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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Sep 18. 2020

생각하게 하는 예술

"창작의 자유" 유감


사람들은 "생각하게 하는 예술"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갖는다. 어려운 사상이나 철학을 막 추상적이고 복잡한 기법을 사용해서 풀어내는 행위를 떠올리기 때문인 듯하다.


근데 생각하게 하는 예술은 소위 대중문화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심지어 표현이 적나라? 저급? 너저분? 하더라도, 얼마든지 생각하는 예술이 될 수 있다.


다만 그런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도구들에 충분히 익숙하고, 도구에 휘둘리지 않고 다룰 정도로 숙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스킬을 말하는 게 아니라 소재에 대한 얘기다.




적나라한 강간 씬이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고 치자. (예를 들면 김기덕 영화 류 말이다.) 이 영화가 예술이 되고 외설이 되는 기준은 뭘까? 음모 노출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영화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영화 제작자들이 그 장면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관객들도 파악할 수 있다. 뜬금없는 장면인지 분명한 개연성을 담았는지 정도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건넬 때, 그 안에 의식적으로 메시지를 집어넣지 않더라도 사람은 소통 과정에서 주장하는 바에 차등을 둔다. 추임새-별 의미없는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꼭 하고 싶은 이야기 등으로. 이 모든 걸 적절하게 배합되어 펼쳐내는 기술이 어떠냐 하는 것은 예술 작품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다.


예를 들어 누군가 "우리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말야, 그 시간에 경찰이 신고를 받고도 제대로 출동하지 않아서 난리가 났어." 라는 말을 하고는 그 뒤에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냐 하면...." 이러면서 살해 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했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는 헷갈릴 것이다. 이 사람이 경찰의 대응을 비난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살해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것이 목적인지 말이다.


예술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덕이나 윤리 관념을 부정하고,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도구로 이용해 전복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지라도, 대체 이 사람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으면 애초에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가 힘들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폭력적이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연출한 <시티 오브 갓>은 그의 영화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관객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고 갱이 멋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영화를 보고 갱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긴 했지만, 영화는 적나라하게 브라질 빈민가에서 벌어지는 청소년 갱들의 총격전을 "전시"할 뿐이다.


관객마다 평은 갈릴 것이다. 끝없이 폭력이 나열되는 것이 불편하거나, 이런 식의 접근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고, 오히려 잔혹한 현실을 깊이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건강한 비판과 논쟁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반응이다. 다만, 작품을 이 정도의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고민과 노력과 소통과 시도가 필요하다.




한 때 나는 "생각하게 하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목표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내게 가능한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유는 위에서 말한 대로다. 강렬한 소재를 가지고 "생각"을 불러일으키려면 스스로 그 소재에 충분히 익숙해져야 하고, 그걸 잘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하며, 제대로 다루고 있는지 피드백할 수 있는 집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참 어려운 것이다. "어둠을 전시하여 빛을 보게 하는 작업"은 말이다.


1년 전, 기안84의 청각장애인 비하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썼었다. 우연치 않게 오늘 과학자인 올리버 색스의 <목소리를 보았네>를 읽었다. 청각장애에 대해, 수화(어)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정말 많이 알게 됐다. 기안84는 자신의 만화에 청각장애인을 등장시키면서, 올리버 색스의 책은 아니어도 청각장애에 대한 기본 정보를 충분히 습득했을까? 적어도 만화에서는 그런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청각장애인 당사자에게 비판을 받은 것이다.


최근 다시 불거진 기안84의 여성혐오 논란에 대해 어떤 유명 만화가는 "시민 독재"라는 표현을 썼다. 그 표현은 단어는 좀 다를지 몰라도 어떤 동일한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과 지지자들이 즐겨 썼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레토릭의 연장선상에 있다. 최근에는 현 정권 지지자들도 합류한 그 레토릭. 토대의 기울기는 무시하고 현상에 대한 게으른 비난만 있는 그 레토릭 말이다.


세계에 대한 끝없는 관찰과 자기 성찰, 정보 습득은 창작자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아직 다룰 깜냥이 되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은 자신을 믿고 과감히 이야기를 펼쳐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온라인 댓글에 주절주절 끄적이는 게 아니라 "예술"이라는 도구로 자신을 표현하는 창작자이자 예술가라면, "창작의 자유"와 "독재"를 말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얼마나 건강하게 세계와 소통해왔는지를 점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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