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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허블 Jan 31. 2020

그녀와 헤어졌다.

근 일 년 만에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휴대폰에 뜨는 이름이 생경했다. 그건 반가움이나 당혹스러움과는 확실히 달랐다. 회피나 거부도 아니고, 떨림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낯설었다.


우리는 열네 살,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성격도, 성향도 전부 다른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친구가 되어 있었고, 이후로 늘 서로의 제일 친한 친구였다. 소풍도 체육대회도 옆자리에 앉아 보냈고, 자라는 내내 서로의 시간과 비밀을 공유했다. 


그녀의 사춘기는 어찌나 호됐는지, 그녀 옆에 있는 나는 내 사춘기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나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첫사랑의 시작과 끝, 대학입시의 실패와 긴 재수 시절을 지켜봤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뭘 모르면서도 다 아는 척 구는 애늙은이 같았던 나의 청소년기와 혼란스러웠던 20대를 다 아는 건 아마 그녀뿐일 거다. 


저는 고향에서 재수를 한다고 그렇게 징징대면서도, 성년식 날 향수와 노란 장미를 들고 찾아와 준 것도.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 얻었던 반지하방을 엄마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쓸고 닦은 것도 그녀였다. 


당차고, 야무지고, 똑소리 나면서도 사실은 허당인 구석이 많았던 그녀.

말없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고집 센 나는 정말 안 어울리는 절친이었다.

서로의 버릇, 가정형편, 말투 어쩌면 속마음까지도 전부 객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가 들며, 사는 곳이 달라지자 거리감이 생겼다. 물리적인 거리감은 정서적인 거리마저 벌렸다. 매일 전화를 하고, 어릴 때처럼 시시콜콜 얘기를 나눠도 걸러지는 것들이 많았다. 


결혼과 출산, 퇴직과 이직을 거치며 그녀는 나보다 삶이 복잡해졌다. 당연히 그녀의 하소연이 늘었다. 들어주고, 위로하고, 같이 해결법을 생각하고. 언제부터인지 전화의 시작과 끝은 그녀의 얘기로만 채워졌다. 어쩌다 그녀가 묻는 “잘 지내?”가 내 안부의 전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건 결국 습관이 됐다.  

하나가 습관이 되자 다른 것들도 당연해졌다. 남편 때문에, 다른 일 때문에 내 생일을 그냥 지나가기 시작했고,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도 오지 못했다. 


마치 그녀는 맡겨놓은 돈을 인출해가듯 필요할 때 와서 필요한 것만 챙겨갔다. 전화를 끊을때마다 꺼내놓기도 치사한, 서운함과 억울함이 뒤섞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과거만 붙잡고 버텼다. 중학교 때 같이 걸었던 골목길, 대학교 때의 여름방학, 너의 결혼식날, 좋았던 시절의 여행. 추억들을 되새기며 서운함을 다독였다. 마치 남친의 바람과 무관심을 애써 모른 척 참는 여자처럼. 

'이게 어떤 사랑인데, 버릴까..','니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데 돌아서나..'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관계는 작은 말 한마디에 부서졌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일도 몸도 치이기만 하던 어느 날, 징징대는 그녀의 전화에 나는 답지 않게 뾰족해졌다. 그녀가 전화를 쾅 끊어버렸다. 동시에 내 안에서 뭔가도 함께 툭 끊겼다.

 

이후로 우리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상태가 불편하지 않았다. 전화가 오지 않는 날들이 힘들지 않았다. 마치 오래 이별을 준비한 사람처럼,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하는 맘이 전부였다.


일 년 만에 온 전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 순간 나는 그녀의 표정도 본 듯이 떠올릴 수 있다. 이럴 때 서로를 다 안다는 건 괴로움이다.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기다리다 늦었다고. 미안하다는 그녀의 말. 예전처럼 다 괜찮다고, 보고 싶다고 해야 하는데, 말로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서로를 좋아하고, 기억하고, 지켜주던 시간은 그대로인데, 마음이 달라졌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데도 되돌릴 수가 없다. 보이지도 않는 마음이란 건 늘 이렇게 힘이 세다.  

남녀관계도 아니고,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끝난다. 이렇게 허망해서야 쓸쓸해서 어디 살겠나...


결국 그녀와 헤어졌다. 헤어졌다. 지금은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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