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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폭탄과 유도탄들 Jul 14. 2023

레이건 행정부의 외교정책

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12

카터 행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연일 실책을 범하며 위기에 빠지자 공화당은 1980년의 대선이 정권을 탈환할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다. 카터에 맞설 대항마로 등장한 인물은 영화배우 출신의 중견 정치인,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은 1937년에 배우로 데뷔해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조연급 배우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연기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배우조합장을 역임하며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는 배우들을 솎아내 연방수사국(FBI)에 고발하고 할리우드(Holly Wood)의 관계자들이 가진 정치 성향에 대해 의회에서 직접 증언하기도 했다. 레이건은 대선에서 보수층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전략을 펼쳤고, 선거 기간 내내 카터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며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 전화위복: 암살 미수 사건

1981년 1월 취임한 레이건은 두 달 만에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다. 자신을 겨냥한 총격 사건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3월 30일, 레이건은 힐튼 호텔에서 노동단체연합의 대표들과 식사와 간담회를 가지고 다시 백악관으로 이동하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간단한 행사였고 힐튼 호텔의 입구에서부터 대통령이 탑승할 차량까지의 거리는 10m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파에 대한 경계 외에 다른 경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 군중 사이에 존 힝클리 주니어가 섞여 있었고, 그는 레이건의 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레이건을 비롯한 일행을 쏘았다. 첫 번째 총알이 백악관 대변인이었던 제임스 브래디를 맞추자 경호원들은 빠르게 반응해 레이건을 방탄 차량에 강제로 밀어넣는 한편 힝클리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순식간에 여섯 발을 모두 발사한 터라 레이건이 총에 맞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레이건의 총상을 확인한 경호원들은 급히 그를 대학병원으로 이송했고, 응급 수술이 이루어졌다. 당시 힝클리가 사용한 총알은 잘못 건드리면 체내에서 2차 폭발을 일으키는 특수한 것이었기에 자칫하면 레이건은 물론 의료진까지 희생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브래디를 포함해 총에 맞은 일행도 수술 끝에 총상 후유증으로 인한 장애를 안았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힝클리는 당시 인기를 끌던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열렬한 팬으로 스토킹 범죄까지 자행하던 범죄자였다. 그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레이건의 암살을 도모했다고 밝혔다. 어처구니 없는 이유에 미국 사회의 분노는 높아졌는데, 이 와중에 레이건이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주변인을 끊임없이 안심시키고 의료진에게도 농담을 건네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레이건에 대한 지지율이 치솟았다. 전화위복이 된 셈으로, 덕분에 레이건 행정부는 집권 초기에 탄탄한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었다.


#2. 악의 제국(Evil Empire), 소련

레이건은 강경한 보수주의자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이 계속해서 공산주의 진영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등 팽창적인 정책을 펼친다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이른바 소련 제국주의라고 하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의 광범위한 확대를 경계한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는 과거 냉전이 치열하던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이 진영 간의 대결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방안으로 악의 제국 프레임전략 방위 구상(SDI)을 제시했다. 1983년 3월, 레이건은 전국 복음주의 교회 연합의 총회에 참석해 연설에서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칭했다. 그는 연설에서 평화와 화해를 외치며 소련의 팽창을 지켜보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틀렸으며 조금의 영토도 내어주지 않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소련과의 대결에서 점차 밀리고 있다고 지적하며 우위를 되찾기 위해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악의 제국 연설로부터 보름 정도가 지나 TV 연설을 통해 SDI를 발표했다. 악의 제국인 소련이 가지고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체계의 도입을 알린 것이다.

1. 조기경보위성이 적의 미사일을 상시 감시한다.
2. 적이 미사일을 발사한 경우 추적위성이 궤도를 추적한다.
3. 적의 미사일이 미국을 향할 경우 지상에서 요격용 레이저 빔을 인공위성의 방향으로 쏘아 올린다.
4. 인공위성의 반사판을 활용해 레이저 빔을 미사일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격추 1단계)
5. 격추 1단계가 실패한 경우 요격위성이 직접 레이저 빔을 쏘아 미사일을 격추한다. (격추 2단계)
6. 격추 2단계가 실패한 경우 지상의 요격용 무기를 동원해 미사일을 격추한다. (격추 3단계)
7. 격추 1~3단계를 통해 적의 미사일을 모조리 파괴한 후 여유롭게 보복한다.


기존의 미사일 방어 체계가 적의 미사일이 사정권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상의 요격용 무기로 격추하는 3단계 방식을 구현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레이건 행정부의 SDI는 요격의 단계를 세분화놓치는 미사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레이건은 곧바로 SDI를 위해 배치할 레이저 무기와 위성들을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레이저나 인공위성을 활용해 미사일을 격추한다는 내용이 허황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당시 제시된 개념들은 오늘날 레일건(railgun)이나 코일건(coilgun)과 같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MD)의 핵심 기술이 태동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 시기에 구현이 불가능했던 것은 사실인지라 NASA의 우주 개발 사업과 연계해 수백 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하나도 개발하지 못했다. 따라서 레이건 행정부 이후 미국은 SDI를 폐기하고 다른 방어 체계를 기획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SDI는 실패한 전략이다. 그러나 당시 SDI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진영에게 심리적인 압박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구상이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공상과학(SF)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를 너무나 자신있게 내놓자 소련은 미국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적어도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특히 SDI의 실현이 핵전쟁이라는 아주 강력한 무기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했다. 소련은 미국과 더불어 인류를 3차 대전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위력을 지닌 핵무기를 다량으로 보유한 국가였다. 그동안 자유주의 진영과 대립하며 핵전쟁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어 미국을 한 발 물러서게 한 경험도 많았다. 덕분에 소련은 미국과의 대결에서 완전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비슷한 위치에서 경쟁할 수 있었다. 그러나 SDI가 실현되어 미국이 정말 소련이 가진 모든 미사일과 핵무기를 파괴할 수 있게 된다면 소련은 더 이상 핵전쟁을 가지고 자유주의 진영을 협박할 수 없게 되고 미국에 압도적인 우위를 내어주게 된다. 이는 소련의 패배를 넘어 공산주의 진영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했다.


당황한 소련은 폴류스(Polyus)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미국의 SDI가 위성을 활용한 감시와 공격을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은 유사시 미국의 위성들을 모조리 격파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려 했다. 따라서 폴류스 프로그램을 통해 레이저 무기와 핵무기를 장착한 거대한 위성을 우주에 띄우려 했다. 이 위성은 미국이 위성을 추가로 배치하기 위해 쏘아 올리는 우주선을 격추하는 기능까지 갖출 예정이었다. 그러나 SDI와 마찬가지로 이 기술은 구현이 불가능했다.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소련도 나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가며 폴류스 프로그램의 성공을 위해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1987년에 계획을 폐기했다. 한편 SDI와 폴류스 프로그램은 흥미롭게도 인류의 우주 개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과 소련은 계획을 추진하며 우주 개발과 관련한 기술의 비약적인 성장을 맛보았다. 발전된 기술은 냉전이 끝나고 미국과 러시아가 우주 개발을 위해 손을 잡자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했다. 덕분에 인류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게 빠른 속도로 우주를 개척할 수 있었다.


#3. 레드 컴플렉스(Red Complex)를 자극하라

레이건 행정부에서 핵무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군비를 확장하려 하자 의회는 반발했다. 미국의 경제가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에서 군비를 확장할 경우 반대급부로 경제에 투입하는 예산이 줄어 불황이 더 길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SDI와 같은 정책은 규모가 너무 컸고, 투입 대비 산출이 의미가 있을지 담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사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그레나다 침공이 연달아 일어났다. 1983년 9월, 미국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해 알래스카의 앵커리지 국제공항을 경유하고 한국의 김포국제공항으로 비행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군에 의해 격추되어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269명이 전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대한항공 007편을 여객기로 위장한 미군의 정찰기로 오인한 소련군의 과실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한국 국적의 여객기는 소련의 영공을 통과할 수 없었다. 한국과 소련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고, 공산주의 진영에 속한 국가의 영공에 자유주의 진영에 속한 국가의 국적기가 침범하는 것은 그 자체로 도발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항공 007편 역시 돌아가더라도 소련을 우회해 김포공항으로 향해야 했다. 그런데 대한항공 007편은 모종의 이유로 소련의 영공을 침범했다. 당시 새벽 시간대였기 때문에 어두운 상황에서 소련군의 전투기는 대한항공 007편이 민항기인지, 군용기인지 식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군의 전투기 조종사는 먼저 경고사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대한항공 007편은 반응이 없었다. 이후 전투기 조종사는 꼬리 편에 있는 민항기 표식을 인식했고 민항기가 확실한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한항공 007편이 비행 고도를 높였다. 동시에 속도가 줄어 전투기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때 전투기 조종사는 대한항공 007편이 민항기로 위장한 미군의 정찰기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전투기 조종사는 대한항공 007편이 경고사격을 인지하고 고도를 높이고 속도를 줄여 자신의 뒤로 붙어 2차 공격을 피하고 동시에 공격권을 확보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항공 007편의 기동이 실제 전투기의 공중전에서 사용하는 기동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항공 007편은 함께 비행하던 대한항공 015편과의 교신에서 고도를 높이기로 하고 그대로 비행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전투기 조종사는 그대로 요격용 미사일을 발사했고, 대한항공 007편의 후면에 적중하며 여객기가 추락했다. 소련군은 정찰기의 기종을 확인하고 전사한 미군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대한항공 007편이 추락한 현장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이 격추한 것이 군용기가 아닌 민항기임을 알아차렸다. 


소련은 민항기를 격추한 사실이 없다고 발뺌했으나 이내 미국과 일본에서 소련군의 주요 시설을 감청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까지 당시 전투기 조종사와 소련군의 교신 내용과 사후 대처와 관련한 논의가 담긴 음성 파일을 공개해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또한 미국 국무부는 곧바로 소련의 전투기 조종사가 대한항공 007편이 민항기임을 명백히 인지하고도 미사일을 발사했으며, 소련군의 대한항공 007편에 대한 사전 경고 또한 전혀 없었으므로 참사는 분명히 소련 측의 의도된 민간인 학살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발표함으로써 정치적인 이득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레이건은 소련을 규탄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의회를 향해 유럽에 신무기를 배치하고 미국의 군비를 확장하는 자신의 정책에 동조할 것을 독촉했다. 미국 내의 여론도 레이건을 지지하는 쪽으로 형성되자 의회는 레이건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한편 1983년 10월에는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하는 일이 있었다. 긴급 분노 작전(Operation Urgent Fury)으로 명명된 이 침공은 1983년 3월부터 그 조짐이 보였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던 그레나다는 1974년에 비로소 독립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독재로 부침을 겪었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규모를 키워 쿠데타를 통해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모리스 비숍의 지휘 아래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고 소련, 쿠바 등과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레나다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나라였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미국과 가까웠다. 미국의 입장에서 그레나다는 제2의 쿠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지역이었다. 레이건은 일찍이 그레나다를 쿠바와 같이 미국을 견제하는 기지로 삼으려는 소련의 시도를 비판한바 있었다.


1983년 10월, 그레나다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비숍이 축출되어 정부의 주요 관료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쿠데타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정권이 세워지자 미국과 그레나다 주변의 카리브해 국가들은 당황했다. 미국은 급히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를 중심으로 하는 태스크포스를 꾸려 그레나다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것이 긴급 분노 작전으로, 레이건의 승인을 얻어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등 그레나다의 인접국들이 함께 참전하는 조건으로 미군은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선전포고 없는 침공에 UN의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의 군사적인 행동이 국제법을 위반한 것일 수 있으며 그레나다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든 외국의 군대가 섬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을 채택하고자 했다. 그러자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해당 결의안은 총회에서 다시 논의되었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국과 카리브해 국가들은 결의안을 무시했고 침공을 멈추지 않았다.


침공 초반에는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미군이 자멸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군의 기지를 적군의 것으로 오인해 폭격한다든가, 항공기에서 지상으로 낙하하던 병사가 지형을 착각해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미군은 압도적인 물량과 화력을 바탕으로 수도 적고 무기도 변변치 않던 그레나다와 쿠바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침공은 며칠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레나다의 공산주의 정권은 무너졌으며 쿠바와 소련은 철수했다. 1984년에 그레나다에는 선거를 통해 선출한 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었고 영연방(Common Wealth)에도 복귀해 영국의 국왕을 국가원수로 삼는 입헌군주국으로 돌아갔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 미군을 적재적소에 파병할 수 있어야 하며 위험을 해소할 수 있는 수준의 전투력을 지녀야 한다고 선전했다. 이 선전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와 시너지를 발휘했고 군비의 확장에 대한 의회와 여론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영향을 주었다.


#4.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는 레이건, 그리고 소련의 변화

1984년의 대선을 앞두고 레이건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를 증명하듯 공화당에서 레이건과 경선을 치르기 위해 등판하는 신예 후보는 한 명도 없었다. 레이건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어 박수를 받는 동안 민주당은 골머리를 앓았다. 대항마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카터 행정부 시기 부통령을 지냈던 월터 먼데일을 후보로 내보냈다. 먼데일은 레이건과 반대로 핵무기의 감축냉전의 완화 등을 공약으로 제시하며 진보 지지층을 공략하는 전략을 펼쳤다. 열세가 점쳐지는 와중에도 먼데일은 최선을 다했으나 개표 결과 선거인단 수 525대 13이라는, 역사상 최대의 격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레이건은 내친김에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상원과 하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모두 승리해주기를 바랐으나, 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화당은 상원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했으나 하원에서 민주당에 패배하고 말았다.


대선 직후 한국의 판문점에서 한국군과 미군, 북한의 인민군 간에 교전이 벌어지는 등 레이건이 행정부 1기 시절에 줄기차게 내세운 공산주의 진영의 끊임없는 위협은 여전한 듯했다. 그런데 소련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5년 3월에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체제를 완전히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로 점철된 구식 공산주의에서 탈피해 자유주의 진영에서 제시하는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비교적 온건한 진보 이념을 새롭게 채택해 공산주의 진영의 체질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는 글라스노스트(개방)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제시했다. 언론에 대한 검열과 개인과 단체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사상 검증, 그리고 다른 이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박해에서 벗어나 표현과 사상, 종교의 자유를 개방하고, 공산주의 경제 시스템의 실패를 인정하고 점진적으로 자유주의 시장 경제 시스템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치와 경제 전반을 개혁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공산주의 진영의 국가들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할 근거로 쓰였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하며 군축에 돌입했다. 여러 개혁이 소련에서 시행되자 레이건 행정부는 관심을 기울였다. 만약 소련이 개혁에 성공한다면, 레이건 행정부는 정책의 방향성을 수정해야 했다. 그들은 소련을 계속해서 견제하면서도 물밑으로 소통을 강화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소련을 견제하는 것은 레드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전략으로 지지율을 올리는 데 효과가 있었고, 소련과 소통하는 것은 군축과 평화에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 미국은 레이건 행정부에서 내놓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덕분에 오랜 불황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경제 정책을 힘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군축을 현실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러나 소련의 개혁은 순조롭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안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대중의 지지를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했다. 정치와 경제의 체질 개선이 미비한 상황에서 그동안 검열되어 공개되지 않던 정보들이 대량으로 공개되자 소련의 인민들은 분노했다. 소련의 경제 상황이 듣던 것에 비해 심각했고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를 자처하던 공산당의 간부들이 축적한 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상품의 양적, 질적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급하게 시장의 자유화를 꾀하자 경제가 산산조각이 났다. 한편 소련을 등에 업고 대중의 불만을 찍어누르던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폐기로 인해 기댈 곳이 사라졌다. 지도자들은 부랴부랴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성난 민심을 달랠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동유럽에서는 연쇄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다수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만다.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진영의 혼란이 계속되자 레이건 행정부는 공산주의 진영을 저돌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1986년, 레이건은 레이건 독트린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진행해오던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 정책에서 내용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으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반정부 시위자유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정치권의 행동직접적으로 지원한다는 점과 소련의 군축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군비의 확장을 멈출 생각이 없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해 공산주의 진영의 붕괴를 부추겼다. 소련의 변화를 더욱 빠르게 이끌어내려는 의도였다. 이는 1987년 말 미국과 소련이 중단거리 핵미사일을 전량 폐기하기로 약속한 내용이 담긴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의 체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레이건은 공산주의 진영을 압박하면서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냉전의 종식을 향해 한발짝 더 다가가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5.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정책의 핵심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다. 복지 예산을 축소하고 규제를 완화해 시장에서 기업과 같은 행위자들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고 국가는 자유로운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나아가 해외 시장의 개방을 유도하고 점진적으로 국가 간의 무역장벽이 허물어진 자유무역 체제로의 전환을 도모한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를 착실히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미국은 1970년대 초부터 이어진 장기적인 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갈 길이 멀었다. 특히 외국과의 경쟁에서 미국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미국의 달러는 외국의 통화와 비교했을 때 가치가 높았고, 이로 말미암아 미국의 상품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레이건 행정부는 일본에 주목했다. 미국은 대일 무역의 적자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었고, 반면 일본의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미국의 위기감은 날로 커져만 갔다.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엔화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높여 미국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만 했다. 1985년 9월, 뉴욕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에서 미국을 비롯해 일본, 영국, 프랑스와 서독의 재무장관이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다섯 명의 재무장관은 인위적으로 달러의 가치를 낮추는 데 합의했다. 이것이 플라자 합의이다. 당시 G5의 재무장관들은 플라자 합의를 수용하지 않을 시 닉슨 쇼크와 같은 사태가 재발할 것을 우려했고, 손해를 보더라도 미국을 달래는 것에 집중했다. 한편 일본은 플라자 합의 이후에도 계속해서 반도체 협정과 같은 미국의 공격을 받았다. 이는 일본 경제의 거품이 붕괴하는 데 영향을 주었고, 결국 일본은 수십 년의 불황에 빠져들게 되었다.


#6. 레이건 행정부의 최대 위기, 이란-콘트라 사건(Iran-Contra Affair)

니카라과에는 소모사 가문이 대통령직을 세습해가며 독재를 펼치는 독특한 정권이 자리잡고 있었다. 소모사 가문은 친미주의 정책을 철저히 펼친 덕분에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9년에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을 주축으로 소모사 가문에 대항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정권은 붕괴하고 FSLN이 중심이 된 새로운 정부가 꾸려졌다. FSLN은 공산주의 성향의 단체였다. 미국은 한동안 니카라과의 FSLN 정권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나,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펼치던 레이건 행정부는 달랐다. 그레나다의 사례를 보며 니카라과도 언제든 쿠바와 소련의 기지가 되어 미국을 위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CIA는 비밀리에 소모사 정권의 인물들이 모여 만든 반군 콘트라(CONTRA)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콘트라에 대한 지원은 레이건 독트린과도 잘 맞아 떨어졌다. 공산주의 정권의 전복을 위해 활동하는 자유주의 진영의 단체를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 레이건 독트린의 핵심적인 내용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회가 반발했다. 의회는 미국 정부가 공식적인 지원금을 해외의 반군에게 전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이로 인해 레이건 행정부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콘트라를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CIA는 미국의 최대 적성국 중 하나인 이란에 무기를 팔아 번 돈으로 콘트라를 지원했다. CIA는 미군으로부터 무기를 값싸게 사들여 시세보다 몇 배나 비싸게 이란에 팔았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콘트라에 전달하고, 콘트라로부터 코카인을 대가로 받아 이를 암암리에 미국 사회에 유통했다. 마약을 판매해서 번 돈은 CIA의 비자금이 되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 말도 안 되는 일은 1986년에 이르러 모조리 들통났다. 의회는 경악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히피(hippie) 문화를 청산하기 위해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마약의 유통과 소비를 엄격하게 단속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이 범죄조직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뒤에서는 행정부가 앞장서서 마약을 유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건은 법으로 금지한 해외 반군에 대한 지원, 비자금 조성마약 밀수의 혐의로 탄핵 직전까지 몰렸다. 탄핵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레이건의 리더십은 땅에 떨어졌다. 게다가 CIA가 마약을 미국뿐 아니라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도 유통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중남미가 마약의 온상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레이건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7. 정리하며

레이건 행정부는 빛과 그림자가 매우 뚜렷하게 공존하는 행정부이다. 강력한 반공 정책을 바탕으로 공산주의 진영을 압박하는 데 성공해 냉전의 종식을 앞당겼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도 이로 인해 해외에 불필요하게 많이 개입하면서 외국의 주권과 인권을 해쳤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특히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인해 레이건 행정부의 적극적인 해외 개입 정책에 대한 평가는 주로 부정적이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와 함께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며 10년 이상 불황에 허덕이던 미국의 경제를 다시 살려놓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외면해 사회 보장 제도를 후퇴시키고 양극화를 촉진해 미국의 어마어마한 빈부격차를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오늘날 미국의 빈부격차는 선진국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는데, 이것이 레이건 행정부 시기의 무리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결과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레이건은 특유의 매력과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한 스타였으며 지지층을 모으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이 덕분에 임기 내내 의회와 마찰을 빚으면서도 인기와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추진하려 했던 대부분의 정책을 집행했으며 여유롭게 재선에 성공해 닉슨 이후 오랜만에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행정부 2기의 임기 말에 이르러 보여준 행동은 실망스럽다. 지지율을 관리하는 데 급급해 반대 세력을 찍어누르기에 바빴고, 이란-콘트라 사건의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염려해 모르쇠로 일관하며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각에서는 레이건을 정치연예인이라고 하는, 스타성과 인기로 무장해 이를 바탕으로 높은 지지율을 뽑아내지만 정책 면에서는 실속이 없는 정치인의 시초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 평가는 다소 가혹한 면이 있지만 그만큼 그의 실책이 주는 임팩트가 강렬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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