로운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제부터는 하이큐라는 작품 자체의 매력에 집중해 볼까요? 하이큐의 시작은 주인공 히나타 쇼요가 배구에 빠져들게 된 사연과 중학교 시절 홀로 분투하던 이야기, 즉 히나타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사연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합니다. 개인의 성품이나 계기를 보여주는 이야기와 그것이 현재에 발현되는 양상을 교차하는 방식은 하이큐의 전개의 핵심인데요, 히나타와 소속팀 카라스노의 사연은 만화 초반부에 집중 배치되어 팀이 뭉치고 독특한 컬러를 만드는 재료로서 기능합니다.


히나타가 ‘작은 거인’을 동경하여 배구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건 계기였을 뿐, 이후에는 ‘정상의 경치’를 보고 싶은 고유의 열망,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 등등이 배구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자칫 늘 ‘작은 거인’을 외며 그의 플레이를 닮으려 애쓰는 뻔한 캐릭터일 뻔했던 히나타는 그에게 부여된 자신만의 감정선과 욕구 때문에 작은 거인과 다른 자신만의 길을 개척합니다. 배구라는 종목의 특성 또한 이를 돕는데요, 신생 카라스노 결성 초기부터 이미 에이스가 아니라 최고의 미끼로 자리를 잡습니다.


카게야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찌감치 발군의 능력을 드러내며 선배인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지만, 겉으로 냉정해보이고 승부에 집착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 배구라는 종목의 특성 때문에 - 자신의 셋업을 거절하는 동료들로 인해 큰 상처를 받습니다. 거기에서 카게야마의 내적 갈등이 시작되고, 단지 무서운 재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동료들과 함께 풀어나갑니다. 독선적인 듯 하지만 그러한 자신이 가진 문제점을 알고 있고,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하지만 그 방법을 몰라 서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약한 모습이 카게야마를 천재 세터라는 설정 안에 가두지 않고 우리와 비슷한 인간으로 보이게 해줍니다. 이렇듯 히나타와 카게야마의 경우만 보더라도 작가인 후루다테 하루이치가 인간 내면의 다양성을 보는 눈이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하이큐만의 독특한 매력을 드러내면서 이 만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는 훌륭한 캐릭터로 꼽는 두 명이 있는데, 바로 츠키시마 케이와 코즈메 켄마입니다. 츠키시마는 배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개인의 사연 때문에 ‘삐딱이’가 되어 있고, 켄마는 타고난 성향 때문에 겉보기에 연약하고 게으른 세터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잠재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초반에 전형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졌던 캐릭터가 결국 ‘열정, 승부욕’ 등을 탑재하여 완전히 달라진 (하지만 만화 전체적으로 보면 전형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기존의 스포츠 열혈물과는 달리 하이큐의 츠키시마와 켄마는 자신의 타고난 성향을 또 하나의 독특한 강함으로 발전시킵니다.


하이큐가 만들어 낸 새로운 캐릭터 타입, 켄마


하이큐가 추구하는 이러한 지향점은 "주는 거 없이 미운 캐릭터"나 "병풍으로 숫자만 채우는 캐릭터"를 최소화합니다. 당연히 주인공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이 관계 중심이 가벼워지긴 하지만 - 이를테면 주인공 "히나타 쇼요"와 후쿠로다니의 주전 "사루"가 엮이는 스토리를 상상하는 독자는 없을 겁니다. - 그 폭이 상당히 완만하고, 관계중심은 가벼울지라도 각자의 성향과 사연을 조명하는 장치를 지루하지 않게 삽입하면서 단조로운 스테레오 타입을 3D 프린터로 정성껏 재구성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씨실과 날줄이 엮이듯 엮여 들어가 자세히 보면 작가의 디테일에 놀라고, 멀리서 보면 단순하지만 굵직한 나무 기둥같은 모양새에 놀랍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세심함 때문에 유독 여성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남성 스포츠 만화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근성과 무대포적 저돌 맹진으로 강제 레벨업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굵직한 감정선만을 제시하며 독자를 설득하는 열혈 스포츠 만화가 여전히 존재하는 게 현 시점입니다. 하지만 근성이 무엇인지, 노력이 무엇인지, 토라와 켄마가 구현하는 근성과 노력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보이며 그 속에서 협력과 연계의 단초를 찾아내는 하이큐는 단연 돋보이는 만화임에 틀림없습니다.




- 튼튼한 플롯 구성을 바탕으로 한 힘있는 전개


위에서 언급했듯, 하이큐의 기본 골격은 개인(혹은 팀)의 사연(동기)과 시간 흐름에 따른 이야기 전개의 훌륭한 안배입니다. 자칫 극적인 승리의 ‘신화적인 업적’이 되기 쉬운 스포츠물의 전개를 따르지 않고 패배와 그의 극복, 그 가운데 벌어지는 선택과 결단을 보여주며 무게중심을 잡아줌으로써 현실성을 적절하게 집어넣어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 갑니다. 작가의 이력을 알 수 있는, 살짝 괴기스러운 코믹 컷이 중간 중간 끼여들어 양념을 쳐주고, 뻔한 듯한 복선이지만 타이밍 좋게 배치해서 뻔한 진행을 기분 좋게 기다릴 수 있게 해 줍니다.


예전에 썼던 저의 글 "명작의 조건"은, 작가가 독자 반응과 그 반응의 타이밍을 예측해서 서사를 이끌어 갈 때 명작이 탄생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하이큐는 그러한 "명작의 기술"을 잘 구사하는 만화입니다. 작가는 독자가 생각하지 못하지만 작품을 위해 중요한 지점을 계속 염두하고 그것들을 캐내어 구현하는 존재입니다. 그럴 때 독자는 깜짝 놀라며 작품에 한층 더 빠져들죠. 예상했던 것들이 아름답게 그려짐과 동시에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 디테일 속에 파고드는, 블록과 맞서는 스파이크와 개인 시간차가 고루 구사되는 플레이를 하고, 다시 점수를 얻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하이큐 속 배구의 모습은 마치 작가의 노력의 과정이 그대로 녹아든 듯 합니다.




- 일본 만화의 고질적인 젠더 감수성 문제


재미있는 하이큐도 보다가 멈칫하게 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장면이 등장할 때 그렇습니다. 여성 인권이나 젠더 감수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일본이 그리 앞서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간의 소년 만화가 보여주었던 수준의 감수성을 보게 되는 게 의외의 상황은 아니지만,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하이큐>라는 만화임을 생각해 볼 때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이큐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주변적입니다. 설정이 남성 배구부라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중간 중간 여성 캐릭터의 몸매가 강조되는 컷이 들어가거나, 매니저의 역할에 대한 조명이 약한 점은 분명 아쉽습니다. 몸매를 강조하고 선수들이 그들을 감상하는 데 컷을 쓰기보다 그 자리에 매니저의 노력을 좀 더 자세하게 그려넣었다면 더 좋았겠습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매니저 야치 히토카가 합류하는 사연을 보여주고, 원래 매니저인 키요코 시미즈가 어떻게 매니저를 시작하게 됐는지 (애니메이션 4기에 들어갈 분량) 전하는 장면은 눈에 띕니다.




- 하이큐의 미래?


(* TV 애니메이션 기준으로 약간의 스포일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이큐는 현재 하루코(춘고) 대회를 진행중입니다. 물론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달려가고 있고, 히나타가 동경하는 "작은 거인"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제 작품 초반에 던졌던 떡밥들은 거의 다 회수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과연 작가가 춘고 이후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 같습니다.


춘고 이후라면 히나타와 카게야마 등 이전의 1학년이 2학년이 되고, 정들었던 3학년은 은퇴하며,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전에 붙었던 팀들과 새로운 대결구도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도 주어지죠.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1학년 신입생을 통해 설정의 많은 부분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은 작가에게 적지 않은 부담일 겁니다.


하이큐를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이전의 주요 캐릭터들이 발전하고 새로운 대결구도를 만들어갔으면 하지만, 작가의 건강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춘고를 끝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아쉽고, 하이큐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팬의 한 명으로서 복잡한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부디 어떻게 끝나든 지금처럼 멋진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눈앞을 가로막고 선 높고 높은 벽
저 너머는 어떤 광경일까?
어떻게 보일까?
꼭대기의 풍경
나 혼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보일지도 모르는 풍경
- 하이큐


TV 애니메이션 4기, 하야크 만들어 구다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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