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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폭탄과 유도탄들 Jul 06. 2023

존슨 행정부의 외교정책

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8

#1. Mission: 케네디의 빈자리를 채워라

케네디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자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이 곧바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존슨은 케네디 행정부의 부통령 출신답게 케네디의 정책과 이념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뉴 프론티어 정신에 따라 과학 기술 분야에 꾸준히 지원을 제공했고 경제성장을 위해 재정을 확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특히 존슨은 케네디와 달리 텍사스 지역을 기반으로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내고 민주당의 상원 원내대표까지 역임했던, 의회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정치인이었기에 케네디가 어려움을 겪었던 의회와의 협치도 잘 이끌어냈다. 그는 자신만의 슬로건으로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를 내세웠다. 막대한 예산을 미국 시민의 복지에 투입했고, 만연한 인종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흑인의 인권을 위한 법률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의회의 지지도 적절히 이끌어내면서 존슨 행정부는 적어도 내치에 있어서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미군을 파병하지 않고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케네디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존슨 행정부 역시 평화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걸고 직접적인 개입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존슨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이고 북베트남의 인적 및 물적 교류를 자연스럽게 차단하기 위해 남베트남 지역을 중심으로 안전구역을 설정하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고 자신이 직접 남베트남에 방문해 전선을 시찰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응오딘지엠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주도했던 즈엉반민이 북베트남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유화책을 펼치자 존슨 행정부는 즈엉반민마저 축출하기 위해 응우옌카인이 벌이는 쿠데타를 지원하기도 했다. 미국의 바람과 달리 남베트남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사회의 피로도는 커지고 있었다. 존슨 행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 갇혀 신음해야 했다.


1964년 8월 2일,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북베트남의 동쪽에 위치한 해역인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어뢰정과 미 해군의 구축함이 교전을 벌인 것이다. 이를 통킹만 사건이라고 한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8월 4일, 북베트남으로부터 8월 2일에 한 차례, 그리고 4일에 한 차례, 총 두 차례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미국 사회는 분노했다. 존슨은 곧바로 피어스 애로우 작전(Operation Pierce Arrow)을 승인했다. 공군을 동원해 북베트남의 주요 지역에 폭격을 가하는 전략 폭격 작전이었다. 8월 7일에는 하원에서 통킹만 결의(Gulf of Tonkin Resolution)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북베트남의 미국에 대한 도발을 규탄하고 존슨에게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전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통킹만 사건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미국이 첫 번째 공격이라고 발표한 8월 2일의 공격은 분명히 있었다. 북베트남의 선제공격으로 교전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북베트남은 미군의 구축함을 남베트남의 것으로 오인해 발생한 사고였다고 주장했으며 상부의 판단이 아닌 현장 지휘관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벌어진 일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미국이 두 번째 공격이라고 발표한 8월 4일의 공격은 없었다. 실체가 의심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없었다. NSC가 없었던 공격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발표한 것이다. NSC가 정말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은 1965년부터 피어스 애로우 작전을 발전시킨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을 전개했다.


#3. 정리하며

1년 남짓한 케네디의 잔여 임기를 수행한 존슨은 1964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공화당의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를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케네디 행정부의 유산을 물려받은 덕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고, 통킹만 사건을 통해 북베트남을 공공의 적으로 돌려 이슈를 선점하고 지지층을 결집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선 당시 존슨은 케네디와 자신이 핵전쟁을 피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음을 강조하며 골드워터가 세계를 핵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실제로 골드워터는 이 공격에 치명상을 입고 선거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을 전쟁의 수렁에 몰아넣어 오늘날까지 아물지 않는 전쟁의 상처를 남긴 장본인은 골드워터가 아니라 존슨이었다. 존슨은 퇴임할 때까지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식의 발언을 곧잘 해왔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태도를 바꿔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은 존슨 행정부를 넘어 미국의 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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