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따뜻해지면 꼭 창경궁의 대온실을 가보자
김금희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어떻게 이런 표현을 썼지 싶을 만큼 반짝반짝한 문장들이 많아서 항상 탄복하게 된다. 그녀의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를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이번 장편 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으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수집하고 싶은 문장이 많았다.
“대화하는 동안 우리는 마당 장대에 널려 건조되고 있
는 가오리를 올려다보았다. 연처럼 꼬리가 긴 그 생선은 밑에서 쳐다보면 눈코입이 늘 웃는 듯 보여서 문제였다. 마주하고 있으면 많은 것들이 시시해졌다. 바람이 한번 불고 지난 뒤의 모래사장처럼 마음의 표면이 평평하게 균형이 맞춰지는 게 느껴졌다. 고작 그 시시함으로.”
“기억을 해내기 위해 팔짱을 끼고 책상에 기대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머리를 떨구면 생각이라는 것이 진득한 꿀처럼 떨어져내리는 듯하니까.”
“그런다고 바다 소금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강화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코트를 입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추웠고 그건 몸을 덥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안정적으로 눌러줄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나 같은 건 누군가 놓친 유원지 풍선처럼 날아가버려도 그만일 테니까.”
“한탄하는 딩 아주머니 얼굴을 할머니는 별말 없이 멀거니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듯이. 그때 나는 노인들의 눈에는 아주 진득한 감정이 들어 있다고 느꼈다. 단일하고 명징한 진심 같은 것.”
“산아는 뭔가를 너무 좋아하면 역시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불행해진다고. 나는 산아가 쓴 불행,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신경 쓰였다.”
“쏜물, 강화말로 찬물을 가리키는 그 단어를 듣자 절교
하자며 싸웠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한테도 그 말한 적이 있다고 상기시키자 은혜는 그랬냐? 무심히 되물었다. 내가 섬으로 돌아간 뒤 은혜는 우리 사이에 연락이 끊긴 때가 없는 듯 굴었다. 내색하지 않고 묻거나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은혜에게서 안전함을 느꼈다. 아주 알맞은 온도의 이해였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새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옮기다보니 너무 길어져버렸지만, 그만큼 이번 소설에서는 보석같은 부분들이 참 많았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주인공 영두가 바위 건축사 사무소와 일하며 창경궁의 대온실을 수리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 영두의 현재와 창덕궁 담장 근처 원서동 낙원하숙에 얹혀 살던 15살 영두의 과거가 교차된다. 거기에 창경궁 대온실을 세운 일본인 후쿠다의 발자취가 더해지고, 대온실 아래 묻혀있는 정체 모를 뼈에 대한 미스터리까지. 소설은 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아주 세심하게 교차해나가며 결국 모든 줄기를 하나의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게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일생 동안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역사 위에 놓이게 되는지.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한 개인의 삶일 지라도, 그와 관계하는 주변 인물들의 역사와 그들이 흘러온 세월의 무게가 인생을 단단하게 떠받치고 있음을. 김금희 작가는 허구와 실제를 교묘하게 섞은 환상적인 이 이야기를 통해 알려주었다. 대온실을 수리하는 일은 사실 무너져버린 어떤 삶의 부분을 중수하고 중창하고 재건하는 일임을.
날이 따뜻해지면 지금까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창경궁 대온실을 꼭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