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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허블 Jan 09. 2020

시누이의 정치학

암, 적벽대전은 명함도 못 내밀지

“누나, 00이 지금 수육 삶아” 

“갑자기 웬 수육?”

“엄마가 해 오랬다는데? 우리 00 이가 아침부터 삶고 있어”

“엄마가... 올케한테?”    


뭔가 이상했다. 동생이 결혼한 지 십여 년. 

엄마는 한 번도 올케에게 이런 류의 부탁을 한 적이 없다. 음식 솜씨가 좋고, 손이 빠른 엄마는 장은 물론

온갖 엑기스와 청, 각종 장아찌를 담는 사람이었고, 자식들을 늘 넘치도록 챙겼다.   

그런 엄마가 뭘 해주면 몰라도 올케에게 음식을 부탁하다니. 더군다나 올케는 음식에 취미가 없는 편이다. 궁금증을 갖고 병원에 도착했더니 엄마의 표정도 심상치 않다. 


“엄마, 00한테 수육 삶아오라 그랬어?”    


엄마의 얼굴이 대번에 흐려지고, 아빠가 엄마를 노려봤다.    


“쓸데없는 짓 했지. 애한테 왜 그런 걸 시켜?”

“그래서 바로 해오지 말라고 전화했잖아. 누군 시키고 싶어 시켰어?”    


아빠의 타박에 막힌 둑이 터지듯 엄마가 목청을 높였다.     


“갑자기 의사가 철분 수치가 떨어진다고 수혈을 두 팩이나 하면서, 수육을 먹이라잖아. 근데 여기 지리도 모르겠고, 갑자기 너무 당황돼서, 전화했지”

“그럼 나한테 전화하지... 근데 왜 다시 해오지 말라 그랬어?”    


엄마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정이 좋지 않다. 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안함. 아마도 그 수육은 

사랑과 전쟁보다 더한 사연이 있을게 뻔했다. 아빠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시 엄마에게 물었다.     


“내가 이러이러해서, 수육 좀 삶아올래? 했더니  니 올케가 단번에 뭐라는 지 알아?”    


아, 이건 클라이맥스 전의 불안이 분명하다. 나는 짐짓 평온을 가장했다.    


“뭐랬는데?”

“아이, 어머니 그냥 사드세요, 그러더라.”

“저런…….”

“내가 뭐 해오라 소리, 걔 시집와서 첨인데. 내가 여기 길만 알았어도 부탁 안 했어.

막막해서 전화했는데….”     


이건 대충만 들어도 허리케인 급이다. 시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특수 상황이고, 엄마로선 처음 하는 

부탁을 단번에 거절당했다. 게다가 며느리 어려워하는 아빠가 괜한 일을 벌였다며 타박을 해댔으니, 

지금 엄마의 마음은 서운함을 넘어 서러움으로 전이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올케가 왜 그랬는지도 알겠다. 단순하고, 솔직한 편인 올케는 군더더기가 없는 대신 빈말도 못한다. 엄마가 처음으로 뭘 해오라고 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음식을 못하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성격상 마음의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을 거고, 뒤늦게 ‘아차’했을 거다. 그러니 그 아침부터 일어나 열심히 수육을 삶았겠지. 결국 할 거 하면서도 욕먹게 생긴 올케 역시 불합리함에 슬슬 예열되고 있을 것이다.     


사건 개요가 정리되는 동시에 피곤함이 밀려왔다.     

일촉즉발, 수십만 대군은 이미 강 양쪽에 진지를 구축했고, 이제 전쟁으로 치닫는 건 시간문제였다.

지금 중요한 건, 바로 정치력.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남들은 정치는 국회나 남북 회담장에나 있는 줄 알지만, 사실 가장 정치적인 무대는 가족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 걱정, 미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 십 년 동안 축적된 공동체. 

선과 악이 모호하고, 가치판단이라는 건 애초에 있을 수도 없는 관계.

싫다고 손절할 수도 없고, 이익만으로 움직일 수도 없는 사회.

그러나 유리처럼 작은 균열에도 부서질 수 있는 제도.    


나는, 자국의 수뇌부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존재(딸)이자, 상대국과의 관계도 매우 적절한 우호국이다. 

올케가 그 사연 많은 수육을 들고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30분. 병원에서 함께 보낼 시간은 어림잡아 약 두 시간. 그 두 시간 반 동안 수육을 둘러싼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   

  

과연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 처신인가.  

나름의 개똥철학이지만, 갈등에 후진은 없다. 절대 풀리지도 않는다. 세간에서 말하는 화해란 적당히 속을 썩을 만큼 썩은 후에 서로의 득과 실을 손해 본 듯 챙기고 거짓된 얼굴로 악수를 하는 것이다. 

안 보고 살아도 되는 관계라면 모를까, 가족 간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사 모든 일은 문제시하면 문제지만, 이해하려고 치자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별로 없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이 갈등을 해프닝으로 만들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세탁하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땅을 깊게 파고, 한 번에 묻어버려야 한다. 공감이고 나발이고, 엄마의 서운함을 들어준다며 동조했다간 엄마에게 명분을 줄 뿐이다. 노선을 정한 나는 양손에 삽을 든 기분으로 엄마 앞에 앉았다.  


“00이 말로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삶았다던데?  그냥 말이 헛나왔겠지”

“내가 지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결국 삶아오잖아. 미담으로 끝났네 뭐. 엄마 딸도 안 삶아”

“넌 사 온다고나 하지, 사 먹으라고는 안 하잖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대”

“그래서 걔가 빚을 안지나 봐. 말로 안 갚을라고.

“넌 농담이 나와?”

“그럼 이걸 웃지, 싸워? 이따 오면 괜히 인상 쓰지 말고 고생했다고 해. 서운할 순 있지만, 화낼 일은 아니잖아? 못된 시어머니 되는 거 순간이야”

“......” 


엄마가 말이 없다. 일단 급한 불은 꺼졌다. 이제 올케만 해결하면 된다.

잠시 후, 며느리는 얌전하게 삶은 수육 두 팩을 들고 나타났다. 새우젓에 온갖 야채에, 답지 않게 꼼꼼히 챙겨 온 것이 역시 미안했던 게다.


사연을 모르는 듯 한 동생 놈과 며느리 고생시켜 미안하기만 한 아빠를 사이에 두고 두 여자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엄마의 눈치를 보는 올케와 서운함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엄마.

     

“수육 색깔이 너무 좋다. 앞다린가? 비계도 많네. 아빠 얼른 먹어봐. 새우젓도 챙기고, 너 센스 있다.”    


역시 이럴 땐 주책이 최고다. 얼른 아빠에게 수육을 권했다. 평소 입맛이 까다로운 아빠지만, 며느리에게 미안해서인지 맛있다며 잘 드신다. 


“아빠 입맛에 맞나 보다. 아침부터 애썼네. 역시 며느리가 최고야.”

“그지? 우리 00 이가 아침부터 고생했어~”    


아, 저 청순한 동생 놈. 너는 좋겠다. 이 무림 고수들이 양쪽에서 뿜어내는  살기도 못 느끼고.      


“형제님, 오래간만에 아빠 치료 따라갔다 와. 엄마도 가서 아들이랑 커피라도 마시고”    


일주일 동안 기다렸을 아들을 짝 지워 내려 보내고, 올케를 향해 돌아섰다.

이 순간, 중요한 건 미소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는 표정의 무해한 미소. 그녀의 눈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상황을 안다는 건 들었다는 거고, 그건 뒷담화다. 뒷담화는 모든 갈등의 화수분이다. 게다가 상황을 아는 척하면 조언을 하든, 상담을 하든, 하소연을 듣든 셋 중에 하난 해야 한다.

하지만 조언은 진상이고, 상담엔 답이 없고, 하소연은 버겁다. 

아무리 좋은 척을 해봐야 시누이는 시누이. 말리는 시누이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나쁜 법이다.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니 고마울 뿐이다'라는 메시지만 전하면 된다.


“애들은 점심 먹었나, 전화나 해볼까?”


일단 비무장지대로 슬쩍 움직였다. 확실한 안전지대, 바로 조카님들. 해맑고 예쁜 조카들과 통화를 하는 동안 올케의 표정도 풀어졌다. 나도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잠시 손을 잡았다 놓았다.

잠시 뒤, 동생과 올케는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죽일 듯이 싸우고도 얼굴을 봐야 하는 관계가 가족이라면 죽일 듯이 싸울일을 차단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족 간의  갈등은  교통사고와 같아서 아무리 억울해도 2:8이지,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 

게다가 그렇게 목숨 걸고 따질 대의도, 이겨봤자 영광도 없다. 얻을 게 없는 싸움이라면, 애초에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안 그래도 싸우고 맘 상할 것 천지인 세상에서 가족들에게 양보 안 하면 또 누구에게 하겠나.

이해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고, 사랑이라고 말해준다면 감동이겠지만, 결국은 정치와 처세다.    

비겁하고도 평화롭게, 또 하나의 위기상황이 이렇게 지나간다. 


그나저나 수육은 어떻게 삶더라? 만약을 위해서라도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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