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이 집 밥은 진짜 집밥 같다", "딱 우리 엄마가 해주시던 그 맛인데"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 얼큰한 김치찌개나 구멍 숭숭 뚫린 계란찜을 볼 때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난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속으로는 전혀 공감을 못하고 있다.
엄마의 손맛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리운 맛이다. 우리 엄마는 진짜 요리를 못한다며, "밖에서 먹는 맛이 최고"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친구도 가끔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유명 레스토랑에서 플레이팅에서 한껏 신경을 쓴 요리를 보고, "엄마 밥 같다, 집밥을 여기 와서 먹네"라는 경우는 별로 못 본 듯하다.
엄마는 전업주부셨다. 딸이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집에 가면 늘 엄마는 반갑게 맞아주신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가 안 계셨던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예전에는 그저 아이들 키우는 엄마들은 다 그런가 보다 했다. "엄마는 집에 있는 게 제일 좋아"라는 엄마 말 그대로 믿기도 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엄마의 성향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나가면 다 돈이고, 엄마는 친구 한번 만나는 것도 고민해야 할 만큼 여유가 없는 살림을 평생 꾸리고 사셨다는 걸 안 것은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후였다.
엄마는 한식은 물론 양식, 중식, 베이킹까지 못하는 음식이 없었다.
어릴 때 중국집에 갔던 기억은 거의 없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중국집 위생에 대해 말이 많았다. 짜장 소스에 바퀴벌레가 빠져있었다느니, 짜장 소스가 까만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느니... 초등학생 때는 친구들끼리 별별 얘기를 다 하곤 했다. 엄마도 중국집 음식을 먹는 것을 꺼리셨다. '탕수육에 고기는 적고 튀김옷만 잔뜩이다, 기름을 재탕해서 건강에 안 좋다'며 직접 탕수육을 튀겨 달짝지근한 소스와 함께 만들어주셨다.
핫케잌, 카스텔라, 도넛, 프렌치토스트, 슈크림까지 엄마표 빵은 특히 최고였다.
달달한 달걀물을 머금은 프렌치토스트는 아무리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도 몰랐다. "뭐? 프렌치토스트? 그게 뭐야?" 그때는 집집마다 토스트기가 있었는데, 바삭한 토스트가 아닌 부드러운 토스트가 있다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카페에서 프렌치토스트가 유행한 것도 채 몇 년이 되지 않았으니, 30~40년 전에야 오죽했으랴.
도넛은 만드는 과정부터 재미있었다. 엄마가 도넛 반죽을 판판하게 밀어놓으면, 나는 주전자 뚜껑으로 반죽을 꾹 눌러 도넛 모양을 만들었다. 주전자 뚜껑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두 개의 도넛이 탄생했다. 도넛 하면 생각나는 고리 모양의 도넛 한 개, 그리고 가운데 구멍이 뚫리면서 생긴 동그란 모양의 도넛 한 개. 일석이조, 그 주전자 뚜껑은 도넛 만들기에 진짜 딱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도시락을 하루에 2개씩 챙겨갔다. 보통 때는 점심에 하나 저녁에 하나 먹었지만, 유독 배고픈 날은 2교시 끝날 때쯤 선생님 몰래 먹고 점심시간에 나머지 하나를 먹곤 했다.
학교가 강남 지역에 있어서 그런지,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재벌집 친구도 있었다. 당시 난 그런 쪽에 무지해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친구와 어울렸다. 알고 보니 학생 때부터 다른 아이들은 그 친구 가방이 뭔지, 학용품은 어떤 걸 쓰는지 관심이 있었단다. 3년 내내 교복을 입었지만, 가끔 소풍이나 수학여행처럼 사복을 입었을 때는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말이다. 지금도 유명 브랜드 로고 하나 제대로 모르는 내가 그때는 오죽했을까?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서야 늘 도시락을 같이 먹던 그 친구가 다른 재벌가 아들과 결혼을 했으며, 그 소식이 뉴스에 나올만한 부자임을 인지했다. 우습게도 그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 친구 도시락 반찬이 뭐였었나?'였다. '그 친구도 어머니가 직접 싸주셨을까? 대기업 경영자 엄마도 딸아이 도시락을 손수 만들어 주나?'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결론은 하나. 우리 엄마 밥이 최고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적당히 도톰한 호박전은 맛깔스럽다. 호박을 썰 때의 그 두께가 호박전이 되었을 때의 맛을 좌우한다. 너무 얇은 호박전은 물컹거리고 두꺼운 호박전은 생호박 맛이 난다. 난 고기 체질이라서, 채소 특유의 향이나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호박 맛이 강한 호박전은 별로다. 가끔 전이 먹고 싶어 전집에 가면, 기름이 흥건한 철판 위에서 마치 튀기듯 익어가는 전이 보인다. 엄마 전은 기름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고 참 담백한데.
미역국 역시 구수하고 깔끔하다. 미역국 맛있다는 한정식집에 가도, 깊은 맛이 좀 느껴지나 싶으면 뭔가 텁텁하고 걸쭉한데 엄마 미역국은 개운하고 산뜻하다.
콩나물 무침에 적당량 들어간 참기름은 고소하고, 보일 듯 말 듯 조금 있는 고춧가루는 깔끔한 맛을 선사한다. 맛 좀 내보겠다고 참기름을 많이 넣은 음식은 느끼하기만 한데, 요리 못하는 나는 욕심에 자꾸 많이 넣게 된다. 콩나물을 통통하게 보이려고 물을 먹인다는 말도 있던데, 그래서인지 고깃집에서 반찬으로 나오는 콩나물은 과하게 통통해 싱거울 때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해 놓은지 시간이 지나 비쩍 말라 질기기 일쑤다. 그런데 엄마의 콩나물을 어쩜 그리 딱 적당한 몸집을 자랑하는지, 특별히 비싸지도 않은 평범한 콩나물인데 참 신기하다.
콩나물국 또한 일품이다. 콩나물국을 하면 왜 그렇게 비린 맛이 나는지, 콩나물국 재료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 같은데 말이다. 원래 간단한 음식이 맛 내기가 더 힘들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계란말이에는 꼭 달달 볶은 양념한 소고기를 넣어주셨다. 달달하고 짭짤한 고기는 계란과 어우러지면 간이 딱 맞아떨어진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반찬 하나하나가 맛있고 정갈하다.
외할아버지가 가끔 우리 집에 다녀가실 때 엄마는 햄버거 스테이크와 가니쉬를 곁들여 예쁜 접시에 대접했다. 직접 만든 데미글라스 소스에 감자 샐러드와 갈색빛을 띠는 달큼한 양파볶음, 손가락 크기의 데친 당근까지 곁들이면 그 어떤 경양식집 스테이크보다 근사했다. 할아버지는 조선호텔 스테이크보다 훌륭하다며 칭찬하셨다. 요즘에야 더 좋은 호텔이 많이 생겼지만, 그 시절에는 조선호텔이 최고였다고 한다. 뷔페가 처음 생긴 것도 조선호텔이라고 하는데, "다 먹어도 2000원, 2000원"이라고 엄마가 흉내를 내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래도 가끔은 밖에서 파는 빨갛고 매운 떡볶이나 짜장면이 먹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한 끼만 밖에서 먹어도 집에 와서 엄마 음식으로 마무리를 해야 개운했다.
언제까지도 엄마가 해주신 음식만 제비 새끼처럼 받아먹던 나도 나이가 들어 혼자 자취도 하고 결혼해서 음식을 만들어봤지만, 한식은 참 어렵다. 파, 마늘, 간장, 된장, 고춧가루... 어디에나 들어가는 양념이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그 맛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나마 내가 엄마 손맛을 느낀 것은 연말 직장 회식 때 간 호텔 한정식집에서였다. 어딜 가도 찾을 수 없던 집밥을 호텔에서 찾다니, 잘난 척한다고 할 것 같아 어디 가서 말도 못 했다. 이제야 좀 우리 엄마가 해 준 반찬하고 비슷하네 싶었지만 그래도 못 미친다. 조미료가 들어간 건지 맛을 내려고 간을 좀 세게 했는지, 자꾸 물이 먹힌다.
나는 식구들 중 비교적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인데도 이러니, 엄마 입맛은 오죽하겠는가. 맛집 음식이라고 사가 봐야 엄마한테 좋은 말 듣기 쉽지 않다. "괜찮아, 맛있어. 근데 다음부턴 사 오지 마" 우리 엄마의 단골 멘트다.
자식이라고 있어봤자 음식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빨래, 청소 다 귀찮지만 그중 제일은 요리다. 장 봐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씻고 다듬고 칼질하고 재료 손질하는 것만 해도 한나절 걸리고, 무엇보다 이것저것 넣어봐도 영 맛이 안 난다. 간 맞추느라 계속 맛을 보다 보면 배만 부르고 먹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이러다 보니 엄마 입맛에 맞는 음식은 결국 해드리지도, 사드리지도 못한다. 결국 다 게으른 나의 핑계이지만 말이다. 세월이 가고, 점점 엄마도 힘에 부치고 귀찮을 텐데. 평생 엄마께 얻어먹은 딸내미가 엄마를 위한 음식을 언제나 드릴 수나 있을까, 걱정이다. 걱정만 한다, 오늘도.
어느 때까지도 엄마의 요리 솜씨가 워낙 좋으니까 혹은 요리를 좋아해서, 그렇게 모든 종류의 음식을 손수 만들어 주신다고만 여겼었다. 애들 키우랴, 남편 뒷바라지하랴 바쁜데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을 하루 세끼씩 꼬박꼬박 게다가 간식까지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얼핏 들은 바로는, 아빠 술안주로 노란 슬라이스 치즈 몇 장 사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아빠 월급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엄마는 그나마 반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단다. 아빠는 어마어마한 효자셨다. 할머니, 그리고 결혼한 형제들까지 당연하게 자신이 건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게다가 친구, 지인 하다못해 길 가다가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에게까지 마음을 쓰셨으니 말해 무엇하랴. 막상 아빠 스스로에게는 돈을 쥐어짜듯 아끼셨으면서, 남에게는 평생 베풀고 사셨다. 어린 마음에 '아빠는 천사, 엄마는 음...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라고도 나름대로 판단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로서 그런 남편은 천사가 아니라, 웬수였겠지만.
엄마는 여전히 콩나물 하나 사는 것도 고민하며 들었다 놨다 할 만큼 아끼신다. 예전에는 어린 동생의 단골 멘트가 "또 안 사?"였다. 시장을 따라가면 뭔가 사는 맛이 있어야는데, 엄마는 시장을 몇 바퀴 돌도록 한두 가지 살까 말까 했으니, 따라다니는 입장에서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본인의 손으로 하셨을까. 요리뿐 아니라, 집안 모든 일에 그러셨다. 사람 한번 불러서 뭔가 고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게 무엇이든 다 엄마, 아빠 스스로 해결하셨다. 체력도 약하고, 기운도 없으면서... 지금 생각하면 그러다가 몸만 상하신 것 같아 속상하다. 철 모를 땐 만능 해결사인 부모님이 자랑스러운 마음뿐이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엄마 마음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자식들 어렵게 번 돈 당신에게 쓰지 말라며, 소소한 음식 하나 사가는 것도 불편해하신다. 얼마 전에는 에어프라이어에 붕어빵을 해 먹으면 맛있다기에, 택배로 배달을 시켜 드렸다. 밖에서 파는 붕어빵의 반도 안 되는 미니 붕어빵 하나에 환하게 웃던 엄마 모습에 "그렇게 좋아?" 하며 따라 웃었지만, 웃음 끝은 왠지 죄송스럽고 씁쓸했다.
금방 늘만한 실력이 아닌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만. 지금부터 요리라도 좀 배우면, 몇 년 후에는 엄마 손맛과 비슷하게 흉내라도 낼 수 있으려나.
아쉬운 대로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엄마 입맛에 맞을만한 깔끔한 한정식이라도 대접해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