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할머니의 사랑
"그 나이 때는 돌도 씹어 먹는다"라고?
그만큼 젊었을 땐 식욕도 왕성하고, 소화도 잘 된다는 말이겠지만.
타고난 유전자 때문인지, 체질인지 나를 비롯하여 우리집 식구들은 많이 먹는 사람이 없다. 아니, 많이 먹을 수 있는 소화기관을 가진 사람이 없다, 안타깝게도. 위장도 작고 비위도 약하고 체하기도 잘한다. 라면 하나를 3~4명이 나누어 먹고 배부르다고 하고, 햄버거 한 개도 무조건 네 조각 내서 먹기가 기본. 심지어 마카롱까지 4등분 하는 것이 흔한 일이니 말 다했지 뭔가. 그러면서도 위장염, 역류성 식도염, 장염을 달고 산다. 친구, 지인들과 외식을 하고 나서도 꼭 혼자 탈이 나니, 많이 먹기나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속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참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다.
아빠가 회사 근처에서 가끔 한 번씩 소갈비를 사주시면,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여기 1인분의 기준은 도대체 누구야? 나 혼자 10인분도 먹겠네' 차마 말로는 꺼내지 못했지만 항상 부족해서 아쉬웠고,
엄마와 장보고 오는 길에 한두 번 들른 회전초밥 집에서는 마치 끝도 없이 접시를 쌓아두고 먹을 수 있을 것처럼 마냥 설레었다.
하지만 외식 자체가 워낙 드문 일이었기에, 그보다는 엄마나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특식을 기대했다.
약간 엄했던 엄마와는 달리 외할머니는 내게 무한한 사랑만 주셨다. 인천에서 서울, 차로 1시간 거리를 거의 매주 주말마다 갔는데, 늘 손주들을 위한 음식을 한가득 차려주셨다.
난롯불에 구워 먹는 고소한 은행, 외할아버지가 직접 떡메로 쳐서 만들어주셨던 콩가루 듬뿍 묻힌 인절미, 병아리 때부터 길러서 결국 외할아버지 생신 때 저 하늘로 간 꼬꼬닭까지.. 아파트에서 살던 우리에게 외할머니 댁에서 겪는 매일은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기르던 닭은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인지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외할머니가 평상시에 해주시던 닭 요리는 그보다 맛있을 수 없었다. 달콤하고 짭짤한 양념을 입은 닭고기 맛은 언제까지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잘 몰라줬다. 집에서 해주는 닭고기는 빨간 양념의 매운 닭볶음탕(그땐 닭도리탕이라고 주로 불렀다) 아니면 허여멀건한 삼계탕 밖에 더 있냐며 간장 양념의 닭고기는 먹어보지 못했다고 말이다. 데리야끼 소스의 햄버거가 나왔을 때 이런 양념 같은 맛이라고 나는 열변을 토하며 설명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대학 시절이 돼서야 찜닭이 유행하면서 그나마 비슷한 닭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양념에 빨갛고 파란 고추가 듬성듬성 섞여있거나 깨가 잔뜩 뿌려져 있던 밖에서 파는 찜닭은 할머니의 그것과는 달랐다.
간장처럼 진한 밤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캐러멜 같은 연한 갈색의 닭고기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소스가 끈적이지도 그렇다고 묽어서 흘러내리지도 않았으며, 속까지 양념이 살짝 배었지만 백숙처럼 닭 그대로의 담백함이 살아있는 맛. 짜서 물이 먹히지도 않았고, 기름져서 콜라가 당기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맛이었다.
한 손에는 미리 벗겨놓은 닭껍질을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살코기를 발라 오른손 왼손에 있는 닭고기를 한입씩 번갈아 먹으면 뻑뻑하지도 않아 끝도 없이 술술 들어갔다. 껍질에는 양념이 듬뿍 묻어있어 짭조름했고 상대적으로 고기 속살은 하얗고 담백했기 때문에, 한입에 같이 넣고 먹으면 간도 딱 맞았다.
가끔 이모나 삼촌들과 같이 먹을 때 내가 닭껍질을 벗겨서 살짝 접시에 소중하게 놓아두면, 그걸 홀랑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난 니가 안 먹는 줄 알았지"라고 웃었지만, 나는 안다. 고소하고 보드라운 닭껍질이 맛있어서 어린아이인 내 것을 빼앗아먹고 놀렸다는 걸. 울지도 않고, 성질도 내지 않고 소심하게 가만히 혼자 분을 삭이던 나에게 꼭 다른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얘는 나이도 어린 게 왜 이렇게 닭껍질을 좋아해? 닭껍질 많이 먹으면 닭살 된다, 너" 어린 마음에 설마 하며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닭껍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우리 손녀가 먹을 줄을 안다" 면서 닭껍질이 진짜 고소하고 맛있는 부위라며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셨다. 그럼 난 우쭐해서 "할머니, 내 배는 고무배야. 먹어도 먹어도 계속 늘어나서 또 먹을 수 있어" 라며, 평상시 집에서 먹는 양의 두 배도 더 먹었다. 내가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을 보는 할머니의 흐뭇한 미소가 좋아서, 좀 더 좀 더 하면서 먹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고, 아들 딸이 어릴 때부터 둘을 맺어주자고 약속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는 어머니마저 잃게 된다. 외할아버지는 할아버지(나의 고조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형제들 중 유난히 총명해서 고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공부를 열심히 가르치셨다. 할아버지는 연희대학교(현재 연세대학교) 졸업 후 은행에서 일하던 중, 그때까지 연을 이어오던 외할머니 집으로 인사를 갔다고 한다. 친구들의 젊은 시절 약속이 한 친구가 유명을 달리한 상황에서도 지켜졌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처음 인사 와서 식사를 하실 때 뭔가 실망스러웠다고 하셨다. 마르고 키만 삐죽 큰 남자가 뭔가에 쫓기듯 빠른 속도로 밥을 먹는 느낌이었단다. '집에서 밥을 안 주나. 뭐 저렇게 급하게 먹어?' 그때는 고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가 형님 집에서 지내던 때였다. 외할아버지의 형수는 조금 과장하자면 놀부 마누라 같은 캐릭터였나보다. 외할머니의 추측대로 정말 외할아버지는 그때 당시 늘 배가 고프셨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화가 나는데, 외할아버지 역시 우리집 식구답게 평상시에 소식하는 분이셨다. 그나마 한창나이인 20대이다 보니 양이 좀 더 많았겠지만, 이미 할아버지가 직장이 있었고 형수에게 생활비도 내던 상황이었는데 고봉밥은 고사하고 바닥에 깔다시피 밥을 퍼 밥공기 하나도 제대로 안 채워서 줬다는 게 너무 야박하다.
외할아버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 모두 독립운동을 하셨고, 국가유공자(독립유공자)였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러 단체에 속해 있으셨고 후원이 들어오기도 했었나 보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그런 모든 혜택을 형님에게 양도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형님은 문서로 남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도장을 받아갔고, 서류상 외할아버지는 아무런 권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위 친척, 지인들은 모두 외할아버지가 거두셨다. 지금도 은행은 워너비 직장에 속하지만 당시 은행원은 굉장히 하이클래스의 직업이었나 보다. 운전기사가 딸린 차까지 제공해줬다니 말 다했지 뭔가.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도 가끔 학교에서 가정형편에 대한 조사를 했지만, 엄마가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는데. 집에 TV 있는 사람, 냉장고 있는 사람, 세탁기 있는 사람 등을 선생님이 물을 때마다 엄마는 쭉 손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놀 때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우와, 너네 집은 집 안에 화장실이 있어?" 라며 놀라곤 했단다. 그때만 해도 화장실은 집과 분리되어 있었고 게다가 수세식도 아니었으니 밤이면 화장실 가는 자체가 아이들은 무서웠을 것이다. 그러니 떡하니 집 안에 있는 화장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외할아버지 집에는 항상 객식구들이 넘쳐났고, 온갖 사람들이 며칠씩 몇 달씩 자고 가며 북적이며 살았다. 막상 엄마와 이모들은 자기 방을 빼앗긴 채, 다 함께 같은 방에 모여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이 많으니 밥 값도 수월찮게 들었으리라. 외할머니는 큰 솥으로 한가득 밥을 지으셨고, 하루 종일 상을 차리셨다고 한다. 그때그때 사람들이 밥을 찾기 때문이다. 늦잠 자는 사람, 외출했다가 들어온 사람, 야식을 찾는 사람까지.
엄마 물건이 없어지기도 일쑤였다고 한다. 아예 말도 없이 가져가는 사람, 그나마 말이라도 하고 빌려갔다가 부서지고 고장 난 걸 돌려주는 사람, "넌 부모 잘 만나서 다 누리고 살면서, 이거 하나도 못 주냐?"는 사람...
으, 나는 생각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엄마는 오죽했을까. 그래도 외할아버지는 있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주셨고, 외할머니 역시 하루 종일 그 작은 몸으로 동동 거리며 애쓰시면서도 불평 한번 안 하셨다고 한다.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후, 상상도 하기 싫다. 난 내 밥 챙겨 먹기도 귀찮은 사람인데, 게다가 겁 많은 나에겐 드나드는 사람들이 남자라면 약간 무섭기도 하고, 딸 키우는 입장에서는 더욱 꺼려질 수도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외할아버지가 퇴직하신 후였고, 그래서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집 앞마당의 꽃나무를 정성 들여 가꾸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비질(빗자루질)을 하던 모습이 익숙하다. 멋진 차 뒷자리에 앉아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저 내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니까.
나의 어릴 적 추억이 깃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집이자, 화장실이 집 안에 있어서 엄마 친구들에게는 놀라웠지만 내겐 푸세식 이어서 밑으로 빠질까 봐 두려움을 줬던 흥미로움이 가득한 그 집과는 이미 오래전 이별했다. 겨울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 밖으로 나가 연탄불 꺼지기 전에 매번 갈아야 했고 나무를 가꾸고 마당을 청소하는 등 손이 많이 필요했던 집은 연세가 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점점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그 후 나에게 외갓집은 아파트가 돼버렸고, 외할아버지 생신 때마다 북적이며 사람들이 모이던 집은 세월이 흐르면서 조용해졌다. 사람 마음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자신들을 품어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처음에는 고마움을 느꼈더라도 나중에는 살기 바빠 그 마음이 희미해졌겠지. 그나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확 줄어서,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서 오랜 기간 투병하실 때 찾은 사람은 채 열명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늘 깔끔하셨던 성격의 할머니라서 아픈 상태를 보이기 싫으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왠지 서운하고 씁쓸한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오른손만 겨우 조금씩 움직이며 누워계시던 할머니는 정말 작아 보였다. 실제로도 150cm나 되셨을까, 발 사이즈는 220mm 정도였다. 집안에서 제일 작은 나를 보며 할머니는 "우리 손녀, 발 좀 보자. 할머니랑 비슷하네" 라며 발을 맞대 보곤 하셨다. 속으로 난 '할머니보단 내가 발도 크고, 키도 커요'라고 반발했지만 말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바나나는 비싼 과일이었다. 쉽게 사 먹을 수 없는 바나나를 난 참 좋아했다. 할머니를 따라 시장을 가면 한 개를 사서 내 손에 꼬옥 쥐어주셨다. 그렇게 바나나 한 개를 쥐고 걷자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발걸음도 가볍게 신이 났었다.
그때 난 내가 사랑받는 손주라서 할머니가 그렇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챙겨주신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싫은 내색 하나 없이 한평생 베풀었던 할머니 지난날을 뒤늦게 알게 된 순간, 그런 할머니의 삶에 왠지 눈가가 시큰하다. 보답받지 못할 마음이라고, 할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손주인 나도, 제대로 밥 한번 대접한 적 없는데... 직접 만든 음식은커녕 맛있는 음식 한번 대접한 적이 있었던가?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얼마나 바쁘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몇 년이 흘렀다. 내가 할머니 댁을 다녀갈 때면, 맨발로 베란다까지 나와서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드셨던 다정한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 할머니는 처음에는 아파트 입구로 나오는 나를 보러 베란다로, 그리고 지하철역이 있는 뒤쪽으로 걸어가는 나를 보기 위해 얼른 다시 반대쪽 다용도실로 움직이셨다. 혹여라도 서두르다가 넘어지시진 않을까 말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예전에 비해 지금은 보도듣도 못한 맛있는 음식도 많지만, 점점 입맛도 없어지고 그저 살려고 귀찮은 와중에 겨우 챙겨 먹는 것 같은 요즘이다. 나이가 들어서 모든 일에 무감해진 걸까, 그만큼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존재가 이제는 곁에 없다는 쓸쓸함 때문일까?
"내 배는 고무배"라며, 그리운 이들과 함께 맛있게 음식을 먹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