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며_최태현
여섯 개 시민단체들, 그 안에 아홉 명의 활동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묻고 싶었다. 국가가 독점하는 공공성이 아닌, 시민단체들이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공공성은 무엇일까. 삶이 파편화되어 가는 시대에 여전히 함께함을 위해 땀 흘리고 있는 이들에게 공공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역사는 나아가듯이, 신자유주의의 시대도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든 아니든, 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가 그리는 대안적 삶의 모습이 필요하다. 여섯 개의 시민단체를 만나 우리가 확인하고자 한 것은 바로 국가 중심의 공공성이 아닌, 현장에 뿌리박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바라본 세계로부터 길어 올려진, 생생한 공공성의 모습이었다.
단체는 여섯이지만, 그들이 건네준 공공성의 의미에는 다양하면서도 유사한 지점들이 있었다. 다양한 목소리는 위에서 알 수 있으므로, 이야기를 매듭짓는 여기서는 유사성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유사하다는 것은 인식의 지평이 좁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만큼 중요하고, 경험적으로 공유되었고, 파괴되면서 동시에 재구성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공공성의 반대로서 파편화와 사유화, 공공성의 내용으로서 안전, 열려 있음, 연결이었다.
공공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공공성의 반대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도 답할 수 있다. 아마도 공공성의 반대말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노동건강연대의 전수경 활동가는 돌봄과 같이 우리가 필요로 하고 기대어야만 하는 노동을 공공성의 핵심 요소로 지적하면서, 공공성의 반대말로 개인화, 연결망 끊기, 그리고 개인의 이기적 동기를 꼽았다. 그리고 이것들이 사회의 주된 동력으로 이해되는 문화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지적했다. 전수경 활동가의 표현대로 ‘모일 수 없는,’ ‘함께 말할 수 없는,’ 그렇게 모든 연결이 끊어져버린 사회에서 애초에 공공성을 기대하지 않는 개인들만이 모여 있다면 그것은 진정 무서운 사회일 것이다.
슬픈 사실은, 이런 현실에서도 어떤 이들은 공공성마저 사유화하려 한다는 점이다. 즉 공적 제도를 통해 확보된 가치를 배타적으로 향유하는 상태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홈리스행동 안형진 활동가는 용산 재개발 사업의 역사에서 이 지점을 짚었다. 그는 공공성의 반대말로 이윤의 사유화와 비용의 사회화를 들었다. 재개발을 위한 부지의 조성은 사회적 비용으로 처리하고, 그 위에 벌어지는 개발의 이익은 개발 주체들에게로 집중되는 도시계획 속의 욕망은 공공성이 사유화되어 부패하면서 뿜어내는 냄새를 연상케 한다. 사회의 개인화는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같은 무시무시한 사회를 만들어내지만, 공공성의 사유화는 절망적인 사회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런 공공성의 축소와 사유화의 흐름 속에서도 파편화를 거부하고 함께 모여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좀 더 안전하고, 좀 더 열려있고, 좀 더 연결된 사회를 그리는 모습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발견했다.
코로나-19가 막 확산되어 가던 2020년 초, 미국 북동부의 부자들이 호수 외딴섬의 별장으로 자발적 “자가격리”를 떠났다는 기사가 떴었다. 이 장면은 안전(safety/security)이라는 누구나 누려야 할 공적 가치가 어떻게 사유화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여러 단체들이 공공성의 의미로 안전을 강조했다.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의 김시연 활동가는 이를 “정상성에서 벗어나더라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정상성의 범주 안에 놓인 이들마저도 호수 속 섬에 별장을 보유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안전함이 달라지는 마당에, 정상성의 범주 바깥에 놓인 탈가정 청소년들에게 과연 인간적 삶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안전망이 존재할 리 없다. 이들이 숨쉬기에 안전한 사회가 조성된다면 그것은 공공성이 만개한 사회일 것이다.
안전에 대한 온의 관점은 현재의 안전뿐 아니라 미래로도 향해있었다. 김시연 활동가와 정찬송 활동가는 청소년들이 “안전하게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강조했다. 청소년, 게다가 탈가정 청소년들에게 주어지는 직업훈련 같은 기회가 “실패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묵시적·관행적 단서조항과 함께 주어진다면 그것을 안전한 기회라고 할 수는 없다. 청소년뿐만이 아니다. 각자도생의 이 사회 모두에게 패자부활전이란 너무도 값비싼 공적 장치이기에 우리는 옆을 돌아볼 수 없는 외줄타기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
홈리스행동의 안형진 활동가는 다른 관점에서 안전을 강조했다. 그가 언급한 공공성의 의미 중 하나는 “삶의 최저선을 높여나가는 것”이었다. 사회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지적했던 인간의 욕구 중 가장 기저의 욕구가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임을 생각할 때, 누구에게나 안전한 삶이 가능한 것이 바로 공공성의 기초임을 잘 보여준다. 홈리스들 역시 정상성에서 벗어났다고 간주되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안전이라는 공적 가치는 그들에게 너무도 희소하다. 마치 고산지대에서 산소가 희박한 공기를 마시듯 이들이 시민으로서 마시는 사회적 공기에는 안전이라는 산소가 부족하다.
전쟁없는세상의 이용석 활동가는 안전이라는 공공성의 테두리를 국민국가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했다. 안전 대신 안보라는 개념이 더 활용되는 국제정치 영역에서 이제 안보는 “단일 국가의 안보만이 아니라 자연재해나 사회적 재난을 포함한 국민들의 안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나아가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알려주었듯 안전 역시 우리의 상호연결성의 변수이다. 한 나라의 경제를 위해 수출된 군수품은 분쟁지역에서 소비되면서 난민을 낳고, 그 난민들은 전 세계에 퍼지며 국민국가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안전은 더 이상 국민국가 내에 머무르는 공공성이 아니다.
핫핑크돌핀스의 황현진 활동가는 안전의 테두리를 인간의 세계를 넘어 생태계 전체로 한 번 더 확장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에게 공공성이란 “생태계 구성원들을 해하지 않는 것” 그리고 “두루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제주 남쪽 앞바다의 제주남방큰돌고래에게 안전하지 않은 세상이란, 그것이 분쟁 때문이든 오염 때문이든, 남획 때문이든, 인간에게도 결코 안전한 세상이 아닐 것이다. 안전은 더 이상 인간계 내에만 머무르는 공공성이 아니다.
공공성에 대한 학술적 정의들 가운데는 “열려 있음”을 핵심으로 보는 정의들이 있다.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앞의 공(公)은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은 보편적이고 “천하”에 펼쳐지는 것이다. 뒤의 공(共)은 함께임을 의미한다. 함께하려면 자신을 열어야 한다. 그래서 공공성은 열려 있음이다. 하지만 철학적 논의만으로는 이 열려 있음의 경험적 실체가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다. 현장의 활동가들은 마치 뜻풀이라도 해주듯이 열려 있음을 다양한 언어로 표현해 주었다.
셰어의 나영 활동가는 열려 있음의 의미를 상당히 직관적이고 정책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선별적이지 않을 것.” 어떤 공공서비스이든 가난을 증명해야 하고 자격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 시대에 현실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공공성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설계될 때부터 이미 편향된 제도가 인정한 사람만이 안전할 수 있고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영 활동가는 “착각”이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셰어의 타리 활동가가 공공성의 역할로 “제도의 외부(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경계를 살피고 넓히는 것”을 지적한 것도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공공성이란 끊임없이 제도의 편향된 지점에서 그 담벼락을 허물어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시민단체들이 창출해 내는 공공성은 이렇게 닫혀 있는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열려 있음의 또 다른 형태를 우리는 핫핑크돌핀스의 황현진 활동가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다. 생태 분야 정책에서 의사결정자인 정부에 가장 접근성이 높은 주체는 바로 기업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기업의 처지에 밝다. 기업 역시 자신들의 처지를 열심히 호소한다. 그러나 자신을 대표(represent) 하지 못하는 많은 인간, 나아가 비인간 주체들이 있다. 핫핑크돌핀스가 제주남방큰돌고래의 권익을 대변(represent)하듯이, 누구나 공적 공간이라는 정치적 가능성의 장에 접근가능하도록 만드는 일 역시 공공성을 창출하는 일이다.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의 김시연 활동가는 열려 있음으로의 공공성이 개인 차원에서 경험되는 장면으로서 선택지를 말했다. 즉 공공성이 가득한 세상은 “안전한 선택지가 다양한 세상”이다. 탈가정 청소년의 앞에 놓인 선택지가 강압적 시설, 찜질방, 상가 계단, 그리고 가해자가 여전히 머물고 있는 어떤 공간이라면 그의 삶에 진정 선택지가 열려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안전한 선택지의 제한은 위에서 셰어의 나영 활동가의 말처럼 이미 선별적 사회에서 예정되어 있다. 닫힌 문들 앞에 공공성은 없다.
공공성에 대한 이야기는 한결같이 우리가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우고 있었다. 전쟁없는세상의 운동 메시지는 분명하게도 우리가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우리는 동료 생명을 죽이기보다는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 누가 옳고 누구는 잘못되었기에 누가 누구를 이겨도 되는 세상이 아니라, 전쟁 난민들에서 보듯이 누군가의 욕심이 누군가의 아픔이 되어 결국 모두의 역사적 짐이 되는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깔끔한 도시를 꿈꾸며 공공장소에서 홈리스들을 몰아낼 때 세계가 둘로 쪼개지는 광경의 윤리적 함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꿈을 꾸라며 웃으며 인사하는 그 밤이 어떤 청소년들에게는 상가의 계단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밤임을 알 때, 그것이 남의 일이 될 수는 없다. 제주남방큰돌고래가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바다의 존재를 왜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지, 그 바다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가능성을 얻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교육과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과 선택과 삶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외면해 왔을 뿐이다.
그렇게 현장에서 건져 올린 공공성이란 이런 것이었다.
우리와 연결된 어떤 존재들의 보다 안전한 삶을 위해 닫혀 있는 세계를 열어젖히는 것. 누구도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
우리는 이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계속됨이다. 공공성이란 모두의 삶이 계속됨을, 계속될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누군가의 삶이 계속되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삶이 멈춰야 한다면 그것은 결코 공적인 행동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삶이 계속되는 것이 다른 누군가의 삶이 계속되는 것을 돕는다면 그것이 공적인 삶일 것이다.
첫 번째 만남이 마무리되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 역시 계속되기를 꿈꿔본다. 만나서 전해야 할 더 많은 목소리들이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권리에 대해, 당사자에 대해, 상실에 대해, 공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씩 이 세계를 회복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