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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man May 19. 2016

<곡성> 가이드북

나홍진의 미끼를 삼키는 방법

※ 이 글은 스포가 포함되어 있다기보단 그냥 스포 그 자체이므로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일독을 금합니다.


나홍진 감독이 강조했듯, 영화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자유이며 정답은 없습니다. 아래의 해석 또한 정답일 수 없으며, 다만 감독의 의도에 최대한 가까워지고 싶었던 노력으로 내린 '개인적인' 결론입니다.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편의상 "-이다." 라는 어미를 사용하겠지만 모든 문장은 "-것 같다." 라는 추측성 문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곡성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믿으라고 하는 존재와 믿지 못하게 하는 존재,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믿음이 인간의 생사를 결정짓는 상황에서 믿음은 과연 그 자체로 선한 것인가 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다. 이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해 보이는 것들을 선행학습할 필요가 있다. 하여 영화에 등장하는 몇가지 상징들을 살펴본다.     


상징에 대한 이해

: 악의 주술적 용도로 사용된다. 일본인의 집 사당에서, 종구(곽도원)가 일본인한테 깽판친 다음날 종구네 대문 앞에서, 효진이 집 방에 차려진 제사상에서, 일광(황정민)이 살을 날리는 굿판에서 다양한 모양의 뿔을 볼 수 있다.

검은 짐승: 일본인을 주인으로 삼는 존재들이다. 일본인이 키우던 개, 까마귀, 그가 굿을 할 때 사당에 매달아놓은 닭 , 종구네 집 앞에 걸어놓은 염소 등이 다 까맣다.

: 악의 등장과 소멸을 알려주는 장치다. 악이 세력을 확장하거나 선과 악이 대결할 때 비가 쏟아지고, 반대로 악이 소멸할 때는 그친다.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는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유감스럽게도 영화는 비로 시작해서 비로 끝난다.

훈도시: 큰 의미는 없다. 훈도시(일본속옷)를 입은 일광이 일본인과 한 패라는 걸 보여주는 힌트.

금어초: 무명의 토템이라 생각하면 된다. 금줄에 엮어 덫을 치는데 사용한다. 박흥식의 살인사건 현장과 마지막 종구의 집에서 볼 수 있다. 덫에 실패하면 시들어 해골 모양이 된다. 실제로는 해골 모양이 나오기 힘들어 미술팀에서는 농장 50평을 빌려서 직접 재배했다고..

사진: 감독이 직접 밝힌 부분인데, 사진에 영혼을 담아두는 의미라고 한다. 추측하면 이런 순서다. 산 사람의 사진이나 물건을 두고 굿을 해서 그 사람에게 귀신을 씌운다 -> 귀신으로 하여금 일가족의 씨를 말리고 자살하게 한다 -> 죽은 사람을 찍은 사진을 두고 굿을 하여 사진 안에 영혼을 담는다. (아마 영혼을 수거하는 과정이 완전하지 않을 때 좀비상태가 되는 듯)     


곡성, 그리고 예루살렘

영화는 비교적 일반적인 상징들을 보여주면서 계속해서 힌트를 던진다. 다만 다른 미끼들도 같이 던져지는 탓에 상징을 오해하거나 놓치게 되는 게 함정. 어쨌든 이를 이해했다면, 이제 영화의 주제를 이해할 차례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감독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멘트는 이거였다. "곡성이 예루살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라고.. 극단적으로 후려쳐서 얘기하면, 곡성은 AC 30년 경 예루살렘의 비유다. 예수가 대다수에게 외면받고 미친사람 취급받으며 죽어갔던, 그리고 다시 부활했던 바로 그곳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무명(천우희)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무명은 첫등장에서 종구에게 돌을 던진다. 성경에서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지라"고 얘기하는 유명한 구절을 떠올려보면, 돌을 던지는 것은 무명이 죄 없는 유일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무명은 자주 "할매가 그러는디, 왜놈이 범인이래"라고 얘기하는데 여기서 할매는 아버지인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절대적 선을 상징하는 무명과는 반대로 일본인은 악을 상징하는 존재다. 사람을 죽이고 영혼을 빼앗는 주제에 스스로를 예수라고 참칭하면서 사람들을 농락한다. 일광은 일본인과 한패지만 일본인처럼 순수한 악을 상징하는 인물은 아니다. 일본인의 시다바리 혹은 제자 정도의 위치로, 보다 세속적이고 개인의 사리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다. 무명의 위협을 받고 서울로 도망가려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 vs 악

영화가 본격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는 건, 그리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낚이기 시작하는 건 굿판에서부터다. 요란한 일광의 굿판과 고요하고 엄숙한 일본인의 굿판은 대비적인 효과로 인해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비춰지지만, 사실은 네 개의 장면이 교차된다. 일광의 굿판, 일본인의 굿판, 촛불에 둘러쌓인 효진의 방, 마찬가지로 촛불에 둘러쌓인 박춘배의 차. 두 무당은 서로 다른 두 존재에 대해 굿을 하고있던 것이다. 일광은 효진에게 살을 날리고 일본인은 박춘배의 영혼을 수거하려 했지만 둘 모두 실패한다. 일본인의 굿이 실패한 것은 도중에 무명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명과 일본인은 전능한 힘을 가진 존재는 아니다. 무명의 힘은 '믿음'에서 비롯되고 일본인의 힘은 '의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믿음은 절대선이고 의심은 절대악이다. 외워두자. 선에 대한 확신과 악에 대한 확신은 무명을 강하게 한다. 반대로 선에 대한 의심과 악에 대한 의심은 일본인을 강하게 한다. "왜놈이 범인이래"라는 무명의 말에 대한 종구의 확신은 결국 무명이 일본인을 압도하고 일본인을 죽일 수 있도록 돕는 힘을 부여한다. 일본인이 죽자 내리던 비가 그친다. 악이 소멸한 것이다. 병원에 있던 효진이는 치유되고, 이를 일광은 "먹이를 삼겼다"고 표현한다.     


악의 부활

흥미로운 점은, 예수의 부활이 연상되도록 악의 부활을 다룬다는 것이다. 이는 카메라 기법으로 표현되는데, 효진이 치유되고 종구와 재회하는 병실에서, 병실 전체를 비추던 카메라가 마치 누군가의 시선인 것처럼 줌아웃되며 뒤로 이동한다(박흥국의 죽음 직후에도 같은 시선이 등장한다). 이 시선은 그 다음 장면인 양이삼(부제)의 병실로 이어져 이삼에게 줌인되며 가까워진다. 종구에게는 (일본인의 죽음을 확인함으로써) 완전히 사라졌던 의심이라는 존재가 이삼에게 옮겨간 것이다. 실제로 이삼은 일본인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좀비에게 공격당한 후에 트럭에서 기절해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삼의 의심은 소멸되지 않았고 악이 다시 부활하는 힘을 제공한다. 부활한 일본인은 무명의 위협에 서울로 도망가던 일광을 돌아오게 한다. 승부는 다시 원점에서 시작된다. 믿음을 절대선으로, 의심을 절대악으로 상정했던 감독은 이제 정말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냥 믿어.”

무명이 귀신이라는 일광의 말에 종구는 다시 무명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무명을 마주한 종구는 그녀의 정체를 물어보지만 무명은 묻지말고 그냥 믿으라고만 한다. 그저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내 딸이 무슨 잘못을 했냐는 질문에 "니 딸의 애비가 의심을 해서"라고 대답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후손들에게 남긴 원죄를 떠오르게 하는 대사다. "그건 내 딸이 먼저 그런 것"이라는 종구의 울부짖음은 허공에 흩어진다. 끝내 의심을 극복하지 못한 종구는 결국 현혹되고 만다. 그러나 그와 함께 현혹된 관객들은 그의 선택이, 혹은 우리의 선택이 지극히 인간적이었을 뿐임을 안다. 장면을 되돌려서, 예수를 믿는 신부님조차도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귀신을 직접 보셨습니까? 아니 어떻게 보지도 않고 확신을 하십니까?" 필연적으로 믿음과 의심 사이의 어디쯤에 놓인 인간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믿으라'는 명령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믿음이란 이렇듯 맹목적이고 절대적이어야만 하는 걸까. 의심은 그렇게 용서될 수 없는 잘못이며 과연 그것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이유로 충분한 것일까. 종구에게 주어진 운명은 이해하기 힘들 뿐더러 가혹하게 느껴진다.     


누구의 승리인가

예수의 말씀을 따라하며 손바닥의 못박힌 자국을 보여주는 일본인 앞에서 이삼의 악에 대한 의심은 점점 커진다. 이것이 종구의 무명에 대한 의심과 더해져 극에 달하면서 일본인은 완전한 악마의 모습을 하게 된다. 이삼은 '주여'라고 탄식하면서 혼돈의 카오스에 빠진다. 여기서 이삼의 탄식이 눈 앞의 악마를 향하는지 아니면 실제의 예수님을 향하는지는 알 수 없다. 두가지 가능성에 따라 악의 승리이거나 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라고 추측한다. 결국 종구가 살아남은 것과 폭우라기보다 거의 그쳐가는 느낌으로 비가 내리는 것을 근거로 이삼에 의해 악이 소멸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렇게 희망할 뿐이다.



이제 다시 곱씹어보자. 곡성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믿으라고 하는 존재와 믿지 못하게 하는 존재,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믿음이 인간의 생사를 결정짓는 상황에서 믿음은 과연 그 자체로 선한 것인가 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다. 기독교인인 나홍진은 어느날 자신에게 찾아온 물음을 영화로 만들었고 그것을 우리에게 던져놓았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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