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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Jul 23. 2020

눈이 오던 날의 일기

먼지 쌓인 기억을 더듬더듬 꺼내보는 밤


몇 년 전부터 서랍 안에 저장되어있던 나의 일기를 꺼내본다. 이제는 그래도 될 것만 같아서였다.






1월의 어느 날 하늘에 눈(雪)이 날렸다. 정처 없이 부유하는 눈이 꼭 먼지 같아서, 나는 눈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어깨에 앉았을 때 꼭 먼지가 쌓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를 가나 먼지란 쌓이게 마련이다. 산 넘고 물 건너 시골 마을의 풀잎에도 먼지가 쌓이는데 하물며 사람의 어깨에 먼지가 쌓이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어깨에 앉은 눈을 보며 뜬금없이 2011년 11월 1일을 떠올렸다. 내 기억 속에서 키 크고 날씬한 1과 같이 기억되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어린 날, 학교를 다녀오면 어김없이  첫번째로 보는 얼굴, 사소한 부탁이 생기면 첫번째로 달려가는 존재인,



할머니는 거동이 가능하셨을 때까지 할머니답지 않은 꼿꼿한 자세로 노인 대학에 다녀오시곤 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1처럼 정직하고 강건하며 반듯하게 살아오신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으로 원체 모이기 어렵던 가족들은 오랜만에 장례식장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뜻밖의 감정을 느꼈다. 하나도 슬프지 않았던 것이다.



부모님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할머니의 죽음 앞에 슬픔을 느끼지 않았던 나의 감정 상태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장례 기간동안 울기 위해 슬픔을 만들어낸 것인지, 슬퍼서 눈물이 흐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이 흘렀다. 나는 학교 생활로 너무 바빴고, 일상은 일상대로 흘러갔다. 얼마 후에는 첫눈이 내렸고 과제를 하려고 연결한 외장하드에서 나는 몇 년 전 내가 냈던 다큐멘터리 영상 실습 과제를 열어보게 되었다. 스킵을 하며 넘겨보던 내 눈에 스쳐 지나가듯 할머니의 생전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 영상 속에서 할머니는 주인공도 아니었고, 그저 3초 정도의 짧은 순간 동안에만 모습을 드러낸 단역에 불과했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할머니는 내게 물었다.



잘 지내시는가?



단 한마디였다. 그래서 임종도 지키지 못한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한 마디는 바로 저 말이다. 영상 속에서 안부를 묻는 할머니의 모습을 우연히 본 나는 그날부터 눈에 수도꼭지를 단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유는 하나였다. 끊임없이 묻는 할머니께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대중없이 생각나는 게 바로 할머니다. 길을 지나다 익숙한 멜로디를 듣거나 귤을 까먹을 때나, 오래된 화장품 냄새를 맡으면 나는 할머니가 생각난다. 눈이 내리고, 그 눈이 어깨에 내려앉아 먼지처럼 쌓일 때면 또 할머니가 생각난다. 먼지 같은 삶에서 어깨에 먼지를 쌓은 채로 세상을 다녀가신 할머니가 묻는 안부를 나는 가끔가다 돌려 본다. 대답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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