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리뷰>
“내 몸이 좋아진다” 반복되는 우스꽝스러운 율동으로 목련고의 아침이 시작된다. 안은영(정유미)은 목련고의 보건교사다. 어느 날 자기주장이 강한 오승권(현우석)이라는 아이가 보건실에 찾아온다. 붉게 부은 목 뒤에 박힌 무언가를 뽑아내자 하트 모양의 젤리가 나온다. 사실 은영은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 세상엔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젤리란 존재가 있으며 은영은 젤리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젤리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대게 해로운 존재가 되기 전에 사라진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해로운 젤리를 은영이 처리하며 아무도 모르게 남들을 돕고 있다. 은영은 승권의 목에서 나온 젤리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학교를 전전하며 원인을 찾아 나선 그녀는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수상한 젤리들을 발견한다. 지하실로 통하는 문엔 단단한 쇠사슬이 채워져 있지만 은영의 특수 장난감 검에 의해 맥없이 풀려버리고 음산한 젤리들로 가득한 지하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많은 젤리들을 상대로 맹렬히 돌진하는 은영. 젤리들이 그녀의 검 앞에 최후를 맞는 가운데 목련고를 설립한 이사장 손주이자 한문선생인 인표(남주혁)가 은영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인표는 어떤 젤리도 뚫을 수 없는 강력한 보호막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젤리를 보진 못했다. 은영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한 인표지만 학생들이 보건실에 자주 오는 원인이 지하실에 있다는 은영의 말에 함께 조사를 나선다. 그러던 중 압지석이라는 의문의 돌을 발견하게 된 그들은 호기심에 돌을 뒤집고 만다. 그 순간 엄청난 지진이 발생하고 불길함을 느낀 은영은 서둘러 지하실을 빠져나온다. 지하실에 홀로 남은 인표는 압지석에 새겨진 의미를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목련고에 숨겨진 수상한 비밀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나기 시작한다.
백수인 지석이(박해일) 병원을 찾았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준비하던 연기 오디션도 포기했다. 오랜만에 본 고모는 그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병상에 누운 할머니의 고통스러운듯한 숨소리만이 병실을 가득 채운다. 잠시 고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달이 났다. 할머니의 숨소리가 점점 가팔라지더니 이내 멈추고 만 것이다. 눈앞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에 지석은 혼란해하지만 다행히 할머니는 다시 숨을 되찾는다. 죽음의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그에게 오디션 날짜를 알리는 전화가 온다. 18일 6시 준비할 연기는 ‘죽어가는 것’.
여기까지 내용은 이경미 감독의 2003년 데뷔작 <오디션>의 내용이다. 사제지간의 위험한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미쓰 홍당무>, 정치가도를 위해 실종된 딸을 방치하는 남편과 대립하는 <비밀은 없다> 등 기묘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빠져들게 만드는 그녀의 스타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디션> 제작 당시 한예종 3학년이었던 그녀에겐 봉준호란 선생님이 있었다. 그녀의 데뷔작에 등장하는 배우 박해일은 그와 인연의 결과다(당시 박해일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살인의 추억>에 캐스팅된 상태였다). 할머니가 죽어가는 순간을 연기하는 26살 풋풋한 청년의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통해 이경미 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대범함과 자신의 스타일을 16분 짧은 영상에 효과적으로 담고 있다. 짧은 단편이지만 <오디션>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는 결국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화면은 점점 어두워지고 슬퍼하는 울음소리 너머로 지석의 최종 합격을 알리는 통화음이 들린다.
은영의 설명에 의하면 젤리는 모든 것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은영과 연관된 특정 젤리(인물?)들을 제외한 대다수 젤리는 학교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등장한다. 이전부터 학교는 그녀의 영화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이경미 감독 손에서 창조되는 학교라는 공간은 매번 새로워진다. 통상적으로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학생들은 안전과 행복을 영유하며 즐거운 학창생활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어른들의 착각 속에서나 등장하는 그런 학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도 학교 생활에 고통을 받는 이들이 존재하고 매해 OECD 자살률 1위인 한국의 10대 자살률은 지금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이경미 감독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학교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학교 내 약자의 현실을 불편하리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정서적으로 위축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이경미 감독은 자연스러움을 거부한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세계관 속 인물들은 밝고 명랑하다. 그들의 행동은 거침없고 함께 있는 약자들과 연대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넓혀간다. 이들에겐 법과 제도에 대한 개혁과 같은 거창한 계획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정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나 답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 행동이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 혹은 울음 등 복잡한 감정으로 점철된 이경미의 세계를 사랑스럽게 만들어준다.
은영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운명을 혐오한다. 그로 인해 은영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이상한 타이밍에 “씨발”이란 말을 내뱉는 버릇까지 생겼다. 그런 은영에게 혜민(송희준)이 나타난다. 혜민은 삼국시대부터 활동한 ‘옴잡이’다. 그녀는 옴이 창궐할 때만 속세에 나타나 반경 5.38km 내 옴을 구제하고 스무 살이 되면 죽음을 맞는다. 단지 옴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그녀는 삶을 반복한다. 누군가에게 부여받은 운명인지는 모르나 그녀 나름의 사명감을 지니고 있어 은영은 답답하기만 하다.
이경미 감독의 세계에선 운명이란 법과 제도 위에 있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5.38km 범위 밖을 가리키는 일방통행 화살표를 혜민은 따라가지 못한다. 철저한 운명론자로서 인물을 그려내는 이경미 감독의 모습은 삶에 대한 가능성까지 좀 먹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운명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수동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경미 감독의 운명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어른이 되라”일 것이다. 어린 시절 고통의 기억으로 채워진 학교란 공간에 운명처럼 다시 돌아오는 인물들은 어른으로서 미숙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 시절 미쳐 채우지 못해 남아버린 미숙함이란 공백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존재들이 대신 채워주고 있다. 반면 은영은 자신의 공백을 채우는 대신 능력을 잃은 삶에 안주하려 한다. 그래서 은영이 어른으로서 의무를 저버린 순간 이경미 감독은 잔인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운명의 궤도로 그녀를 다시금 소환한다. 평범한 일상을 빼앗긴 은영은 슬퍼한다. 누구보다 구슬 피우는 그녀지만 그 속엔 안도감 또한 존재한다. 누군가의 위험에 누구보다 앞서 달려갔던 그녀였다. 의도치 않게 능력이 사라져 특별한 방법이 없었던 그녀에겐 방관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은영에게 학교는 방관하기엔 이미 지켜야 될 소중한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었고 능력을 잃은 것에 조바심이 생기고 있었다. 결국 능력을 되찾은 은영은 어른이 될 운명에 순응하기로 결심한다. 아이들의 위험을 알고 방치하는 무책임한 어른이 되는 것보단 나만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로 ‘참된 어른’이 되는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어른의 운명 속에서 우리 아이들을 위험에서 지킬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 역시 배려받아야 하는 귀한 존재다. 그들 나름에 처지와 체면 때문에 큰 소리를 내진 못하고 후미진 곳에서 홀로 분투하며 “씨발”이라 조용히 외치고 있을 그들 또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