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9
1952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러닝 메이트로 만 39세의 아주 젊은 정치인을 지명했다. 아이젠하워가 당선됨에 따라 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이 인물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외교 참모로 활약했고, 덕분에 황태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1960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에게 밀려 낙선한 그는 정계 은퇴의 고비에서 화려하게 부활해 린든 B. 존슨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휴버트 험프리와 맞대결을 펼친 1968년의 대선에서 간발의 차로 승리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바로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다.
#1.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황태자
닉슨은 30대에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두루 거친 전도유망한 정치인이었다. 공화당 소속이었던 그는 특유의 센스와 언변, 그리고 정치적인 감각을 앞세워 아이젠하워의 러닝 메이트로 1952년의 대선에 임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재임하며 그는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닉슨은 특히 외교 분야에서 참모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부엌 논쟁(Kitchen Debate)은 그의 센스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이다.
1959년, 닉슨은 미국의 부통령으로서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무역박람회에 참석했다. 박람회장을 둘러보던 닉슨은 우연히 흐루쇼프와 만나 함께 미국의 주택에 딸린 부엌을 재현한 세트장을 둘러보았다. 닉슨은 미국의 노동자들은 누구나 세트장과 같이 화려한 부엌이 딸린 주택을 살 수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흐루쇼프는 소련의 노동자들은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누구나 세트장과 같은 부엌이 있는 주택에 산다며 2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건축이 40년 남짓한 역사를 가진 소련의 건축보다 못하다고 비아냥거렸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닉슨은 이 논쟁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로 바꿔놓았다. 닉슨은 부엌뿐 아니라 컬러 TV와 과학 기술, 삶의 질까지 거론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비교했고 흐루쇼프 역시 지지 않고 고성과 삿대질까지 섞어가며 공산주의가 우월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스푸트니크 쇼크를 겪으며 과학 기술 분야에서 소련에게 우위를 빼앗겼다는 패배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미국의 기술력이 우월하다고 외치며 흐루쇼프의 성질을 긁어놓는 닉슨의 모습에 많은 미국인이 통쾌함을 느꼈다.
#2.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1969년 1월에 출범한 닉슨 행정부는 미국의 정세를 차분히 분석했다. 그 결과 국민의 대다수가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불만을 안고 있으며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행정부에 대한 지지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닉슨은 베트남 전쟁을 끝내고 국제주의를 다소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1969년 7월, 닉슨은 괌에서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취할 새로운 외교 노선을 천명했는데 이를 닉슨 독트린이라고 한다.
닉슨 독트린의 내용은 이렇다.
1.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같은 대규모의 군사적 개입을 자제할 것이다.
2.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조약에 나와있는 지원을 동맹국에 제공할 것이나, 핵무기에 의한 위협을 제외한 기타 위협까지 미국이 나서서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3.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물론 크지만, 아시아 및 태평양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그 지역에 위치한 여러 국가들이 서로 도와가며 해결해야 할 것이다.
4. 아시아의 각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원조로 통합하여 관리할 것이다.
5. 아시아의 각국이 빠른 시일 내로 독자적인 안보기구를 조직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닉슨 독트린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굉장했는데, 그동안 하드 파워 분야에서 공세를 펼쳐오던 미국이 먼저 한 수 접자 소련 역시 진영 대결에서 한 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고 이것이 긴장 완화, 즉 데탕트(Détente)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닉슨 쇼크(Nixon Shock)
1971년, 미국의 경제는 휘청이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가 휘청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브레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을 이해해야 한다. 2차 대전의 종전 직전이었던 1944년에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 우즈에 미국을 비롯한 세계 44개국의 대표들이 모여 전후 세계 경제를 복원할 방식과 그것을 주도할 국가를 정하는 회의를 진행했다. 이를 브레튼 우즈 회의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제시한 새로운 국제 통화인 방코르(Bancor)를 도입하는 방안과 미국의 경제학자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제시한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지정하는 방안이 대립한 끝에 화이트의 방안이 채택되면서 미국의 달러가 세계의 공용 화폐가 되었다. 이때 미국은 달러를 금의 가치와 연동하는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금 1온스당 35달러라는 고정 환율이 등장했고 미국은 금을 보유한 만큼 달러를 찍어낼 수 있었다. 세계는 미국이 찍어낸 달러를 사용하게 되었고 필요하다면 달러를 미국이 보유한 금과 바꿀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린든 B. 존슨 행정부 시절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대규모 복지 정책으로 인한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금 보유량을 무시한 채 달러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미국의 신용이 흔들렸다. 미국이 금 보유량을 초과해 달러를 찍어내는 것이 사실일 경우 달러는 더 이상 안전자산이 아니라 언제 가치가 폭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자산이 되고 이는 국제 금융 시장의 공멸을 불러올 수 있었다.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은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무책임하게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에 분노했고 자신들이 가진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것을 요구했다.
닉슨은 경제 관료들을 소집해 비밀리에 회의를 진행했다. 이후 그들이 공개한 회의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닉슨 행정부는 금태환 정지, 즉 앞으로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관세를 올렸고 미국 내의 경제적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물가와 임금을 동결하고 달러의 가치를 금 1온스당 38달러로 맞추는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전 세계적으로 성장이 둔화했고 고정 환율과 태환, 금본위제의 개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브레튼 우즈 체제는 한순간에 붕괴되고 그 자리를 변동 환율와 불환(不換)이 대체하게 되었다.
닉슨 행정부의 갑작스러운 금태환 정지 선언을 오늘날 닉슨 쇼크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가 이렇게 충격적인 선언을 내놓은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닉슨 쇼크가 있을 당시 세계의 경제는 호황이었으나 유독 미국의 경제만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에 빠진 것이다. 트리핀 딜레마에 따르면 세계의 경제가 호황일수록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국가의 경제가 불황으로 치닫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축통화국이 불황이라는 뜻은 기축통화국으로 들어오는 기축통화가 나가는 것보다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세계 경제로 들어가는 기축통화를 늘려 흑자, 즉 호황을 가져다 준다. 닉슨 행정부는 이 트리핀 딜레마를 해소하는 해결책으로 금태환 정지를 꺼내든 것이다.
#4. 중국과의 핑퐁 외교(Ping-Pong Diplomacy)
닉슨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유명한 외교관이자 학자인 헨리 키신저를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했다. 닉슨은 키신저에게 특명을 내렸는데, 바로 중국과 소통할 방법을 강구하라는 것이었다. 닉슨은 강경한 반공주의자였고, 상원의원을 지낼 당시 조지프 매카시의 편에 서서 정치권에 불어닥친 매카시즘(McCartyism)에 동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닉슨 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중국은 소련과 국경을 놓고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태도에 실망했고 소련을 견제하고 또 위협하기 위한 길을 모색했다. 그때 마침 미국이 접근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뜻이 서로 맞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71년 4월, 중국의 탁구 국가대표 선수단은 일본 나고야에서 개최된 세계탁구선수권의 폐막에 즈음해서 미국의 국가대표 선수단에게 중국으로 초청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미국은 이를 곧바로 수락했고 중국의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가 선수단을 맞이했다. 이때 미국의 선수단도 중국의 선수단에게 미국으로 초청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닉슨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이 중국을 직접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나 회담을 나눌 의사가 있다는 메시지를 주 파키스탄 미국 대사관을 통해 전달하게 했다.
닉슨의 성공적인 방중(訪中)을 위한 물밑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키신저는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은 저우언라이를 키신저의 회담 상대로 내세웠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사이의 회담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키신저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는 목적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며 대만에 주둔한 미군을 일부 철수시킬 용의가 있으며 중국이 UN에 가입하는 것에 찬성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저우언라이 역시 닉슨이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까지 서방의 정치인은 한 명도 맞아들이지 않겠다는 말로 미중 관계가 회복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모든 물밑작업이 마무리된 1971년 7월, 닉슨은 방송을 통해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사이에 회담이 있었으며 자신이 중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초청을 받았음을 밝혔다. 미국 정치권은 물론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키신저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대만은 강력히 반발했다. 미국과 대만은 2차 대전 시기부터 우호 관계를 다져온 동맹이었기에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은 곧 배신과 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닉슨은 중국을 방문하는 것과 관련해 대만 정부와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닉슨 행정부가 대만을 완전히 소외시키고 중국에 저자세로 다가간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한편 1971년 10월 중국이 UN에 가입하자 대만은 UN을 탈퇴했다.
#5. 닉슨-마오쩌둥 회담과 상하이 공동성명
1972년 2월, 닉슨은 중국을 방문했다.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난 닉슨은 역사적인 미중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정상회담의 결과물로 상하이 공동성명을 채택했는데, 이 성명에서 닉슨은 중국이 제시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또 단계적으로 대만에 주둔한 미군을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과 국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하는 데 동의했다. 한편 마오쩌둥은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는 데 동참하라고 요구한 것을 수용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미국에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소련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며 중국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미국과 협력할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소련의 우방국인 중국이 소련을 견제하게 한 것은 분명한 성과이나, 이를 위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용인하고 대만을 차별한 것 등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6. 베트남에서의 평화협정, 그러나 욤키푸르 전쟁에의 개입
닉슨은 여론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인물이었기에 취임 초기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민 사회의 켜켜이 쌓인 불만을 인지하고 있었다. 닉슨 독트린도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떼기 위한 초석을 놓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닉슨이 바로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킨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나 그 역시 반공주의자였고 전쟁은 불만도 많이 만들어내지만 지지 또한 많이 만들어내기에 함부로 미군을 철수시킬 수는 없었다. 베트남군에 패하고 도망치는 것로 비쳐질 수 있었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전선에서 미군을 아주 조금씩 철수시키면서 늘 고수해오던 전략 폭격 작전을 계속 진행하고 전장을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넓히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별다른 전술적 및 전략적 목표 없이 늘 하던대로 공습을 감행하고, 전장을 넓히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미군의 철수는 닉슨이 재선에 성공한 1972년 겨울부터 본격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3년 1월, 프랑스의 파리에서 미국과 북베트남, 남베트남의 대표들이 만나 평화협정에 조인했다. 평화협정에 따라 남베트남은 물론이고 북베트남 또한 그 주권과 독립성을 인정받았으며 미군은 완전히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군은 동년 3월 전부 철수하였다. 한편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한 공로로 키신저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된 당시 남베트남 정부는 협정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당시 남베트남의 지도자였던 응우옌반티에우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고 북베트남의 멸망과 베트남의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그러나 결국 미국의 압박에 못 이겨 평화협정에 서명했는데, 이때 키신저는 남베트남 정부에 만약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을 어기고 남베트남을 상대로 군사 행동에 나설 경우 미국이 개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을 어기고 다시 남베트남을 침공했을 때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경제적 및 군사적 지원을 거의 끊어버렸다. 결국 1975년 남베트남 정부가 북베트남군에 항복하면서 베트남은 공산화라는 결말을 맞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닉슨 행정부는 다른 전쟁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4차 중동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욤키푸르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1973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침공했다. 이스라엘은 매우 신속하게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편에 서서 아랍 국가들과 맞서 싸웠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후 이스라엘과 미국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동맹이 되었다.
그러나 중동 지역에서 벌어진 갈등에 섣부르게 개입한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불안정한 중동의 정세에 개입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인 이익은 닉슨 독트린을 충실히 지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작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로 말미암아 중동의 산유국들이 반미(反美) 연대를 조직해 원유를 볼모로 국제사회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오일쇼크(Oil Shock)라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일쇼크는 수많은 세계적인 규모의 경제위기를 초래했다. 욤키푸르 전쟁에 개입한 것은 닉슨이 범한 실수 중 하나이다.
#7. 정리하며
닉슨이 남긴 족적은 상당하다. 젊은 시절부터 정치를 한 만큼 노련했고 또 감각이 뛰어났기에 여론을 구워삶을 줄 알았다. 금태환 정지 선언을 통해 브레튼 우즈 체제의 종식을 알린 것부터 핑퐁 외교와 방중, 베트남 전쟁에서의 완전한 철수까지 닉슨이 아니었더라면 해낼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스타성 또한 갖추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모든 역사적 순간에 얼굴을 비추며 화제를 몰고 다녔다. 정치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닉슨은 1972년 대선 당시 재선을 위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가 소재한 워터게이트 빌딩에 공작단을 투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 했던 것이 들통난,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타격을 입고 1974년 8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오늘날 닉슨의 이름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자진사퇴한, 하야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탄핵이 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진바 있기에, 사퇴하지 않았더라면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되어 물러난 대통령으로 타이틀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닉슨이 물러나자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포드는 닉슨을 사면했고, 덕분에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롯해 본인이 저질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범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았다. 미국 내에서 인기가 상당해 헌법을 위반하고 3선에 도전해도 닉슨이라면 괜찮다는 말까지 있었던 만큼 워터게이트 사건과 같은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성실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면 어떤 인물로 역사에 남았을지 궁금해진다. 그만큼 닉슨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보여준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