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13
이란-콘트라 사건의 여파로 레이건 행정부와 공화당에 대한 민심은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조지 H. W. 부시와 명망 있는 상원의원 밥 돌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선의 초반에는 부시가 돌에게 밀렸으나 이내 상대 후보의 약점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으로 선거 전략을 바꿔 전세를 뒤집고 승리했다. 민주당은 공화당이 흔들리는 틈을 타 정권을 되찾기 위해 옥석을 고르고 또 골랐다. 정치 명문가인 고어 가문 출신의 앨 고어와 40대 중반에 상원에서 3선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조 바이든, 매사추세츠 주의 주지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마이클 두카키스까지 인재가 넘쳐났다. 승자는 두카키스였다. 양당의 대통령 후보가 선출된 이후 실시한 첫 여론조사에서 두카키스는 부시를 20%p에 달하는 격차로 따돌렸다. 두카키스의 당선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부시는 경선 때와 마찬가지로 네거티브 공세와 감성을 어필하는 작전을 들고 나왔고,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는 정공법으로 선거에 임했던 두카키스와의 승부에서 역전승을 거뒀다. 그렇게 조지 H. W. 부시 행정부가 출범했다.
#1.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의 연쇄적인 붕괴
부시가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혁명이 들불처럼 번졌다. 소련이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동유럽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덕분에 반공 세력이 수월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소련의 급진적인 개혁 및 개방 정책이 실패하며 동유럽의 공산주의 진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자 기존에 공산주의를 지지하던 이들마저 등을 돌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권은 레흐 바웬사가 결성한 노동조합 솔리다르노시치(연대)를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 앞에 굴복했고 헝가리의 공산주의 정권은 오히려 공산주의와 이별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던 베를린 장벽은 자유와 통일을 갈망하는 동독과 서독의 시민들에 의해 무너져 내렸으며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공산주의를 가장 강경하게 보호했던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권도 붕괴했다.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아시아의 몽골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졌다. 냉전의 종식과 자유주의 진영의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는 새 시대를 위한 리더십을 세워야만 했다.
#2. 몰타 회담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연쇄적으로 붕괴한 영향으로 공산주의 진영의 총체적인 붕괴가 기정사실화하자 미국과 소련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은 냉전 이후의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갈 리더로 도약하기 위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던 소련을 뒤로 하고 세계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미국의 외교계는 1989년을 전후로 펼쳐질 소련과의 대화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사회를 선도할 리더를 정하기 위해 1944년과 1945년에 걸쳐 벌어졌던 일련의 회담들보다 중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자 서유럽의 자유주의 국가들이 중재에 나섰다. 영국의 총리 마거릿 대처와 프랑스의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은 부시를 설득했다.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에 임해 냉전에 관한 미국의 입장과 미국의 향후 계획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부시는 과거 미국의 대통령이 소련의 지도자와 가졌던 회담의 성과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고르바초프와 만나지 않으려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의회의 계속되는 설득에 마음을 바꿨다.
1989년 12월, 부시와 고르바초프는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에서 회동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특별한 조약을 체결하고자 회담을 마련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회담장의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만찬이 있었고 부시와 고르바초프 사이에 가벼운 덕담이 오고 갔다. 그러나 두 정상의 회동이 가지는 의미까지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 소련은 군축을 약속했고, 평화를 위해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뜻을 모았다. 부시는 고르바초프에게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불간섭을 재차 선언해줄 것을 요구했고 고르바초프는 이를 수용했다. 반대급부로 고르바초프는 부시에게 소련의 글라스노스(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해줄 것을 요구했고 부시가 이를 수용했다. 두 정상은 공동선언을 통해 냉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천명했다. 몰타 회담과 이로부터 나온 몰타 선언은 부시 행정부에게 특히 큰 의미가 있다. 덕분에 부시 행정부가 미국이라는 단일한 패권국이 주도하는 평화가 유지되는 시기,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걸프 전쟁(Gulf War), 팍스 아메리카나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다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가 기습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30만 명에 육박하는 이라크군이 빠른 속도로 쿠웨이트를 집어삼켰다. 쿠웨이트의 왕실은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쿠웨이트군을 진두지휘하며 전세를 뒤집으려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침공으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후세인은 침공 작전이 성공했으며 쿠웨이트를 합병해 이라크의 주(州)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쿠웨이트인들이 반발하자 폭력을 동원해 진압하기도 했다. 이라크의 침공이 워낙 기습적이었고 또 명분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은 당황했다. 미국은 이라크의 침략행위를 규탄했다. UN은 이라크 정부에 쿠웨이트 합병을 철회하고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결의안을 채택했다. 동시에 경제적인 제재도 가했으나 후세인 정권은 저항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넘어 중동 지역 전체를 노리고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이라크의 접경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을 급파, 유사시를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하며 치욕스럽게 물러난 데 더해 몇 차례의 군사작전에서 실패를 맛보며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공산주의 진영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군비를 확장한 덕분에 군사력이 많이 향상되었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있기도 했으나 실전에서의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현장의 관계자들은 위력을 체감하지 못했다. 미군은 이라크와 전면전을 펼칠 경우 질 수 있다는 둥, 전사자가 최소 3만 명에 달할 것이기에 시신을 담을 가방을 수만 개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는 둥 앓는 소리를 해댔다. 그런데 미국이 스스로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 이라크에 대한 공포 때문에 미국은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작전을 준비했다.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의 참전을 유도해 다국적군을 구성하는 한편 이라크와 비슷한 장비와 전술을 운용하던 시리아의 참전까지 유도해 이라크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려 했다. 나아가 압도적인 공군력을 바탕으로 이라크가 자랑하는 촘촘한 방공망을 무력화해 지상전에서 있을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부시 행정부는 후세인 정권에 쿠웨이트에서 군을 철수하고 합병을 취소하라는 최후통첩을 제시했다. 후세인이 끝내 거부하자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1991년 1월 17일을 기점으로 대규모 공습 작전, 이른바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을 전개했다. 39일 동안 이어진 작전으로 이라크의 방공망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미군은 이라크의 방공망을 무너뜨려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핵심 시설을 정밀하게 타격했다. 이라크군은 방공망의 지휘부가 파괴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대공포까지 동원해 다국적군의 폭격기를 공격했으나 소용 없었다. 이라크군의 전투기 또한 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대부분 파괴되었다. 후세인 정권은 다국적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쿠웨이트의 유전에 불을 지르는 등 전쟁을 확대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미국이 빠르게 개입해 보복하거나 중재함으로써 막아냈다.
1991년 2월 24일, 다국적군은 사막의 폭풍 작전을 마무리하고 지상군 병력을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투입했다. 강력한 공습으로 초토화된 이라크군의 잔당을 처리하는 일은 너무나 간단했다. 다국적군은 아주 손쉽게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고 이라크 본토까지 말 그대로 깨끗하게 청소했다. 이라크군의 전차는 양차 대전 당시에 주로 쓰인 노후한 장비였던 탓에 다국적군, 특히 미군의 신형 전차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다국적군은 이라크군과 전투를 벌일 때마다 전차를 수백 대씩 격파했다. 다국적군은 지상군을 투입하고 100시간도 지나지 않아 쿠웨이트를 완전히 수복할 수 있었다. 부시는 기자회견을 통해 전쟁이 끝났으며 다국적군이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이라크의 무역을 통제할 권한과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할 권한을 얻었다. 심지어 후세인 정권이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보를 보일 경우 중동 지역의 평화를 지킨다는 명목 아래 이라크를 자유롭게 공습할 수 있었다. 걸프 전쟁은 미국이 초강대국(Super Power)의 지위를 명실공히 확보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4. 마침내 소련이 무너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소련의 공산당은 소련을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여러 위성국의 정치적인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자 개혁과 개방에 반대하며 고르바초프를 끌어내릴 기회만 엿보던 공산당의 강경파는 고르바초프에게 연방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정치적인 요구에 대해서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당시 소련은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와 당내의 집단 지도 체제가 유지되던 공산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고르바초프에게 강경파의 목소리를 무시할 권리는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강경파의 요구대로 위성국에 병력을 파견해 무력으로 무리한 요구를 찍어 눌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무력으로 반발을 억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개혁파는 강경파에 맞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고르바초프와 그의 오른팔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제시한 것이 주권국가연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연방 체제였다. 위성국에 폭넓은 자치권을 주어 보다 느슨한 국가연합 체제를 만들어 소련을 다른 형태로라도 유지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1991년 8월, 공산당 내 급진적인 개혁을 반대하는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요구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비록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소련 공산당의 내분을 똑똑히 지켜본 위성국 정부들은 하나둘 독립을 선언했다. 쿠데타의 피해자였던 고르바초프 역시 공산당의 핵심 관계자라는 이유로 가지고 있던 권력을 거의 모두 빼앗겼다. 이 과정에서 옐친과 그의 지지자들이 득세했고, 그들은 소련 내에서 공산당의 활동을 모두 정지시키고 소련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의 출범을 선언했다. 70여 년 만에 소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환호했다. 걸프 전쟁에서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 직후에 소련마저 붕괴하자 미국을 향한 세계의 경외심은 날로 커져만 갔고, 팍스 아메리카나를 활짝 열어젖힌 부시에 대한 미국 대중의 지지는 높아만 갔다. 1992년 대선에서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5. 재선에 실패하다
악의 축 취급을 받던 소련이 사라지자 부시 행정부는 본격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단극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던 한반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부시는 임기 말 방한해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와 회담을 가지며 남북한 정상이 함께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발표할 수 있도록 중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노력은 빛을 발해 실제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한편 한미연합훈련을 취소하며 북한을 배려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는데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병용한 대북 외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스캔들 한 번에 부시는 치명상을 입고 만다. 걸프 전쟁의 참전 군인이었던 해군 항공대의 파일럿들이 집단 성폭행을 저질렀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해 해군의 장성들이 잇달아 불법적인 로비를 저질렀다. 이를 당시 해군 장성들의 친목 모임이었던 테일후크(TailHook)의 이름을 따 테일후크 스캔들이라고 부른다. 부시 행정부가 걸프 전쟁으로 단숨에 흥했다는 점과 부시가 해군 항공대의 파일럿 출신이라는 점이 악재로 작용했다.
테일후크 스캔들에 대한 지지부진한 대응이 이어지던 중에 1992년 대선이 치러졌다. 재선에 도전한 부시의 대항마로 민주당은 아칸소 주 주지사를 지낸 빌 클린턴을 내세웠다. 클린턴은 40대의 젊은 나이와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는, 스타성이 충만한 인물이었지만 정치 경력이 길지 않고 병역기피 의혹이 있는 등 결함이 있었다. 임기 말 스캔들에 시달리고 있는 부시였으나 클린턴 정도는 꺾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수가 등장했다. 무소속 후보로 보수 성향의 사업가 출신 정치인 로스 페로가 출마한 것이다. 그는 총기 규제에 반대하거나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등 보수 논리를 펼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부시에게 향해야 할 보수의 표심이 페로에게 분산되어 부시는 대선에서 고작 37.4%를 득표해 168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반면 클린턴은 이른바 페로 효과 덕분에 43%를 득표, 37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렇게 부시는 재선에 실패했다.
#6. 정리하며
재선에 실패한 아버지 부시에 대한 대중의 기억은 그리 뚜렷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부자(父子) 대통령에서 아버지(父)를 맡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공산주의 진영이 갑작스럽게 붕괴한 상황에서 미국이 세계 질서의 헤게모니를 단단히 움켜쥘 수 있도록 만든 공로가 있다. 공산주의가 휘청이는 때에 자유주의 진영마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면 미국의 리더십에 수많은 물음표가 따라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는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에는 확실히 보여주고, 부드러워야 할 때에는 한없이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며 세계 질서를 자연스럽게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로 만들어 나갔다. 부시 이후의 여러 대통령들이 단극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빈틈을 보여 오늘날 신냉전의 구도가 자리잡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부시의 노력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임기 말의 스캔들로 인해 재선에 실패하고 아들 부시의 실책으로 인해 덩달아 이미지가 안 좋아진 그이지만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