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을 해야 알지. 좋지 않은 대물림.
몇 달 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시골에서 뵈었을 때.
나의 빠른 걸음으로 1~2분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사실, 차를 타고 이동하려고 예상을 했다가 그것이 갑자기 틀어져서 갑작스러운 걸음이긴 했는데.
그 짧은 거리를 할머니는 힘들어하셨고,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시기도 하셨다. 외할머니의 속도에 맞추어서 부축하고 최대한 느리게 걸어서 도착했을 때 엄마가 그러신다.
"어떻게, 보행보조기를 안 가지고 그냥 오셨어요?"
아차 싶었다.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했다. 예전에 그것을 가지고 다니시는 것도 보았는데 그땐 그래도 조금 더 먼 거리였는데. 이제는 이 정도 거리도 보조기 없이는 힘이 드신 것이구나. 할머니의 시간은 내가 상상도 못 할 속도로 흘러갔나 보다.
그때가 나에게 살아계신 할머니의 마지막이었을 거다. 돌아가시고 시간이 지났는데도 문득문득 나는 그때의 일이 기억난다. 나는 왜 할머니의 보행보조기를 못 챙겨 드렸을까.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늘 '배려해야 한다!'라고 외치시는 내 아버지는 정작 그 어느 누구도 '배려'하지 못하시고, 그 모습이 늘 불만이었는데. 사실 나도 똑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은 늘 여기저기로 뻗어나간다.
할머니는 왜, 어려운 사람도 아니고 손녀에게 '나는 그것이 필요해, 가져다줘'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을까. 잠깐이라도 걸으려면 보행보조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본인은 알고 계셨을 텐데.
그런 부탁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 말씀을 못 하셨을까.
그러고 보면 엄마도, 그런 할머니를 참 많이 닮았다.
지금까지도 늘 엄마가 무엇인가 어렵다 힘들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 했다. 그나마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같이 살 때에 조금씩은 나에게만 아빠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셨고. 성인이 되어서는 아주 가끔 돈 문제를 말씀하셨고. 그 정도.
엄마와 아버지의 사이도 그랬다. "어차피 말해봐야 소용없어"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엄마는 늘 엄마의 입장과 마음 표현을 아버지에게 전달하지 못하셨다. 어렸던 나에게 쏟아내는 아버지의 불만은 늘 "네 엄마는 말을 안 해"였다.
물론, 내 아버지는 벽 같은 분이셨다. 아무리 말을 해도 벽을 치시고 본인의 감정과 옳다고 여기는 신념만을 고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는 것은 아닌데.
엄마는 가족들에게 혹은 본인 형제들, 외할머니에게도 힘들다 도움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고맙다 사랑한다 이런 표현이 없으신 분이셨다.
뒤돌아보면,
나는 외할머니를 닮은 엄마를 많이 닮았나 보다.
지난 내 결혼생활을 뒤돌아보면 예전에는 그저 '우울'뿐이었는데, 지금은 그 속에서 내 마음 표현 하나 제대로 못 했던 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원래 그래, 리엑션이 약해' '내 기대치가 높은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알아서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거잖아'라는 틀 안에 나를 가두어 놓고, 부딪히면 그저 회피하고 더 열심히 표현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씩 쌓여서 갈 곳 없는 마음들은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어쩌면, 상대방이 보기에는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맞아야 하는 폭우 같았을지도.
변명을 하자면, 내 외부 환경이 쉽지는 않았다.
내 남편 역시 평범(?) 하지는 않았다. 가정이 있는데도 일을 하지 않던 기간도 있고. 게임중독(?)이었던 기간도 있고. 아이는 셋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나 살림에 적극적 동참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일 하고 와서도 육아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런 말들은 내 남편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나도 할 말은 많은데.
그래도.
'나 힘들어' '나 외로워' '어떠한 도움이 필요해'라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심지어 '좋다' '고맙다' '사랑한다'라는 표현도 잘 못 했으니, 그는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정말로 몰라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부부는, 이런 점에서는 둘 다 똑같았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장석주. '대추 한 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