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상대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일명 상호허겁)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평화를 유지하게 만든다. 우리 인간은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 이러한 힘의 균형을 깨고 홀로 거머쥐려는 속내를 내보인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관찰해 온 자연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연에서 제일 먼저 배울 게 있다면 이 약간의 비겁함이다.” - 최재천,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
"사람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까마득하며, 감히 예측할 수도 없이 두려워할 만한 '포텐셜'이 숨겨져 있습니다"라는 것이 신조라면 신조입니다. 정치 인사도 고등학생이 움켜 쥔 벽돌에 당할 수 있고, 불이 붙은 차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생명을 구해내는 시민 영웅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든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고로 그러한 '포텐셜'을 조심하고 또한 존경하려고 노력합니다. 정말로요.
나이가 많은 선배들은 물론 나이가 어린 친구들에게도 쉽게 말을 놓지 않습니다.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만, 습관이 되어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상대가 어렵든 조금 더 편하든지 간에 '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싶은 겁니다.
세상은 예측불허입니다. 고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는 감각에서 '두려움'은 생겨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되도록이면 경계하며, 의심을 거두지 않는 것. 하물며 거리가 가깝다 하여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다'라는 착각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정도겠지요.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가르칩니다.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어떠한 파국과 극한의 상황에서도 '예'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느껴왔기에, 스스로에게 경어로써 거리감을 생성하는 '패시브 스킬'을 '액티브'하게 장착한 것이 아닐까 가설을 세워봅니다.
'두려움'은 '겁을 먹는다'라는 식겁(食怯)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적당한 거리의 확보' 자체가 어쩌면 '두려움'의 본질에 더 가깝지는 않을까 생각합니다. 거리가 '제로'가 되었을 때, '예'는 무너지고 맙니다. '제로 거리'의 관계는 많은 경우 '거리낌 없는 행동'을 낳게 됩니다.
만악은 바로 그곳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아닐까요. 이럴 때는 거리를 벌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생존율을 올려주지 않겠어요? 이쯤에서 바로 전언을 철회하는 것도 염치없긴 하지만 거리를 너무 벌리는 것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서로가 너무 멀다면 두려움은 물론, 어떠한 관심도 갖지 않게 됩니다. 인식 자체에서 배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두려움이라는 기분이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두려움은 경계하며, 의심하고, 회의하지만 결코 배제하지 않으니까요. 사람은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을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보이긴 하지만,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닐 것 같다'라는 여백이 남겨진 아주 건전한 상태에서요. 이것은 결국 무지를 수용하는 데에서 오는 감각들이며 정말이지 철저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타인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적당히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 하고요.
감각의 확장이든, 지성의 성숙이든, 신체의 발달이든 간에 이를 촉발시키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으로서의 선구'는 죽음이라는 몰교섭적 가능성 앞에 자신을 개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죽음'이라는 가능성을 실체로써 받아들인다는 거죠. 죽음과 페이스 투 페이스 한다니, 듣기만 해도 두렵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선구는 우리에게 '존재'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존재의 소리가 울릴 때 경이로움을 느낀다. 도대체 무엇인가가 왜 없지 않으냐 하는 경이 말이다".
왜 하필 이 공간, 이 시간에 무엇인가가 없지 않고 존재의 소리를 울리며 기어코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열어 보이며 나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가 '있음' 보다 '없음'이 자연스럽긴 합니다. 의미도 이유도 원리도 정의도 창의적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보면 '존재함', '있음'이라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던 존재들에 대해 일말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간을 비틀고, 공간을 비집고, 자연스러움을 역행해 공(空)을 점거하고 있는 이 숱한 존재자들이 참 기특하고, 놀랍게 느껴지지는 않을까요. '죽지' 않고, '없지' 않고 지금 여기에 '살아 있어' 주니까요.
"I'm gonna love you like I'm gonna lose you"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마치 당신을 잃을 것처럼요" 정도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급박한 두려움'은 사랑을 더욱 강대하게 만듭니다. 소중함이라는 것도 '존재'보다는 '부재'를 통해서 실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의와 평화, 용기와 사랑도 모두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되려 신비롭고 경이로운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겁하다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부재'에 대한 두려움에 예민하기 때문이죠. 어쩌면 '현실'에서 현실적이라 할 만한 것들은 아무래도 그런 비겁하고 부자연스러운 것들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 자체의 신비로움에 감응하는 '시적 태도'의 바탕에는 '두려움'이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입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사유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 할 때 사유는 여실히 요구됩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 너머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유하는 일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감각과 지성, 신체의 성숙을 촉발시키는 과정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겁니다. 캄캄한 어둠에 적응하는 능력이 발달하고, 지난한 싸움에서 근력이 붙듯 성숙이란 결국 더 복잡한 것을 받아들이고, 확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통제를 벗어난 초월적인 무언가를 대면할 때 자연이 전수해 준 비장의 무기는 '허겁', 바로 이 '약간의 비겁함'입니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가 얼마나 미약하고, 동시에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없는 확장 속에서 작은 존재일 수 있지만, 그 무엇에 의해서도 완벽히 이해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은 우리를 더 깊이 성찰하게 만들고, 우리가 그저 지나쳐버릴 수 있는 일상의 경이로움에 눈을 뜨게 합니다.
그렇다면 '허겁'은 단지 비겁함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진지한 모습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두려움'은 결국 우리 자신을 더욱 진실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통로인 셈이니까요. 덕분에 오늘도 평화로운 일상을 마주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물론 한명의 겁쟁이가 자신의 두려움을 신비로운 깨달음으로 합리화하려는 약간의 비겁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비겁함도, 두려움도, 결국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보호막이자 성장의 촉매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필자는 아마도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일조차 하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