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14
1992년 대선에서 조지 H.W. 부시를 제치고 새롭게 미국의 대통령이 된 인물은 빌 클린턴이었다. 그는 1946년생으로 양차 대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최초의 전후 세대 대통령이었다. 미국의 명문대인 예일대학교의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아칸소 주의 검찰총장을 지낸 것을 시작으로 1978년, 아칸소 주 주지사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30대 초반의 아주 이른 나이에 주지사가 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의 상처를 딛고 성공을 거머쥔 '개천용' 그 자체였다. 그는 무려 세 번(1982년, 1986년, 1990년)이나 더 아칸소 주 주지사에 당선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아칸소 주가 작은 주이기는 하나 그는 젊었고 민주당이 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펼쳐진 민주당의 후보 경선에서 무난하게 승리한 그는 경험 부족과 병역기피 의혹, 마약 복용 의혹 등을 구실로 많은 공격을 받았으나 무소속 후보 로스 페로의 등장으로 보수의 표심이 분열된 틈을 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했다.
#1. 확산(Enlargement)과 개입(Engagement)
클린턴 행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는 확산과 개입이었다. 미국이 중시하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가치를 전 세계로 확산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동맹국에 동맹의 강화를 요청하고 비동맹국에 변화와 협조를 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비동맹국의 변화와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적극적인 개입도 불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 군비를 증강하고 독재 정권을 견제하며 외국 시장을 개방시켜 미국의 경제를 살리겠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가치관이 녹아있는 기조였다. 클린턴 행정부가 관심을 기울인 지역은 아시아였다. 1995년 2월, 국방부는 동아시아전략보고서(EASR)를 발표하여 동아시아를 겨냥한 확산 정책과 개입 정책을 수립했다. 향후 미국 중심의 질서를 위협할 잠재력이 있는 국가로 중국과 일본을 지목하고 이들의 성장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클린턴 행정부는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등 아시아 지역에 주둔한 미군의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다자안보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군림하고 있는 만큼 강대강으로 대치하는 것은 불필요한 희생이 따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가지는 패권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을 미국 중심의 질서에 억지로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자발적으로 미국이 설계한 규범을 존중하고 따르도록 만들고 싶었다. 이를 포괄적 개입 방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의 대(對) 중국 외교는 다소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였다. 1994년 5월, 코스타리카로 향하던 리덩후이는 급유를 위해 전용기가 잠시 하와이의 호놀룰루 공항에 착륙하자 미국 정부에 숙소를 제공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그러자 클린턴 행정부는 리덩후이에게 전용기 밖으로 나오지 말 것을 요구했다. 대만의 지도자가 미국에서 숙박하면 중국 정부가 반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의 상원은 정부의 결정을 규탄하고 대만 총통의 방미를 허용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클린턴은 고민 끝에 1995년 5월, 리덩후이가 대만의 총통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방미해 모교인 코넬대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자 중국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겉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외치면서 대만의 총통을 미국 땅에 들인 클린턴 행정부에 분노한 중국 정부는 1996년 3월, 대만해협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훈련을 진행했다. 그러자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의 행동이 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고 양안 관계를 훼손한다고 규탄하며 항공모함을 대만해협으로 파견했다. 중국의 군사도발을 저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클린턴 행정부의 결정은 포괄적 개입이라는 기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선택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적극적으로 대북 봉쇄 정책을 펼쳤다. 핵개발 중단과 국제기구의 핵실험 시설 사찰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석유 제재 등 다양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인도적 지원의 길마저 끊어버리며 북한을 압박했다. 그러나 북한이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핵개발 중단을 약속하자 제재를 해제하고 봉쇄 대신 적극적인 개입으로 기조를 바꾸는 모습도 보였다.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상호 유해 송환 사업도 진행하는 등 다양한 혜택과 지원을 제공했다. 동시에 북한이 정말 핵실험 시설과 핵발전 시설의 가동을 중단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국제기구를 통한 사찰도 반복적으로 시도했다.
이렇게 개입의 횟수와 규모를 점차 늘려가던 클린턴 행정부는 이윽고 확산과 개입이라는 기조를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적어도 두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동시승리전략(Win-Win Strategy)을 통해 군비를 확장하려 했다. 클린턴은 동시승리전략을 수립하지 않을 경우 세계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때 미국이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한반도와 중동이 화약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기에 동시다발적인 전쟁의 가능성이 결코 낮지 않다고 내다보았다.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에서 동시승리전략은 단극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핵심적인 과제였다.
#2. 재선, 그리고 동아시아 정책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은 재선에 도전했다. 공화당은 조지 H.W. 부시와 당내에서 경쟁한 경험이 있던 밥 돌을 후보로 내세웠다. 한편 1992년 대선에서 파란을 불러일으켰던 로스 페로가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내밀었으며 작가와 사회운동가로서 나름 인지도가 있던 랄프 네이더가 새롭게 등장했다. 클린턴은 자유무역과 시장 활성화를 내세운 자신의 경제 정책이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고령의 돌과 군소후보인 페로, 네이더를 견제했다. 그 결과 군소후보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미미해 클린턴이 49.2%를 득표, 37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데 성공해 40.7%를 득표해 15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데 그친 돌을 제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페로와 네이더는 둘이 합쳐 9.1%라는, 명성에 비해 다소 초라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클린턴 행정부 2기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97년 미일방위협력지침을 채택해 이를 미일공동안보체제의 신(新) 가이드라인으로 삼았다. 구(舊) 가이드라인은 1978년에 합의된 것으로 일본의 주변 국가에서 군사적 충돌이 있을 때 일본이 일종의 병참기지가 되어 미군을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신 가이드라인에서는 일본의 주변 국가에서 군사적 충돌이 있을 때 일본이 병참기지가 되는 것뿐 아니라 자위대가 주일미군의 작전에 동참하고 보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기존의 일본 국내에서 국외로 확장하는 조치로 자위대가 직간접적으로 일본 영토 밖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였다. 평화헌법(일본국 헌법)에 따라 방어 작전만 수행할 수 있었던 자위대의 위상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일본을 안보 파트너로 끌어들여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동아시아 지역의 분쟁 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했다.
한편 대(對) 중국 외교는 1기 때와 마찬가지로 일관성이 떨어졌다. 중국의 위상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유화적인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중국의 역린인 인권 문제나 양안 관계를 건드려 반발을 샀다. 특히 인권 문제와 경제 제재를 결부해 중국 정부를 압박하는 정책을 펼쳤다. 물론 클린턴 행정부가 미국이 중시하는 가치를 확산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고, 인권 역시 미국이 중시하는 가치 중 하나라는 점에서 인권 문제가 있는 중국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인권 문제를 규탄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면 대(對) 중국 외교에 있어서도 확고한 메시지를 던져 중심을 잡았어야 한다는 지적이 뒤따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편 클린턴 행정부는 한국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한국은 인접 국가들과 힘의 불균형이 뚜렷하기 때문에 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했고, 미국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이용해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지자 소통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IMF를 동원해 한국의 경제에 가혹한 처방을 내리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은 한미동맹, 미일동맹과 같은 전통적인 동맹을 강화하며 궁극적으로 한미일 다자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미국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통해 아시아 역내에서 군사적인 영향력을 강화한 것은 물론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를 통해 아시아 역내에서 경제적인 영향력도 강화해 나갔다. 1994년에 인도네시아의 보고르에서 열린 제2차 APEC 정상회담에서 클린턴은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선진국은 2010년까지, 개발도상국은 2020년까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자유무역시장에 모두 참여한다는 다짐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 미국은 중국의 적이라는 인식을 톡톡히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으며 오늘날 미중 패권 경쟁이 나타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결국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의 실책으로 말말미암아 중국의 급속한 성장을 저지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쳤고, 오늘날 중국이 G2로 발돋움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3.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과 러시아
예로부터 발칸 반도는 화약고로 불렸다. 인종, 민족, 종교가 전부 다른 이들이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살며 계속해서 크고 작은 충돌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이 지역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수립되었으나 1941년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아 붕괴되었고 당시 국왕이었던 페타르 2세는 그리스를 통해 도주해 영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나치의 손에 국토가 유린되는 상황에서 도주한 왕가에 대한 유고슬라비아 국민의 감정은 좋지 못했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빨치산)은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이라는 임시정부를 수립해 왕정의 폐지를 선언했다. 종전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완전히 폐지한 티토는 자신을 최고지도자로 하는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을 수립했다. 1963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소련과 거리를 두는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했다. 티토는 198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발칸 반도에서 화약고라는 이미지를 상당히 지워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티토라는 구심점이 사라지자 유고슬라비아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만 유지한 채 구성국의 수장이 돌아가며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개헌이 이루어졌음에도 분열은 계속되었고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를 통일해야 한다는 대(大)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의 지도자가 되면서 이에 반발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이 연쇄적으로 독립을 선언해 내전(유고슬라비아 전쟁)까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이른바 신(新) 유고 연방을 수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어찌저찌 봉합되는 듯이 보였으나 이는 착각이었다. 코소보에서 화약고가 폭발하고 말았다. 원래 코소보는 세르비아가 실효 지배하던 지역이었으나 1974년, 티토에 의해 자치주로 지정되어 세르비아와 분리된 상태였다. 슬라브 민족인 세르비아계와 비슬라브 민족인 알바니아계가 함께 살아가는 코소보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그러나 밀로셰비치는 코소보를 다시 세르비아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에 반발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은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1998년에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크게 놀랐다. 발칸 반도에서의 전쟁이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자 클린턴 행정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UN은 세르비아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코소보의 자치권을 회복할 것과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의 권리를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전쟁 개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코소보 전쟁은 신 유고 연방의 내정 문제라고 주장하며 서방 국가들의 내정간섭을 용인할 수 없다는 취지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미국은 고심 끝에 NATO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미국은 NATO군을 이용해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공습을 감행했다. 걸프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중전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세르비아의 항복을 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무려 78일 동안 계속된 공습 끝에 신 유고 연방의 구성국이었던 몬테네그로가 항복하고 밀로셰비치마저 평화협정에 동의하며 종전이 이루어졌다.
NATO의 개입은 오늘날 최초의 인도적 개입 사례로 평가받는다. 인도적 개입이란 홀로코스트와 같은 집단 학살과 민간인 학대, 인권 유린이 이루어지는 경우 설령 그것이 한 국가의 내정에 해당할지라도 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를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로 국제법의 가장 중요한 3원칙(주권 존중의 원칙, 내정 불간섭의 원칙, 무력 사용 금지의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당시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 주도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으므로 NATO가 인도적 개입을 주장하며 공습을 감행한 것은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NATO와 미국은 러시아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영영 잃고 말았다. 당시 러시아는 NATO가 단지 서유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제기구일 뿐이고 장차 동유럽과 러시아까지 포함해 범유럽적인 국제기구로 발돋움하고자 한다는 미국의 설명을 믿고 NATO와 안보 협력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는 등 NATO의 동진(東進)을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미국이 NATO를 이용해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었던 러시아의 의사마저 무시하고 동유럽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자 러시아는 NATO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러시아는 NATO와의 교류를 사실상 중단했다. NATO의 동진에 대한 러시아의 두려움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결정이 신냉전과 우크라이나에서의 비극을 초래하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된 것이다.
#4. 정리하며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클린턴의 1992년 대선 당시 슬로건이다. 불황에서 탈출하겠다고 공약했던 만큼 클린턴은 정말 미국 경제를 살려놓았다. 소련 붕괴의 영향으로 러시아가 경제위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바탕으로 경제를 호황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고 1996년 대선에서도 이를 무기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임기 중 중국을 견제하는 데 실패해 오늘날 미중 패권 경쟁에 심화하는 데 기여했고 NATO와 러시아를 화해시키는 데 실패해 오늘날 신냉전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는 데 기여했다. 외교 외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남겼는데, 특히 여성편력과 관련한 문제가 많았다. 특히 백악관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 이른바 지퍼스캔들이 클린턴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성적인 접촉이 없었다고 증언했다가 위증임이 드러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업적도 뚜렷하지만 실책도 뚜렷한 인물이었던 클린턴은 대통령에서 물러난지 20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복합적인 평가를 받으며 미국 정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클린턴 행정부 역시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여러모로 잡음이 많았던, 복잡한 행정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