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망가진 모습을 보고 싶어

영화 <미키17>

by 널하우스


"네가 망가진 모습을 보고 싶어"


언젠가 지인이 내게 다가와 술잔을 부딪히며 건넨 말이다. 모두가 취하는 자리에서 저 혼자 과음하지 않고, 언어를 고르고, 자제하는 모습에 그럴 거면 뭐 하러 이 신나는 술자리에 남아 있느냐 되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기회에 서로가 더 친밀해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손을 내민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로 망가진 나를 감당해 주고 싶었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그러한 타인의 이해를 예단하는 나의 욕망도 정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라서. 단지, 타인의 말은 내게 과잉된 생각을 불러일으켰고, 나는 그러한 과잉 속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담담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두려웠다. 하해와 같은 성인군자처럼 살 수도, 안하무인 내 멋대로 살 수도 없었다. 성인이 되기엔 무능했고, 안하무인에 도취될 때만 발휘되는 나의 유능도 무력해 보였기 때문이다. 담담한 척하지만 속으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망설임과 머뭇거림이 어떻게 타인에겐 담담함으로 비쳤던 것인지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어째서 그렇게 안간힘을 쓰느냐 묻는다면 '살기 위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구태여, 망가진 추태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아도 나는 매 순간 망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나만이 경험하는 특수한 무언가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나의 망가짐은 특별할 것도 없기 때문에 굳이 특별하게 누군가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궁금해진다. 나와 다른 타인은 망가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만약 '감당할 수 없는' 망가짐을 마주친다면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겨내는지. '직접' 보고, 듣고, 느낀다면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묻게 되고 만다. 나의 미키에게. "죽는다는 건 어떤 기분인 거야?"라고.


미키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얼마간 이겨내는 존재처럼 보인다. 죽을 때마다 새롭게 프린트되는 육체에 기억을 심고 미키는 다시 태어난다. 물론 죽음의 기억도 또렷하게 간직한 채 무려 열일곱 번이나. 그에게 죽음의 생생한 경험담을 전수받을 수만 있다면 죽음도 감당할 수 있는 망가짐이 되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정작,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익살스러운 미키의 망가짐과 죽음에서 그의 어떠한 결연함과 단담함보다도 금방이라도 깨질듯한 연약함을 더 자주 마주치지만.


누구나 죽는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사 죽음을 경험한 이가 죽음의 후일담을 알려준다고 해서 그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우리는 반복해서 묻는다. 아니 반복해서 죽인다.


미키, 너라면 담담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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