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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Nov 04. 2019

기다림

포기

끝없이 펼쳐진 장막. 하지만 얇은 그 장막을 걷는 일은 어렵지 않다. 조금 두려울 뿐. 쉽게 걷히는 장막만큼이나 쉽게 흔들리는 마음이 두렵다. 나는 아마 무너져 내리겠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나는 분명 무너져 내린다.


장막은 본디 투명하다. 때때로 장막은 검붉은 빛에 물들어있기도, 영롱한 은빛에 물들어있기도 했다. 나는 봄처럼 샛노란 빛이나 여름처럼 푸르른 빛에 물든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장막을 뒤덮은 빛이 가벼울수록 마음은 더욱 세차게 흔들리고 두려움은 배가 되었지만 걷고 나서 눈 앞에 펼쳐질 행복, 밀려드는 행복에 숨이 멎을 때 느낄 희열, 그 찰나의 짜릿함을 더없이 사랑했다. 그래, 나는 사랑했다. 장막 너머 나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그 존재를 사랑했다.


오늘은 짙은 흑빛이었다. 손을 뻗고 싶지 않았다. 저 너머에 있을 존재가 시시하게 느껴지는 이 빛은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기대감을 단번에 앗아갔다.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를 안다.

나는 무너져 내린다.


준비를 시작한다. 눈을 다시 느리게 감았다. 뜨지 않아도 이 너머 장막이 걷히고 나에게 안길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빛에 따라 사랑의 크기는 바뀌어도 지워지진 않았다. 흑빛에 뒤덮인 존재도 나는 사랑한다. 다른 날보다 덜, 오늘만큼은 덜 사랑할 뿐이다. 그, 혹은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 그녀? 그런 존재였던가?


손에 무겁게 감기는 장막을 천천히 걷는다.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서늘한 바람이 발목부터 나를 감싼다. 제 존재를 속삭이며 걸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부러 없는 체한다. 그러면 들린다. 눈 앞에 있는 듯, 없는 듯. 저에게 다정한 듯, 무정한 듯. 저를 부르며 울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내딛는 발 하나 디딜 곳은 원래 없었다는 것처럼 그렇게 무너져 내린다. 힘 있게 내디딘 발은 나약하게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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