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기억에 남는 날들이 있다. 마치 그날의 나 자신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그런 날. 집 안에 햇살이 들어와 조금은 눈이 부셨던 것 같기도 했던.. 나들이 가면 딱 좋겠다 싶은 적당히 따스했던 그날.
주말이었지만 그는 약속이 '생겼다'라고 했다.
당시에 그는 영업직이었기에 주말이고 평일이고 '고객과의 만남'이라는 그 이유가 늘 당연하게 붙어 다녔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수입으로 연결되는 일이었으니 '가지 마라'라고 할 명목이 없었다. 심지어 나는 돈을 벌지 않는 주부였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딱히 같이 할 일이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고, 그는 "네 알겠습니다. 지금요."라는 대답으로 통화를 끝냈고, 나는 그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에 그의 폰을 집어 들었다.
왜 하필 그날 그때 그것을 보고 싶었었는지 잘 모르겠다. 보지 말아야 했고 모르고 있었어야 내 마음이 더 편했을까. 그렇다면 힘든 육아가 '나 혼자 한다'라는 기분이 안 들어서 덜 힘들었을까.
연락을 받아 나간다는 그의 휴대폰 속 최근 통화 목록에 낯선 전화나 낯선 이름은 없었다. 그즈음 그와 같이 게임을 즐겨한다는 친구의 이름이 있었을 뿐. 아마도 그는 미리 얘기를 끝내고 다시 걸려 온 전화를 굳이 내 앞에서 고객인 척 받았던 것이다.
이게 뭐냐고 따지지도 못 했던 나는 굳이 정장을 입고 PC방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투정이 시작된 몇 개월 된 아기를 끌어안고 한 참을 방을 걸었다.
나는 너무 크게 화가 나거나 너무 많이 놀라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얼어버려서 그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시 첫째는 잠깐 안아주다가 뉘이면 잠이 들던 시기 것으로 기억하는데, 평소 팔이 아팠던 나였지만 그날은 굳이 더 오래 아기가 잠이 든 뒤에도 내려놓지 못하고 한 참을 품에 끌어안고 계속 빙빙 걷기만 했었다.
좁은 방 안에서 한 발 한 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이의 체온과 내 발걸음에만 집중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명상'과 비슷한 행동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당시에는 그런 것은 몰랐고, 처음에는 그저 그 행동을 끝내지 못한 것 같았고 나중에는 아이의 품에서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 별 일 아니야.
온전히 내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 작은 생명체에게, 내가 위로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처음 인식하던 순간이어서 더 기억에 남는다.
그대로 거기서 멈추고 고요해졌으면 좋았을 텐데.
놀란(?) 마음은 많이 진정되었지만 그렇다고 생각도 멈춘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이 작은 방 안에서 아기만 보고 있어야 하는 나를 두고 그는 어떻게 혼자만 놀러 갈 수 있을까.
아니, 어차피 같이 있었어도 같이 할 것도 없었고. 어딘가 나가기로 한 것도 아니고. 갈 데도 없고.
왜 꼭 같이 있어야 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어차피 같이 있어도 그는 집에서도 게임만 했었을 거고.
이 기분으로는 같이 있으면 더 힘들었을거고.
그래도, 정말 내 생각은 전혀 안 하는 것일까. 이렇게까지 내 마음이나 사정을 모르고 이기적인 사람과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 심지어 거짓말까지 하면서.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시키면서까지.
가라앉았던 마음은 다시금 요동친다.
생각이 커질수록 분노도 점점 높아졌다.
이유 상관없이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라는 것도 화가 났지만, '누군가와 같이'나를 속였다 라는 것.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은 내 남편과 같이 나를 속이면서 얼마나 웃겼을까. 내가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을까. 차라리 그냥 혼자 PC방을 간다고 나갔다면 더 나았을 것 같기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고작 이십 대 중반의 마냥 놀고 싶은 어린 청년이었고(뭐, 나도 비슷하긴 하지만). 그의 거짓말에 도움을 준 인물은 당시 한동안 같이 게임하다가 연락도 안 하게 된 스쳐 지나가는 행인 중 하나였을 뿐이었으니, 그런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내 평판(?)을 신경 쓸 건 아니었는데.
그는 그저 집에서 할 일은 없고. 놀고는 싶은데 놀러 가려고 하니 나에게 미안해서 거짓말을 조금 했을 뿐이다. 고작 그 정도의 가벼운 에피소드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오늘은 네가 실컷 놀았으니, 다음엔 내가 놀러 갈래'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배신감이 크니 어떻게 해 주면 좋겠어'등의 제안을 하거나 둘 다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럴 수도 있지.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서 심각하지 않은 일에서는 나도 말을 안 하거나 거짓말을 한 일들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