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이라도 누군가의 삶을 빼앗아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면
공릉으로 이사온 이후, 집에서 5분만 걸으면 나오는 ’경춘선 힐링쉼터‘를 가는 것이 일종의 주말 루틴이 되었다. 아메리카노와 믹스 커피가 단돈 천원이고, 신간에서부터 고전까지 거의 800권에 육박하는 책들을 공짜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몰입감을 안겨주었던 정해연 작가의 ‘홍학의 자리‘, 노년과 우아한 죽음에 대해 통찰하게 해준 비류잉의 ‘단식 존엄사’ 역시 이 곳에서 읽은 책들이다. 두 권 모두 다른 의미로 아주 재미있고 훌륭하니 꼭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길지 않은 운영 시간과 책 대여가 불가하다는 점이 아쉬운데-일하시는 어머님들이 모두 무급의 자원봉사자이시기 때문에, 사실 운영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아주 감사하지만-이러한 점 때문에 아주 두껍거나 어려운 책을 시작하기가 어렵다. 오늘 마친 정한아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 역시 짧은 소설임에도 몇 주 전 방문했을 때 전반부를 읽고 오늘 후반부를 나눠 읽어야했다. 지난 번 책을 덮고 나와야하는 순간이 어찌나 섭섭했던지 이북으로 읽을 수 있는지 몇 번이나 찾아본 기억이 있다. -결국 반밖에 남지 않은 소설을 꽤 비싸게 구매해야해서 참았지만-그만큼 흥미롭고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다.
전반부를 읽으면서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 같다는 기시감이 들었는데, 실제로 보진 않았지만 유튜브 숏츠로 이미 다 봐버린 것 같은 쿠팡플레이 드라마 ‘안나’의 원작이었더랬다. 마알간 수지의 얼굴과 미치도록 고급스러운 정은채의 합이 의외로 좋아서 똑같은 숏츠를 몇번이나 보다보니 ‘유미’라는 주인공 이름이 뇌리에 박혔었나보다. ‘친밀한 이방인’은 유미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소설은 아니지만, 분명 소설의 주인공은 이유미다.
‘친밀한 이방인’의 화자 ‘나’는 소설가다. 그녀는 어느 날 신문에서 자신의 아주 오래 전 습작 소설의 일부분이 실린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을 신문에 낸 사람은 ‘진’이라는 여자로 사라진 남편을 찾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진의 남편이 ‘나’의 소설을 본인이 쓴 것처럼 행동해왔으며, 이 거짓말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화자는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사라진 이 남편의 행방을 뒤쫓게 된다. 심지어 그는 그가 아니라 ‘그녀’기까지 했다.
소설은 화자의 이야기와 그녀 ‘이유미’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한 사람의 이름이 ’이유미‘, ’이안나‘, ’이유상‘, 그리고 ’엠‘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좇다 보면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마치 롤러코스터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 사람의 인생조차 이렇게 사상누각 위에 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기도 하다.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다른 이의 인생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빛나는 누군가의 삶을 훔치고 싶은 욕망, 누군가의 인생을 탐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리-갑자기 박진영의 ’니가 사는 그 집‘의 가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정한아 작가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나는 늘 거짓말쟁이와 사기꾼들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썼다. 맞다. 우리 역시 리플리의 맷 데이먼에게,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디카프리오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는가. 심지어 화차의 김민희에게도.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저들이 품고 있는 음험함, 스릴, 그리고 매력에 쉽게 마음을 뺏기곤 한다.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우리는 안다. 분명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단단히 발 붙이고 서 있을 수 있는 보통의 땅으로, 보통의 삶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