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푸리 May 19. 2020

내 스마트폰에 아이돌이 산다

사람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2019년 5월의 나는 다시 프듀의 노예가 되었다. (하아...) 여기서 프듀는 <프로듀스 X 101>, 보통 ‘프엑’이라고 하는 프듀의 4번째 시리즈이자 마지막 편이다. 아이돌판을 간잽하던 시기를 지내며 나름 자신이 있었다. 누구도 원픽하지 않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초연할 자신이.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프듀로 아이돌 덕질을 시작한 나에게 프듀만큼 자극적인 아이돌 프로그램은 없었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프듀에만 반응하는 몸이 된 것이다.


프엑은 이전 시즌과 사뭇 달랐다. 다만 그것이 제작진이 야심 차게 준비한 ‘X’ 때문은 아니었다. X라는 예외를 통해 극적 긴장감(이라고 쓰고 악마의 편집이라고 읽는)을 높일 요량이었던 듯하지만, 기대했던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이번 시즌의 특이점은 연습생들의 실력이 터무니없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연습생 기간이 짧고 나이 어린 참가자가 대거 투입되면서 지난 시즌들에 비해 실력이 하향 평준화되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돌 지망생에게 프듀는 너무나 가혹한 프로그램이었다. 안타깝고 답답한 상황이 벌어지는 와중에 어린 친구들을 다독이고 어떻게 해서든 무대를 하드 캐리 한 것은 아이돌로 데뷔했던 몇몇 경력직이었다. 경력직들은 프엑 중반 이후 다크호스로 급부상하며 그중 3명이 재데뷔하는 데 성공한다.


그 경력직 가운데 한승우가 있었다. 빅톤(VICTON)이라는 보이 그룹으로 데뷔했으나 별반 빛을 보지 못하고 같은 팀의 멤버 한 명과 함께 프듀의 막차를 탄 중고 연습생. 한승우에 대해 알고 있던 건 그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그저 호기심에 빅톤을 검색해보았고 유튜브에서 고대의 유물을 발견하듯 좀 오래된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나와 일곱 남자들의 이야기>, 일명 <미칠남(Me7Nam)>. 2016년 제작된 영상 속에는 아이돌 데뷔를 막 앞둔 풋풋한 23살의 한승우가 있었다.


<미칠남> 시절의 신인 아이돌 한승우




아이돌은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이다. 노래가 좋아서 춤을 잘 춰서 무대를 동경해서 아이돌을 꿈꾸고, 숱한 오디션과 끝날 것 같지 않은 연습생 기간을 지나 드디어 데뷔라는 꿈을 이루게 되기까지의 문학적 서사는 프듀의 주요 셀링 포인트였다. 아이돌에게 서사는 팬을 유입시키고 아이돌과 팬의 유대감을 높이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프듀는 아이돌의 데뷔 결정을 ‘국민 프로듀서’라는 이름의 시청자에게 돌림으로써 이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썼고 알다시피 대 성공을 거두었다. 서바이벌의 외피를 쓴 아이돌 데뷔 홍보 전략은 이미 여러 소속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어느 정도 검증된 마케팅 수단이다.  <식스틴>의 트와이스, <WIN: Who is Next>의 위너, <No mercy>의 몬스타엑스 등 프듀 이전에도 아이돌 서바이벌은 성행했다.


아이돌 연습생의 꿈을 향한 ‘성장’과 데뷔의 문턱에서 좌절하게 되는 ‘불행’을 동시에 담고 있는 서바이벌이 아이돌 홍보전략의 매운맛이라면, 순한 맛 버전의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있다. 데뷔를 앞둔 아이돌의 연습실과 숙소 생활을 통해 멤버 개개인의 실력과 매력을 어필하는 일상 리얼리티이다. 2016년 11월 9일 데뷔한 7인조 보이그룹 빅톤의 데뷔 과정을 담은 10회짜리 리얼리티 프로그램 <미칠남>도 그중 하나이다. <미칠남>은 투명 안경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소녀’가 아이돌 연습생의 숙소에 들어가서 그들의 일상을 엿보는 관찰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본적인 상황과 대사는 주어지겠지만 대부분 애드리브로 채워지는 영상을 통해 멤버의 각 캐릭터와 팀의 정체성을 홍보하는 방식이다.


<미칠남> 속 한승우는 프엑에서 본 한승우와 같은 듯 달랐다. 팀의 리더이자 올라운더 아이돌이고 명언 제조기의 다정한데 이상한 형이면서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한 열정맨 한승우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제때 뜨지 못한 아이돌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빅톤의 실력이나 아이돌로서의 매력은 충분해 보였다. 나의 음원 플레이리스트는 빅톤의 모든 앨범으로 채워졌다. 더욱이 처음엔 유치한 농담처럼 들렸던 ‘가족’이라는 팀의 정체성에 점점 스며들었다. 프엑에서 한승우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자꾸 허탈한 마음이 밀려왔다. 과몰입 상태에 빠진 것이다.




K팝의 글로벌 성공 신화에 관해 갖가지 설왕설래가 있는데, 그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공유되는 풍부한 영상 콘텐츠이다. 유니크한 뮤직비디오와 세련된 무대 영상뿐 아니라 아이돌의 개성과 매력을 집약한 각종 영상 콘텐츠를 스마트폰에서 간편하게 재생할 수 있고 입덕은 국가와 시간을 초월하게 되었다. 


아이돌 영상 콘텐츠를 유통하는 양대 산맥은 구글이 운영하는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youtube)와 네이버의 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브이 라이브(V Live)이다. 방송사가 가지고 있던 독점적 헤게모니를 야금야금 잠식하던 유튜브는 2010년 중반 이후 가장 막강한 파급력의 영상 매체로 우뚝 선다. 원더케이(1theK), 딩고 뮤직(dingo music) 등 K팝 전문 유튜브 채널이 생겼고, 방송국도 앞다투어 아이돌 전용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막 데뷔를 했거나 새로 앨범을 발매한 아이돌은 여러 웹 채널에서 10~20분 분량의 영상을 촬영하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주간아이돌>처럼 덕후를 위한 예능 방송이 있긴 하지만, 웹으로 넘어오면서 한층 더 덕후 취향 맞춤 콘텐츠로 재편되었다. 게임, 코스튬, 먹방, 여행 등 기존 예능 형식에 덕후끼리 공유하던 ‘모에화’, ‘갭 차이’, 멤버 간의 ‘관계성’을 노골적으로 끼얹었다. 춤이나 노래 영상도 스마트폰에서 보기 좋게 ‘세로 캠’과 ‘얼빡 샷’으로 덕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전문 제작사의 웹 콘텐츠가 아이돌의 각 잡고 한껏 꾸민 모습을 공들여 담아낸다면, 브이 라이브에선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아이돌을 볼 수 있다. 연습실이나 숙소, 이동 중이나 대기 시간에 최애가 어떤 모습으로 뭘 하고 있을까 라는 덕후의 원초적인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덕질 맞춤 앱이다. 정해진 포맷이나 대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알 수 없는 브이 라이브는 아이돌 자아를 판별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보통 1시간가량 진행되는 방송을 통해 평소의 모습과 말투,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최애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도 있고, 자칫 ‘캐붕’(캐릭터 붕괴)의 순간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도 있다. 라이브 방송은 스케줄로 분류되지 않는, 강제성이 비교적 적은 활동이기에 타 아이돌 또는 팀 내에서도 멤버 별로 편차가 있다. 브이 라이브를 많이 하는 아이돌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후할 수밖에 없다. 즉, 백 번 사랑한다고 말하느니 한 번 브이 앱을 켜는 것이 낫다. 




<미칠남>을 보고 난 후 빅톤의 다른 영상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계속해서 빅톤 관련 영상을 추천해주었다. <미칠남>의 후속인 또 다른 리얼리티 몇 편을 비롯해 각종 음악방송, 예능 프로그램, 인터뷰, 비하인드 영상 등이 유튜브에 다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이돌 덕질의 경험과 지식이 일천하긴 해도 이게 얼마나 대단한 수준이란 것 정도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신인 남자 아이돌이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그리고 이는 1년 10개월 만에 완전체가 되어 발표한 6집 미니앨범 활동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한 달 여의 기간 동안 하루에도 수 차례씩 각종 떡밥이 우수수 쏟아졌다. 보통 떡밥이 뜨면 최소 2회 이상은 봐야 하고 어떤 부분은 반복 재생하면서 앓다가 트위터의 주접글도 달려야 하는데, 하나를 채 소화하기도 전에 또 다른 떡밥이 떴다. 주는 데로 다 받아먹다가 체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빅톤 미니 6집 활동은 3월 29일에 종료했지만 이후로도 떡밥이 끊이지 않았다.  <출처> 트위터 빅톤 스케줄봇


특히 빅톤은 브이 라이브에 진심인 아이돌이었다. 활동기에는 물론 공백기에도 시시때때로 라이브 방송을 켜서 자신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팬들과 공유했다. 과거의 브이 라이브 영상은 도저히 다 볼 엄두가 안 나서 팬들이 편집한 영상을 겨우 보는 정도였다. 팬들과 소통하고 추억을 남기는 일은 빅톤의 세계관과도 밀접하게 이어진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빅톤이 구축한 세계에는 오로지 아이돌(빅톤)과 팬덤(앨리스)만이 존재한다. ‘미칠남’의 투명 소녀가 곧 앨리스인 것이다.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항상 가까이서 지켜봐 주던 투명 소녀처럼, 빅톤 곁에는 앨리스가 있다.


빅톤의 세계관은 고스란히 음악의 모티프로 작동한다. 모든 노랫말은 나(빅톤)의 이 마음을 너(앨리스)에게 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관계 설정이 좀 유별난 데가 있다. 대개의 남돌이 분출하는 자신만만함이나 허세, 비대한 자의식이 빅톤에겐 없다. 오히려 ‘니가 날보고 좋다는 게’ ‘말도 안돼’는 일이다. ‘늘 혼자였던 내게 니가 필요’하기에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어쩔 수 없이 찾아온 이별의 순간조차 ‘아직 너에게 못해준 게 너무 많아’서 ‘다시 돌아오길 바라’고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땐 너를 놓치지 않을게’라 말한다. 음색 맛집이라고 할 정도로 개성 강한 보컬과 귀에 딱딱 때려 넣는 랩핑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빅톤의 음악은 큰 의미에서 전부 팬송으로 봐도 무방하다.




빅톤의 아이돌로서의 전략은 특별하진 않다.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 아이돌 시장에서 저 높은 곳의 '스타'가 친근한 '오빠'로 내려와 세세한 일상을 공유하고 밀착된 관계를 맺으며 충성 팬덤을 다지는 생존 전략은 이미 수많은 아이돌을 거쳐왔다. 그러나 여러 전례를 통해 주지하다시피, 이 전략은 끝까지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엄청난 성실함과 끈기, 자기 관리를 요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혹과 인기에 취하기 쉬운 K 남돌의 습성상, 연차가 더해질수록 성공 확률은 점점 더 희박해진다.


남돌을 덕질하는 건 그래서 너무 위험한 도박이고 불리한 게임이기에 이 판에 다시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덕통 사고는 언제나 나의 의지를 배반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5년차 아이돌 빅톤은 내 기준에선 아직까지 너무 잘하고 있다. 아이돌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리하여 현재 내 본진은 여기다.


빅토니들아, 다음 앨범 타이틀은 청량 상큼으로 부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업으로서의 아이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