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연애하는 방식이 다 다르듯, 팬질에도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즉 '빠순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다.
고전적인 의미의 팬을 ‘순덕’이라 한다. 아이돌 또는 아이돌 그룹에게 온전히 지지와 사랑만 쏟아붓는 타입이다. 순덕에게 ‘노동’과 ‘현질’은 필수이다. 공식 카페 유료회원에 가입하고 응원봉 같은 각종 공식 굿즈를 구입하는 건 기본. 앨범 초동 판매량을 높이고 최애의 포카를 모으고 팬 사인회에 당첨되기 위해 보통 수십 장에서 많게는 수백 장의 앨범을 구매한다. 광고나 화보를 찍으면 제품과 잡지도 사야 한다. 공식 스케줄을 공유하고 출연 방송이나 웹 콘텐츠를 챙겨보며 꼬박꼬박 '좋아요'를 누른다. 음악방송 사녹(사전녹화)이나 공개방송 방청을 위해 새벽부터 대기를 타기도 한다. 음악방송 순위와 연관된 음원 스밍(스트리밍)을 조직적으로 진행하고 수시로 참여를 독려한다. 생일, 컴백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트위터 해시태그 총공을 해서 실트 순위를 높이고, 연관 검색어가 영 좋지 못하면 대체어를 지속적으로 올려서 연검 정화에 나선다. 앨범 활동기간에 순덕은 아이돌만큼이나 바쁘다.
아이돌이 앨범도 잘 되고 방송도 많이 나오고 인기가 좋을 때는 이보다 더 행복한 덕질이 없다. 하지만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거나 인기 하락세에선 가장 안타까운 타입이다. 문제를 보고도 모른 척하고 아이돌이 변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발을 빼야 할 시기를 놓쳐버린 순덕은 그 바닥의 액받이 무녀가 되어서 여기저기 실드 치고 싸우러 다니기 바쁘다. 그쯤 되면 덕질을 하는 건지 ‘키배(키보드 배틀)’를 뜨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이돌을 자신보다 더 큰 존재로 여기거나 동일시하는 ‘자아 의탁’에 빠진 순덕은 종종 광신도와 구별이 어렵다.
악질 개인 팬을 뜻하는 ‘악개’는 그룹과 상관 없이 특정 아이돌만 덕질하는 경우이다. 팀워크나 세계관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최애만 잘되길 원한다. 악개는 최애가 솔로로 활동하기 전까지 행복할 수가 없다. 인기 멤버인 경우에는 그나마 카메라에도 많이 비추고 개인 활동도 하면서 그럭저럭 연명할 수가 있는데, 비 인기 멤버라면 매번 화면 끄트머리에 걸린 저화질의 최애를 보면서 울화통을 터트리게 된다.
악개는 음원이나 센터 안무의 분량에 집착한다. 최애의 실력은 아랑곳없이 무조건 가장 많은 파트를 가져가길 원한다. 한정된 자원을 여러 명이 나눠야 하는 K팝 아이돌의 구조상, 악개는 필연적으로 그룹의 다른 멤버를 음해하고 배척한다. ‘n인 지지’라며 특정 멤버 몇몇만 품는 경우도 있는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최애의 밑밥으로 활용할 때가 많다. 그룹 멤버 전체를 좋아하는 ‘올팬’이 보기엔 가장 골치 아픈 타입이다. 악개가 일으키는 분탕질은 종종 팬덤 내 싸움으로 번진다. 그리고 이 싸움은 트위터라는 광장에 전시되는 이상 타 팬덤의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까빠’는 복수의 아이돌을 좋아하거나 간잽하는 팬에게 많이 나타나는 유형이다. 까면서 좋아한다는 의미로, 잘할 때만 예뻐하고 성에 안 찰 때는 가차 없다. 실력이 떨어진다거나 외모 관리를 제대로 안 하거나 셀카나 브이 라이브를 예전만큼 안 올리면 매몰차게 지적하고 질책한다. 앨범 공구나 음원 스밍, 연검 정화에도 잘 참여하지 않고 대체로 가성비 덕질을 지향한다. 순덕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순덕 입장에선 덕질의 기본도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까빠는 순덕의 맹목적인 애정이 아이돌을 망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 잘 되라는 뜻에서 회초리를 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까빠는 아이돌 덕질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K팝 고인물이 흔히 우회하는 노선이기도 하다. 즉, 까빠도 처음에는 순덕이었다. n년차를 거치며 이리저리 데인 상처가 많다 보니 아예 한 발 빼놓고 덕질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돌이 때가 덜 타고 눈빛이 초롱초롱한 1~2년 차 때까지만 좋아하고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재빨리 다른 신인 아이돌로 갈아타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간혹 까빠 중에는 ‘내 새끼도 패는 쿨한 나’에 심취한 ‘관종’도 존재한다. 그들에겐 무관심과 트위터 차단만이 답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악개도 까빠도 순덕도 아니다. 순덕 입장에선 최애한테 1도 도움 안 되는 까빠라 할 것 같고, 까빠는 뭣도 모르는 ‘쪼랩’의 순덕으로 볼 것 같고, 악개라 하기엔 타 아이돌을 욕설이나 비방을 할 만큼의 열정도 관심도 없다. 모르긴 해도, K팝 덕후의 상당수는 나와 같은 처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순덕과 악개와 까빠가 워낙 목소리가 크다 보니 그들의 성향이 과대 대표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과도한 아드레날린의 분비 없인 입덕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열병을 앓는 시기가 존재하고, 저마다 이불 킥 하고 싶은 흑역사를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혹은 여러 아이돌을 거치면서 점차 일상과 덕질의 균형을 맞춰나가는 기술을 터득할 거라고 본다. 덕질을 하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넘지 말아야 할 선과 방향이 정해졌고 그 안에서 나를 잃지 않고 덕질을 했다고 생각한다. 뭐든 적당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덕질도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