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11
1976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로널드 레이건과의 경선 끝에 승리한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를 후보로 내세웠다. 민주당은 의외의 인물을 내세웠는데 조지아 주 주지사 출신의 정치인 지미 카터였다. 그는 중앙 정계에서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도덕과 인권의 중요성을 내세운 카터는 본인의 똑똑함과 성실함, 그리고 조지아 주 주지사 시절에 보여준 온화한 모습을 무기로 삼아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카터의 승리였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카터는 키프로스 전쟁과 베트남의 공산화를 거치며 무너져 내린 미국의 리더십을 회복하고 끝이 안 보이는 불황 속에서 탈출할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1. 도덕적인 미국: 파나마 운하 지대의 반환
카터는 대선에서 파나마 운하 지대에 주둔한 미군의 철수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시간을 거슬러 1903년 11월, 미국 정부는 파나마 정부와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이 파나마에 1천만 달러를 제공하고 운하 지대를 영구적으로 임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파나마의 운하 지대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 지역에 운하를 건설해 선박이 넓은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가지 않고도 태평양과 대서양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려 했다. 실제로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개통해 많은 이윤을 챙겼고, 1950년대에 들어서는 냉전을 핑계로 군사기지까지 설치했다. 게다가 미국은 파나마 운하에서 파나마의 국기를 게양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는데, 말만 임대였을 뿐 파나마를 사실상 식민지로 취급했다. 그러자 파나마에서 미국으로부터 운하를 돌려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미국과 파나마 사이의 충돌이 빈번해졌고 미국은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77년 9월, 카터 행정부는 미군의 철수와 더불어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운하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모두 파나마에 반환한다는 내용까지 담은 조약을 파나마 정부와 체결했다. 의회 역시 체결에 동의했고 1979년 10월까지 미군의 철수와 운하 지대의 일부 반환이 모두 이루어졌다. 카터는 파나마 운하 지대를 반환할 때 파나마 운하도 포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국 내의 반발이 너무 컸던 탓에 추진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카터는 대선 때부터 도덕과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신이 이끄는 행정부가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행정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아 미국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고 있었던 파나마 운하 지대와 관련한 문제를 집권 초기에 외교적으로 해결해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어 많은 호응을 얻었다. 한편 파나마 운하는 1979년 이후로도 계속 미국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 그러던 1999년 12월, 미국은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이 체결된 지 거의 백 년 만에 협정을 통해 파나마에 운하를 완전히 반환했다.
#2. 데탕트(Détente)의 계승, 그런데 이제 도발을 곁들인
카터는 도덕과 인권을 강조한 만큼 평화 또한 중시했다. 그는 닉슨 행정부 시기부터 이어진 데탕트의 계승을 천명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진영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로 말미암아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고 서로 연락사무소(대표부)만 두고 있었던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하고 당시 중국의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의 방미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가 공산주의 진영을 상대로 유화책만 펼쳤던 것은 아니다. 특히 공산주의 진영의 리더였던 소련을 압박하는 데 힘을 쏟았다. 카터 행정부는 국무장관이었던 사이러스 밴스를 통해 소련에게 서로 보유한 핵무기의 수량을 공개하고 이를 25% 가량 감축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제1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SALT, 1969-1972)의 결과로 마련된 SALT I 협정의 후속 조치로 SALT II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닉슨 행정부부터 포드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협상에서는 주로 탄도미사일의 수와 이를 배치한 기지의 위치를 조정하는 것이 다루어졌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는 핵무기까지 의제로 다루려 했다.
그러나 미국은 모든 절차의 막바지에 이르러 조약의 비준을 거부한다.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인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폭정을 반복하자 아프가니스탄 내의 공산주의자들은 반감을 품어 반군을 결성했고, 1978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공산주의 정권은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부족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에 반발한 부족들이 서로 연대해 무자헤딘(Mujahideen)이라는 반군을 결성했다. 공산주의 정권과 무자헤딘이 본격적으로 내전을 벌이자 소련이 관심을 보였다. 소련은 비밀리에 병력을 지원해 공산주의 정권을 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에게 이 사실이 발각되어 소련은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는다. 카터 행정부는 앞서 언급했듯 SALT II의 최종적인 비준을 거부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1979년 6월에 합의된 이 협정의 유효기간은 1985년까지였으나 끝내 발효되지 않으면서 폐기되었다. 카터 행정부는 스스로 정책을 파기하면서까지 소련과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카터 행정부는 SALT II의 파기에 그치지 않고 사이클론 작전(Operation Cyclone)과 카터 독트린까지 제시하며 소련을 압박했다. 사이클론 작전은 미국의 CIA, 영국의 MI6 등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의 정보기관이 주축이 되어 무자헤딘에 무기를 공급하기 위한 비밀 프로젝트였다. 이 덕분에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의 정부군과 소련군에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전쟁을 길게 끌고 갈 수 있었다. 카터 독트린은 1980년 1월에 카터가 제시한 방침으로 페르시아만, 즉 중동 지역에서 무력으로 현상의 변화를 꾀하는 세력이 있을 경우 미국이 평화를 수호할 목적으로 군사적인 개입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카터는 대선 후보 시절 중동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한바 있는데, 카터 독트린은 약속을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자 소련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사이클론 작전과 카터 독트린의 영향으로 소련은 무자헤딘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따내지 못했고 1989년에 평화협정을 맺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소련의 실패는 공산주의 진영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3. 캠프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갈등의 온상이었다. 1948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학살의 피해자가 되어 나라 없는 설움에 울분만 삼키던 유대인들이 중동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세웠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과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나라가 있었던 것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건국을 정당화했고 주변의 아랍 국가들과 평화협정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아랍 국가들은 반발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미 아랍인들의 터전으로 있은지 오래였다. 팔레스타인의 주민들도 아랍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하루아침에 이스라엘의 국민이 되었고 유대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소수자로 전락했다. 이집트 등은 협상 불가, 평화 불가, 승인 불가라는 3불(不) 원칙을 내세워 이스라엘을 축출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할 것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중동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카터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중동 지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1978년 9월, 카터는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캠프데이비드 지역에 이집트의 안와르 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를 초청했다. 이곳에서 거의 2주에 걸친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캠프데이비드 협정이다. 사다트는 욤키푸르 전쟁을 일으키는 등 이스라엘의 축출에 앞장선 강경파였으나 자유주의 진영에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고 이스라엘을 배제하는 아랍 국가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자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개선해 외교적인 고립에서 탈출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카터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중재하겠다고 나섰고 사다트가 이에 화답한 것이었다. 이 협정을 통해 이집트는 이스라엘로부터 시나이 반도를 받았고,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승인을 받음과 동시에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통행할 권리를 얻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체결로 인해 이집트는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사다트는 자유주의 진영과의 연대와 더불어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하라 이남의 극빈국들에게 원조를 제공하는 등 제3의 길을 모색해 외교적인 활로를 뚫으려 애썼다. 그러자 아랍 국가들도 점차 태도를 바꿔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도모했다. 베긴은 중동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과 같이 이스라엘을 배격하는 집단은 여전히 존재했고, 반(反)이스라엘 연대에서 아랍 국가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자 이들 강경파는 중동에서 또 다른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등이 대표적이다. 카터 행정부는 새로운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사다트 역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이후 정적들의 위협에 시달리다 1981년에 암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 뒤를 이어 부통령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으로 집권해 30년 동안 독재를 이어갔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많은 부침을 겪었다.
#4.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 비민주적인 국가와의 대결
카터 행정부는 인권 또한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다. 조지아 주 주지사 시절 조지아 주에서의 흑백 차별을 철폐하고 흑인에게 백인과 동등한 노동의 권리, 교육의 권리 등을 보장했던 카터답게 미국의 안팎으로 인권에 대한 인식을 고양하고 비민주적인 국가에 철퇴를 내리는 데 집중했다. 카터의 인권 외교는 한국의 정치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카터의 집권기에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독재를 펼치고 있었다. 1961년부터 이어진 독재와 이로 인한 인권의 탄압이라는 그림자는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개발과 이로 말미암은 고도의 경제성장이라는 빛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했다. 카터 행정부 이전의 미국 행정부들은 박정희의 독재를 묵인했다. 그러나 카터는 박정희의 독재는 물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것까지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카터는 박정희 정권이 인권 문제의 개선에 나서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이라며 한국을 압박했다.
미국과 한국의 대립은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이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미국의 정치인들이 한국에 친화적인 관점을 가지도록 불법적인 로비를 제공했다는 폭로,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가 터지면서 악화일로를 걸었다. 미국의 의회는 특별 조사를 위한 위원회(프레이저 위원회)까지 꾸리며 한국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박동선과의 관계를 부정했으나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다가 경질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던 김형욱이 프레이저 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박정희와 박동선의 관계, 나아가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에 대해 상세히 증언하면서 상황은 한국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뉴욕 타임즈에서 카터 행정부가 청와대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 박정희 정권을 감시했다고 폭로하며 전개가 꼬였다. 한국은 박동선에 대한 미국의 송환 요청에 응했고, 미국은 박동선을 기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서로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고받았다. 이후 한미 양국이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코리아 게이트는 일단락되었으나 한미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다.
박정희는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는 협박과 코리아 게이트를 겪으며 분노했다.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대거 파견하며 미국을 위한 희생을 감수했는데 돌아온 것이 자신에 대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1972년부터 암암리에 논의하던 독자적인 핵개발에 속도를 붙일 것을 지시했다. 당시 한국은 원자폭탄을 연구하는 데 성과를 보여 방사능 물질의 개발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고 곧이어 12월 12일의 쿠데타를 통해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핵개발은 무산된다. 전두환의 명령에 따라 핵개발과 관련한 모든 자료가 압수 또는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박정희의 암살과 전두환의 쿠데타, 그리고 핵개발의 무산을 둘러싸고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핵개발에 속도를 붙인다는 정보를 접수한 카터 행정부에서 CIA를 동원해 김재규를 매수하고 박정희의 암살을 지시했고, 작전이 성공하자 전두환에게 쿠데타를 승인하는 조건으로 핵개발의 중단을 종용했다는 식이다.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 당시 카터 행정부가 전두환 정권을 대하는 태도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카터 행정부는 전두환의 쿠데타가 있고 나서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전두환의 지시로 대규모의 학살이 자행되었음에도 카터 행정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카터 행정부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에서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을 선택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도 이를 용인했다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묵인한 것은 맞기에 카터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물론 당시 카터 행정부의 신경이 대선에 쏠려 있었다는 점과 후술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과 이에 대한 대응의 실패로 카터의 리더십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웠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카터 행정부가 스스로 도덕성과 인권을 중시하는 행정부라는 이미지를 걷어찬 것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날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5. 카터 행정부에 내려진 사망선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Iran Hostage Crisis)
이란의 팔라비 왕조는 친미 성향의 정책들을 펼치며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을 방패로 삼아 심각한 인권 탄압 또한 자행했다. 이란 내부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는 1978년에 반정부 시위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격렬한 시위에 국왕이었던 팔라비 2세가 해외로 망명했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자 이슬람 시아파의 지도자였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이란으로 귀국했고, 1979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청산하고 이슬람교의 종교 지도자가 최고의 권력을 가지는 신정국가, 오늘날의 이란을 탄생시켰다. 호메이니는 팔라비 왕조에서 추진했던 친서방 정책을 폐기하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국가의 이념으로 내세워 강경책을 펼쳤다. 카터 행정부는 이란의 변화를 인식하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유화책을 펼쳤고 호메이니 또한 미국과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대화에 적당히 응해 나갔다.
그러나 이란의 국민들은 팔라비 왕조의 폭정 너머에 미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고 반미 감정을 계속 키워 나갔다. 이 와중에 카터 행정부가 팔라비 2세가 항암치료 목적으로 미국에 입국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반미 감정이 폭발했다. 팔라비 2세는 이란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호메이니는 팔라비 2세의 입국을 허용한 미국을 규탄하며 당장 그를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 팔라비 2세가 실제로 암투병 중이라는 점을 근거로 치료 목적의 입국이 분명하다고 보아 송환을 거부했다. 그러자 결국 일이 터졌다. 1979년 11월, 팔라비 2세의 송환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이란의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에 난입해 외교관 70여 명을 인질로 삼고 농성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호메이니도 미국과 대화를 단절하고 팔라비 2세의 송환과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과 이란은 석유 및 금융과 관련한 제재를 서로 주고받았다. 협상은커녕 대화도 없는 강대강의 대치가 계속되었다. 1980년 4월, 변하지 않는 이란의 태도에 분노한 카터 행정부는 이란과 단교하고 미국 내의 이란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카터 행정부는 곧바로 무력을 동원해 이란에서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독수리 발톱 작전(Operation Eagle Claw)을 기획해 실행에 옮겼다. 1977년에 조직된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 델타 포스(Delta Force)가 맞이한 첫 실전이었다. 카터 행정부는 델타 포스의 주도로 구출 작전을 기획할 것을 지시했으나 정보기관과 군부가 지시를 어기고 깊숙이 개입했다. 결국 특수부대를 동원한 기습적인 침투 작전이 육군을 비롯해 해군과 공군까지 참여하는 대형 작전으로 변질되었다. 실속없이 비대하기만 한 작전이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피그만 침공을 통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작전이 개시되자 델타 포스의 대원들은 그동안의 훈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철두철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초 착륙 지점에 무사히 안착한 대원들은 기름을 가득 실은 탱크트럭을 적으로 착각해 공격하는 바람에 큰 폭발이 일어난 돌발상황에도 비교적 침착하게 작전지로 자신들을 이송할 헬리콥터를 기다렸다. 그러나 헬리콥터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 한참을 더 기다리자 헬리콥터 여섯 대가 나타났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기름이 부족한 기체와 사막의 모래폭풍을 만나 타격을 입어 정상적인 비행이 불가능한 기체가 있었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헬리콥터는 최소 여섯 대였는데, 애초에 도착한 헬리콥터가 여섯 대였던 데다가 그마저도 상태가 불량해 작전은 허무하게 취소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기름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던 헬리콥터의 조종사가 모래바람으로 시야가 흐려져 바로 앞에 날던 헬리콥터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들이받아 추락해 여덟 명이 그 자리에서 폭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대원들은 헬리콥터를 버리고 처음에 타고 온 수송기에 모두 타서 급하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현장에 도착한 이란군은 불에 탄 미군의 시체들과 버려진 헬리콥터를 발견하고 이를 수거해 미국이 이란의 영토에서 군사 작전을 전개하다가 실패한 사실을 전 세계에 공개했다. 카터 행정부는 이란에 탱크트럭의 폭발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시신을 인도받는 망신까지 당했다. 미국 내에서 카터 행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대선이 몇 개월 남지 않은 시점에 최악의 실패를 받아든 카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편 이란은 카터 행정부를 향한 전 세계적인 비난이 커지는 것을 보고 카터가 대통령의 자리에 있는 한 인질은 석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호메이니는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바꿔 미국과의 대화에 임하면서도 인질을 석방하지 않았고, 카터가 대선에서 패배하자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 카터의 후임인 로널드 레이건의 임기가 시작하는 날에 인질들을 석방했다.
#6. 정리하며
카터는 무명이었지만 돌풍을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과 도덕성과 인권을 강조하며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의미있는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색다른 정치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파나마 운하 지대의 반환과 미군의 철수,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이끌어내고 뚝심 있게 인권 외교를 견지하며 기대를 현실로 바꿔주는 듯했다. 그러나 임기 말에 이르러 인권 외교가 망가지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제 살을 깎아 먹었다. 포드 행정부 시기부터 이어진 오일 쇼크로 인한 불황도 전혀 타개하지 못했다. 결국 카터는 내치와 외교 모두 실패한 대통령으로 낙인 찍혀 1980년의 대선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선거인단 수 489대 49로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카터 행정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별명은 아마도 용두사미(龍頭蛇尾) 행정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