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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r 09. 2020

자본주의는 '안개'다

<맑스 자본 강의 1, 2>, 데이비드 하비

맑스의 <자본> (김수행 역 기준 <자본론>)은 '상품'으로 시작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상적 실체를 입구로 해서 그 깊이를 파헤친 후 다시 현실로 끌어올리고 나면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의 풍경이 달라져 있다. 하비는 이를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론이라 부른다.


맑스가 자본주의를 파헤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첫째, 바로 이 변증법적 방법론이고 둘째, 그 내부의 '모순성'이며 셋째로 과정, 유동적, 동태적 등등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움직이는 자본'의 특징이다. 자본주의 탄생 이후 그것을 극복해보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실패한 이유는 내 생각에 세번째 측면을 간과하고 현상적 층위에서의 대응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시대상황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자본주의는 인공의 산물이다.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시장의 존재를 근거로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다는 거짓을 설파하지만, 맑스 뿐만 아니라 칼 폴라니와 같은 인류학 기반의 정치경제학자는 이러한 거짓에 학문적 충실함으로 맞섰다. 폴라니에 의하면 자본주의 이전의 시장은 사회 '옆에'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사회로 '스며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거짓을 전하는 이들에게서 자본주의가 시장만 있으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유의 얕음과 게으름을 발견할 수 있음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구조를 분석한 맑스의 작업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이용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이용됐다.)


상품은 가치로 '나타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가치'와 함께 서로간에 모순적, 대립적으로 관계하기도 한다. 사용가치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쓸모'라면, 교환가치는 주로 화폐와의 교환을 말한다. 맑스의 논의에서 '나타난다'는 단어가 보이면 그 때부터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위에서 상품이 가치라 '나타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상품이 가치를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형태변화 또는 덧씌워진 무언가의 현현(나타남)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상점에 가서 물건을 볼 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저것의 용도와 쓸모 (나에게 필요한 물건인지), 그리고 가격이다. 아무리 필요하다해도 가격이 '상식적'이지 않으면 우리는 구매하지 않는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모순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보는 가격은 어떻게 매겨졌을까? 자장면 한 그릇과 노트의 가격 차이는 그것의 '가치의 차이'를 말할까? 그렇다면 같은 노트 종류이지만 가격이 다른 경우는? 각자에게 다 다르게 작용할 수 있는 '사용가치'가 아닌 어떤 다른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졌고, 그 '가격'의 실체를 파악한 맑스는 '상품의 가치는 덧씌워진 것이다 / 들러붙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물신성' 개념을 꺼내들고 있다. 그 사용가치로만 파악될 수도 있는 상품에 가치가 덧씌워져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상품이 생산되어 유통을 거쳐 화폐가 되어 다시 자본가의 손 위에 놓일 때, 이 과정에서 일어난 일은 '형태변화'이다. 생산의 과정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이 투여되는데 간단히 말해서 불변자본은 생산을 담당하는 기계이고 가변자본은 임노동자의 노동력이다. 이 노동자는 노동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판매자이고, 자본가는 그 노동력을 구매하는 구매자이다. 그리고 상품의 잉여가치는 바로 이 노동자의 노동으로부터 발생한다. 상품이 원래 가치대로 생산되어 유통을 거쳐 화폐로 형태변화한다면 자본가에게 '이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력이 투여되면서 '잉여의' 가치가 발생하고, 그것이 형태변화를 거쳐 자본가의 손에 돌아와 가치를 실현하면 그 때부터 자본이 된다. 그리고 이 때 자본은 재생산의 동력이 된다.


상품이 형태변화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 하에서 덧씌워진 가치들이 거래되면서 때로는 상품으로, 때로는 화폐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으로 보기에) 최종적으로 화폐의 형태로 자본화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을 벌려는' 이유, 화폐를 많이 가진 이들을 자본가라고 불렀던 이유는 모두 화폐가 물신성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돈이 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재생산은 확대된다. 자본가와 자본가들, 다시 말해 자본가계급은 경쟁의 강제법칙에 의해 자의적 타의적으로 생산과 유통과 화폐량의 확대를 초래하고, 이는 공간적 시간적 확장 (결과적으로는 단축)을 요한다. 과거의 식민지 개척, 현재의 유통망 확대 등은 자본주의의 영역을 공간적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상품과 화폐를 전달하고 자본의 흐름을 빠르고 원활하게 만드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맑스는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만드는 데 있어서 -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던 - 신용제도, 이자 낳는 자본, 금융시장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화폐는 복리적으로 무한히 증식할 수 있게 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 차원에서 소박하게(?) 존재하던 상품의 물신성 그 위에 또 다른 물신성이 덧씌워지는 이중의 고난을 얻게 되었다. 자본가계급은 끝도 없는 축적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었으며 전세계가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주식의 변동, 펀드들의 국제적 이동, 그리고 경제 교과서에서 진리처럼 다루는 '저축 이자'까지 이 모두는 파도가 한 번 쓸고 지나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허무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맑스는 이 파도를 '공황'이라고 말한다. 공황의 원인과 그 양상은 다양하지만,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모순들이 촉발하는 것은 분명하다. 공황은 필연적이고 주기적이며 공황을 통해 자본주의는 '생존할 가능성'을 획득하지만, 그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박탈'한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 2008년 미국발 경제공황 등이 그 처절한 예시다.




이것이 내가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1, 2>를 읽으면서 얻은 것들이다. 그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을 나같은 입문자가 이렇게 짧은 분량으로 요약했으니 당연히 틀린 부분도, 왜곡된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혹시 이 글로 인해 맑스의 자본에 관심을 갖게 되었더라도 이 글이 맑스의 자본을 축약해서 설명하고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이래 봬도 내용 요약이 아니라 개인적 감상에 가깝다.


정리하면서 사실 "이렇다면 자본은 나무에 가까운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가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자본주의는 어쩌면 나무에 가깝지 않을까? 일상에 깊이 뿌리내려 우리의 에너지를 모두 앗아가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사악한 나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은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은유는 '안개'였다. 시야를 가려 실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물신성, 반 컵밖에 안되는 물과 같은 가치가 화폐로부터 신용에 이르기까지 여러 손길의 도움을 받아 엄청난 양으로 흩뿌려져 '나타나는' 현상,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신의 내적 모순을 다양한 변화를 통해 극복해가는 유동성, 그리고 그 속에 독이 들어있어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어느새 호흡을 통해 모두 들이마셔 중독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그래서 오히려 안개에서 벗어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면까지.




맑스의 자본론은 내가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반드시 끼워넣고 싶었던 마지막 퍼즐이었다.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너무 어려워 엄두조차 못 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지금의 이 세계를 바로 아는 데 있어 맑스의 자본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그런 이유로 늦게나마 벼르던 이 책, 그것도 본서가 아니라 이차 저작물로 만나게 됐다. 그럼에도 너무 어려워 몇 번이고 포기할까 생각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맑스가 던지고 있는 질문과 다루고 있는 주제의 폭이 깊고 넓다는 의미이기에,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냈다.


얼마 전 인기를 얻은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주인공 백승수는 구단의 일방적인 재정삭감 때문에 연봉협상에 어려움을 겪고 나서 이런 대사를 남겼다. "그리고 계약을 하다 보니 화가 나던데요? 터무니없이 깎은 금액에 아랫놈들끼리만 그렇게 진흙탕 싸움을 한다는 게... 그 진흙탕 싸움에서 이기니까 더 화가 나고." 우리는 세계가 뭔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건 모두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하고 함께 싸우면 좋을텐데, 그러기에는 - 안개와 같아서 - 적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고, 또 우리가 사는 세계가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배고파지는 세계라는 점이 문제다. 주린 배를 안고 안개속을 기꺼이 헤맬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러다보니 내 옆의 누군가를 밀어내고, 속이고, 혹은 무시하며 내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그저 당연한 귀결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게 있어 맑스의 자본론은 바로 그 안개의 정체를 파악하는 불빛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알고 나면 뭐가 달라지냐고? 맑스가 공산주의자니까 그거 읽어서 빨갱이되라는 소리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이전에 알던 세상을 조금만 달리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들어진 (인공의) 세계에 조그만 균열이 생긴다. 언젠가 해가 떠오를 때, 그 균열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안개가 사라지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해가 떠오를 거라는 건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불꽃이 된다면, 횃불이 된다면, 저마다 다른 색깔과 크기를 지닌 불들로 모인다면 안개를 사그러들게 만들고 진짜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갈 그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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