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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푸리 May 11. 2020

직업으로서의 아이돌

일본의 연예계에서 1990년대 수입된 ‘아이돌’이란 분야는 생소했고 정체가 불분명했다. 기존의 댄스가수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쏭달쏭했다. 그 이전에도 열성적이고 광적인 팬은 있었고 10대에 데뷔하는 것도 아주 드물지는 않았다. 게다가 ‘우상’이란 뜻의 ‘아이돌’이 과연 직업일 수 있을까 라는 근본적인 의문도 들었다.


몇 년간 아이돌을 파면서 느낀 것은 아이돌만큼 연예 산업에 있어 잘 해내기 어려운 직업도 없다는 점이다. 가수, 댄서, 운동선수, 배우로서의 역량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 가운데 유독 출중한 분야가 있으면 그에 맞춰서 팀 내에 역할을 분담할 수는 있다. 대부분의 아이돌이 팀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지면 아이돌로서의 정체성은 의심받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수입된 아이돌을 이제 일본에 역수출하는 상황이다.




무대 위에 오르는 가수이니 춤과 노래를 잘해야 하는 건 기본 중 기본이다. 실력은 아이돌로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어떤 풍파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아이돌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회사가 생기고 연습생을 뽑아 춤과 노래를 심층 트레이닝한 후 데뷔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바이블처럼 전해지며 ‘라이브로 노래하면서 춤추는 실력파 아이돌’이란 수식어가 생겼다. 칼군무와 같이 퍼포먼스에 대한 기대감은 한층 높아졌으며 직접 자작곡을 하는 아이돌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해가 갈수록 어리고 실력 좋은 아이돌이 나오는 마당에 무대에서 병풍 취급받는 아이돌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다.


춤과 노래는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연습생 시절을 거치며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할 수 있다. 단 여기에는 운동선수 같은 규칙적인 연습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 중에는 다이어트도 포함된다. 외모 관리는 아이돌의 숙명과도 같다. 종종 나이 어린 아이돌이 무리하게 다이어트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운동선수를 생각해보자.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중고등학생 때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는 경우가 흔하다. 계체량을 통과하기 위해 온 몸의 마지막 수분까지 말려버리거나, 탈진할 때까지 훈련을 반복하기도 한다. 패션모델의 체중 관리를 떠올려봐도 아이돌만 유독 심하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날렵한 몸은 춤 선을 돋보이게 하고 날카로운 턱선은 무대 위의 외모를 살려준다.


아이돌의 외모 중에서도 얼굴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덕후도 있다. 아이돌 덕질의 기쁨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잘생기고 예쁜 얼굴에 대한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주관적이고 지극히 사적이다. 시대에 따라 변하고 국가별 미인의 기준도 다 다르다. 잘생김과 예쁨에 대한 객관적인 지표가 있다면 논리적인 근거를 대며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기껏해야 우기는 게 전부라는 건 사실 그런 건 없다는 반증이다. 더욱이 이미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의 객관성이란 어불성설이다. 실물 미인이라는 것도 있다. 카메라 렌즈가 담아내지 못하는 분위기나 전체적인 조화, 매력이나 끼가 있다는 의미다. 반면, 한번 만들어진 이미지와 인기는 때때로 실제 얼굴보다 더 잘생겨 보이게 하는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강동원이 그렇게까지 잘 생긴 줄 모르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실, 아이돌의 직업 특성 중 성취가 가장 어려운 것은 노래도 춤도 비주얼도 아니다. 바로 연기이다. 연기는 무대 위에서와 무대 아래서로 나뉜다. 4분 내외의 곡을 해석해 그에 걸맞은 표정과 눈빛을 무대에서 선보여야 하는 아이돌에게 연기는 필수이다. 아이돌 중 배우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무대 퍼포먼스를 통해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대 아래에서의 연기는 회사에서 부여한, 혹은 자신이 만든 캐릭터다. 이를 기반으로 아이돌로서의 ‘나’를 연기해야 한다. 숙소에서 한 발짝 떼는 순간부터 연기는 시작된다. 멤버들과의 관계, 팬들을 대하는 모습, 방송 태도 등에서 나의 캐릭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경우는 숙소에서 연기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는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아이돌로서의 나를 구축해나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성장하는 아이돌 연습생인 나’를 전시하는 프듀 역시 대표적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게 상당히 미묘한 데가 있다. 한 사람에게 있는 다양한 내면 중 아이돌로서 적합한 것만 골라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자신에게 없는 내면을 억지로 만들어내야 할 때도 있다. 거의 100%의 자신을 드러내도 상관없는 경우는 직업 만족도가 높겠지만, 억누르거나 감춰야 하는 내면이 많다면 스스로 캐릭터 붕괴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거나 구설수에 오르고 최악의 경우엔 사건, 사고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아이돌 자아가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선 좀 회의적이다. 이거야 말로 타고나야지 잘할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아이돌의 라이브 방송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이돌답지 않은 말투와 행동은 팬들에게 적잖은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곤 한다. 자신에게 아이돌 자아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본인은 몰론 팬들을 위해서라도 하루속히 다른 직업을 고민해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다.




아이돌 자아는 아이돌에게 왜 빠져드는 가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한다. 아이돌은 어떤 세계가 있다고 진짜 같이 꾸며 내는 직업이다. 그게 환상 속 동화의 나라든 수억 광년 떨어진 외계 행성이든 상관없다. 성장, 당당함, 청량과 같은 콘셉트일 수도 있다. 아이돌은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팬을 초대한다. 이를 아이돌의 세계관이라 한다. 무해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멋있고 아름다운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계. 그 안에서 아이돌과 팬은 그들만의 역사를 써내려 간다. 실제 하지 않는 이 세계가 얼마나 진짜처럼 느껴지냐는 순전히 아이돌 자아에 달려 있다. 반대로, 자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아이돌은 종종 그 세계를 파괴하는 빌런이 되기도 한다. 팬들과의 소통은 아이돌이 세계관을 주입시키고 공고히 하는 과정이다. 팬 사인회에서 다소 민망할 수 있는 코스튬이나 애교도 기꺼이 하고, 주기적으로 공식 카페와 SNS에 셀카나 글을 올리고, 때때로 깜짝 라이브 방송을 하는 등의 팬 서비스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다. 다른 연예 산업 종사자에게는 없는 아이돌의 핵심 자산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이야기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듯 이상은 현실과 많은 차이가 있다. 이중 어느 하나가 없다고 아이돌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걸 갖췄어도 안 뜨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처음부터 빵 떠버려도 힘들고, 뭘 어떻게 해도 안 될 때는 더 힘들다. 게다가 아이돌의 수명은 정말이지 짧다. 아주 길게 봐야 10년이고 대개는 5년을 넘기기도 힘들다. 꿈과 희망 같은 파스텔톤으로 포장된 세계의 이면은 여러모로 극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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