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모르겠고 일단 하루라도 잘 살아보려는 불안한 20대의 다짐
써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뒤덮고 있다.
책을 취미로 읽게 된 지는 5년이 지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이 오랜 마음이 쌓이고 쌓이면서 써야 된다는 생각이 폭발했다. 무엇보다 이 생각이 나를 뒤덮을 지경이 된 건 내가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직장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올해 1월 말 취업에 성공하여 9개월째 퍼포먼스 마케터로 살고 있다. 퍼포먼스 마케터는 광고 성과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데이터에 기반해 의사결정을 하며 광고 성과를 개선시킨다. 숫자와 논리성에 밝아야 하는 업무인데 사실 나는 숫자와 같은 정량적인 것에 매우 약할뿐더러 흥미를 느끼지도 못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퍼포먼스 마케터를 택한 이유는 데이터 능력을 갖추어 시대적 수요를 충족하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이고 배움을 좋아하는 성정을 갖고 있으니 숫자와 친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하루의 8시간 이상을 적성과 흥미 모두 맞지 않는 일에 쏟는 것이 버거웠다. 업무와 인간관계에 눈치껏 처신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서투른 업무 처리에 마음이 무거웠고 퇴근 이후에도 온전히 쉬지 못했다. 몸이 쉬고 있더라도 마음이 항상 불안했다. 이 상태로 8개월의 시간을 견디고 나니 비로소 일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출근에 대한 두려움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허함은 나아지지 않았다. 평일 대부분의 시간을 디지털 광고를 준비하고 성과를 분석하는 일에 쓰는 것이 답답했다. 나 자신이 자꾸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이런 나를 내버려 둘 수 없어서 펜을 들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이 부러워서 일단은 읽고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지금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니까.
[소설가의 일]에서 김연수 작가는 등단을 하기 전에, 등단을 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착각해 온 것을 밝힌다. 그것은 바로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은 어떻게 쓰는가를 고민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는가를 더 고민했다.
이십대로 돌아간다면 먼저 이런, 저런 모습의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고 훈수를 두던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고 한다. 몸도 약하고 수줍음도 많아서 소설가가 되는 데는 자격미달이지만 그래도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플롯의 최소 단위인 액션 때문이라고.
모든 플롯은 어떤 행동/액션에서 시작한다. 이야기 작법에서 행동은 이렇게 정의된다. 주인공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뭔가를 할 때 일어나는 것. 모든 게 갖춰진 사람들은 행동할 필요가 없다. 원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뭔가를 원할 때, 우리가 원하는 그것은 바로 우리 손에 들어올까? 절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은 행동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좌절을 곰곰이 생각한 후 다시 행동한다.
작법뿐만 아니라 이 행동의 원리가 소설을 쓰는 데도 적용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면 먼저 쓰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다음은 자신이 쓴 글을 읽고 감정적인 좌절을 겪는다. 그리곤 곰곰이 생각한다. 글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써야 할까? 그렇게 해서 글을 다시 쓴다. 주인공이 '행동한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의 과정을 밟는 것처럼 쓰는 사람 역시 '쓴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쓴다'를 반복한다. 그렇게 소설가는 소설 쓰기의 절정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먼저 소설가가 되라고 말한다면 순서가 잘못됐다. 플롯의 시작점이 행동인 것처럼 쓰는 사람은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 김연수 작가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뭔가를 쓰고 좌절하고 다시 쓰고 또 좌절하고 그럼에도 다시 쓰는 그 과정을 반복하다가 죽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 줄 아는 사람은 못되었지만 오늘 한 줌의 글을 써내려 가면서 작가의 삶을 시작해 본다. (이제 좌절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다시 쓰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혼란스러운 20대의 끝자락에 서서 쓰는 행위를 함으로써 오늘의 나를 달래 본다. 퍼포먼스 마케팅이라는 일을 지속할 것인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지만 글을 통해 오늘에 온전히 집중한 것만으로 마음이 족하다. 인생 전체를 설계하는 법은 아직 모르겠지만 주어진 하루를 잘 살아내는 법은 알 것만 같다. 아무리 피곤해도 매일 최소 한 줄의 글이라도 써야지. 내일이라는 하루를, 모레라는 하루를 보다 나답게 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