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_최태현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박완서. 1975. 『도둑맞은 가난』 중)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식상해졌다고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여전히, 아니 더 혹독한 신자유주의의 시대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을 다른 말로 변주해서 부를 뿐이다. 분배 정의의 상실, 고삐 풀린 시장, 각자도생과 각자도사(死) 등. 그런데 이런 표현들만으로 시대를 진단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의 시대가 주는 상실감은 방에서 물건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 중의 산소가 옅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가깝다. 지배적인 경제적 생산과 분배, 도덕적 판단 체계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사회의 공기에 더 이상 공공성이라는 산소가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함께 기대어, 의지하며, 협력하며 공공성이라는 공동체의 산소를 함께 만들어왔던 공존의 감각이 사라져가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떤 이는 물을지도 모른다. 공공성은 정부와 국가가 담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있지 않은가. 맞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적 행위자가 아니라 공적 행위자여야 한다. 그러나 정부나 국가가 공적 행위자라는 관점의 근거는 무엇인가. 좀 더 도발적으로 물어보자. 당신은 정말로 정부 혹은 국가가 오로지 공적 행위자라고 믿고 있는가? 공(公)이란 무엇인가? 공공성을 국가가 독점한다면 그것이 공일 수 있는가? 우리는 공동체가 오랫동안 형성해 온 공공성의 가치를 그대로 국가에 맡겨버려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재생해야 하는가. 국가가 특정 집단의 부가적 이익을 다른 집단의 오래된 좌절과 맞바꾸면서 그것이 공익을 위하는 결정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공공성마저 도둑맞은 기분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2022년 12월 1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모처에서 연구자 네 명이 처음 만났다. 문화/인류학의 안희제, 천주희, 행정/정책학의 변재원, 최태현. 이들은 평소에도 사회 문제와 사회운동 가까이에서 글을 쓰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시민단체를 통해 이 시대의 공공성을 탐구해 보자는 방향성 외에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었다. 연구비도 없었고, 목적도 없었다. 유일하게 확실했던 것은 ‘그냥 무엇이든지 해보자’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한 해를 돌아보며 한국사회에서 일어났던 이슈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냈다.
함께 돌아본 2022년은 정말 뜨거웠다. 2021년부터 지켜지지 않은 약속과 보장되지 않은 권리를 외치며 여당 대표와 맞토론을 이끌었던 장애인들의 지하철 선전전, 유난히 많은 비가 내리고 이 시대의 가장 취약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잔인한 여름, 코로나-19가 끝나가는 와중에 갑자기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리고 어느 서늘한 가을날 159명의 생명이 숨진 이태원까지. 이들뿐이랴. 공장의 젊은 희생자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자립준비청년들, 산불에 죽어간 동물들과 숲이 있었다. 들리지 않은 목소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요청, 반영되지 않은 예산, 조용히 사라져 가는 생명들은 끝이 없었다. 이 와중에 국가는 끊임없이 무엇이, 누가 더 시민다운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사실은 하고 싶지 않은지─를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지난해를 돌아보다가 어느새 2023년을 맞았다. 2022년을 정리해 보자는 애초의 기획 의도는 이제 미래를 전망하면서 한국 사회의 지속적 문제들을 드러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들 앞에서 국가의 공공성은 공권력으로서의 모습만 점점 짙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눈을 돌려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 누군가의 생명을, 권리를, 목소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시민단체들에서 공공성의 의미를 찾기로 했다. 애초에 공공성이 시작되었던 지점, 바로 시민사회의 자발적 결사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현장에 뿌리박은 공공성에 주목하기로 한 것이다.
이 땅의 수많은 시민단체들 가운데 누구를 만날 것인지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갈 수는 있지만 시간은 한정되었고, 자원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우리 눈앞의 길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우선 주제를 좁히기로 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2022년의 뜨거웠던 한국 시민사회의 키워드를 분기별로 공유하고, 다시 월별로 세분화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한 해를 관통하는 공통된 이슈들을 추출하였다. 모든 것을 포괄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 모임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믿고 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먼저 주제를 정하고, 각 주제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를 둘씩 선정하기로 했다.
출발은 역시 기후였다. 기후변화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간의 조건”으로서 지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현상이었지만, 지구상의 누군가의 삶은 더 혹독하게 변화시키는 현상임에 주목했다. 기후변화는 공적 대응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국제사회에서는 마치 사익추구자처럼 행동하는 국가의 본질을 드러내고, 국내적으로는 기후변화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적 행위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기후변화의 차별적 영향으로부터 공공성에 입각한 대응이 가장 필요한 이들은 누구이며, 누가 활동하는가를 질문했다. 특히 2022년 3분기에 발생한 수해와 산불 등으로 인해 주거빈곤의 문제는 하반기 공공임대주택 예산투쟁으로 연결되었다. 여기에서 주거의 위협을 받는 이들, 그런 이들이 처한 빈곤으로 논의가 흘렀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 가운데서도 홈리스들과 탈가정 청소년들을 대변하는 두 단체로 홈리스행동과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을 떠올렸다.
다음으로 2022년은 1분기에 숙명여대 청소노동자 투쟁, 2분기 SPC 노조 단식 투쟁 및 화물연대 총파업, 4분기 SPC 불매운동 등 여전히, 그러나 다소 다른 형태의 노동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에 주목했다. 전통적인 노동운동을 다루는 것도 중요했지만, 논의를 확장하는 것 역시 공공성을 창출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우리는 노동의 영역에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단체들을 모색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선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노조에 가입하지는 않고, 새로운 플랫폼 노동에 주목하며, 권리라는 언어를 건강이라는 언어로 확장하고 있는 노동건강연대를 떠올렸다. 다음으로 비록 노동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건강이라는 키워드는 우리의 몸과 관련된 공공성을 탐색해보고자 하는 동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특별히 긴 이름을 지닌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를 떠올렸다. 셰어는 재생산권 옹호 활동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 성과 재생산 건강을 위한 전문의원을 협력 운영하며 병원에 가기 어려운 소수자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데 힘을 기울여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과 대만의 긴장 고조, 그리고 “예정된 전쟁” 식의 전쟁 예측이 난무하는 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전쟁은 생명이 동료 생명을 대규모로 죽이는 행위, 특히 국가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집단적 행동이다. 그래서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국익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려는 집단이 훔쳐간 공공성을 되찾는 행동이다. 그런데 좀 더 확장해 보면 생명이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인간 사회에서 평화를 외치는 단체로 전쟁없는세상을 떠올렸고, 인간과 동물의 생태적 평화를 외치는 단체로 핫핑크돌핀스를 떠올렸다.
이렇게 우리는 ‘공공성’이라는 렌즈로 생태/평화, 노동/건강, 그리고 주거/빈곤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지만 현장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의제를 만드는 6개의 시민사회단체를 만났다. 이 단체들의 활동 기간은 짧게는 수개월부터 길게는 20년까지 다양하다. 우리는 단체들이 만들어지는 시기의 사회적 배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단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공공성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과 의제, 관점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독자들에게 6개의 단체 이야기를 살펴보는 일은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의제와 공공성의 구성 과정을 한눈에 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 단체들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사회적 가치와 다양한 활동을 ‘공공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제 이들의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인터뷰를 통해 뜨거운 현장의 이야기를 기꺼이 나누어주신 활동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핫핑크돌핀스: 황현진, 오연재 활동가님
- 전쟁없는세상: 이용석 활동가님
- 노동건강연대: 전수경 활동가님
-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나영, 타리 활동가님
-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 김시연, 정찬송 활동가님
- 홈리스행동: 안형진 활동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