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현관에서 손주들 신발을 챙기고 가방을 메던 중 하민이가 할머니 그대로 갈 거냐며 깔깔거렸다. 중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잠옷 바지를 입은 채였다. 하민이는 정말 잠옷 바람으로 나갈까 봐 부끄러워하며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다급히 재촉했다.
이후로 하민이가 늑장 부리는 날엔 일부러 옷을 덜 입은 채 그대로 출근하겠다고 장난을 쳤다. 하민이의 등원 준비 속도는 빨라졌다.
퇴근 후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도착하면 저녁 준비와 씻기고 재우는 일까지 숨 돌릴 틈 없었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함께 누우면 같이 잠들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했다.
아이들이 잠드는 순간부터 시계는 빨리 돌아간다고 느끼는 건 육아 중인 엄마들의 공통된 생각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깰까 봐 그리고 다른 집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조심스럽게 집안일을 해치우고 나면 자정을 넘어서기 일쑤였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새벽 한두 시가 되어 있었다. 늦게 잠드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어떤 날은 두세 시간 겨우 자고 출근해야 했다.
문득 일찍 자고 새벽 시간에 책을 읽으면 어떨까 싶었다. 5시에 일어나는 것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지만 그 대신 나에게 주어진 여유로운 한 시간의 보상은 달콤했다.
아무도 깨지 않은 어둠 속에서 밀랍 초에 떨어뜨린 아로마 오일 향기를 맡으며 따뜻한 차를 천천히 마셨다. 고요한 아침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졌다.
이렇게만 계속된다면 좋겠다고 기쁨에 취하기도 전에 해가 길어지면서 손주들의 기상 시간도 덩달아 빨라졌다. 손주들이 새벽 6시에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는 4시쯤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다.
불빛 때문에 손주들이 깰까 봐 일부러 거실로 나가 책을 읽었는데 꼭 하민이가 깨서 나를 찾아 울곤 했다.
할머니가 없으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테니 거실로 나오라고 알려주었다. 며칠을 반복하자 잠이 깨는 날이면 졸음 딱지를 얼굴에 가득 묻히고 배시시 웃으며 내게 다가와서 옆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다시 잠들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는 맨날 책 읽는 사람이야”
손주들에게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이 좋았다.
짧게 끊어 읽던 독서에 대한 아쉬움과 가끔은 아이들의 끊임없는 재잘거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휴가가 간절했다.
온전히 책 읽기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유튜브에서 여배우가 대본만 들고 호텔에 머물며 대본을 읽으며 외운다고 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낯설지만 편안한 공간에서 하루 종일 책과 머물 수 있을 그 시간의 평화로움이 욕심났다. 일상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는 그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멀지 않은 호텔 숙박권을 예약했다. 1박 2일 동안 오롯이 책만 읽겠다고 다짐했다. 가방에 서너 권의 책과 노트북 태블릿을 넣고 잠옷을 챙겼다.
호텔 도착 전에 치킨 한 마리를 포장하고 느끼함을 달래 줄 귤도 샀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가슴은 계속 설렜다.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열의로 정확한 시간에 체크인했다. 군더더기 없이 욕실과 옷장 하나 그리고 안쪽으로 하얀 시트의 침대와 책상과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세면도구를 욕실에 두고 노트북과 책들을 책상 위에 정리했다.
커튼을 여니 전면 창으로 햇살이 지친 몸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잠옷까지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방을 둘러보니 고요했다.
집에서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적막이 방 안을 채웠다. 내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였다. 오랜만에 느껴본 정적인 공간과 혼자라는 사실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조용한 음악을 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건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오롯이 몰입한 순간의 행복감을 만끽했다.
읽다 지칠 즈음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면 도시의 야경이 창문 너머로 은은하게 번져왔다. 그 밤의 고요함과 도시의 불빛이 절묘하게 섞여 일상의 분주함을 잊게 했다.
귤 하나를 까서 입안에 넣고 상큼한 향과 단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혼자 먹는 치킨 조각 하나조차도 왠지 모르게 특별했다.
몇 번이나 비슷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독서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던 시간이 아쉬워 책을 덮기조차 망설여졌다. 혼자 있는 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고요한 밤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바깥세상의 소음도, 아이들의 숨소리도, 해야 할 일의 목록도 모두 멀어진 자리에서, 오랜만에 내 안의 고요와 마주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 속에서 마음 한켠이 서서히 풀어졌다.
생각보다 더 많이 지쳐 있었고, 생각보다 더 많이 외롭고,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나를 잊고 살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정을 넘긴 시계는 야속하게도 잠을 재촉했다.
책장을 덮으며 ‘잠시만 눈을 붙이자’고 생각했지만,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아홉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침대에 파묻힌 채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편하게 자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몸은 말랑하게 풀려 있었고,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낯선 해방감이 물처럼 스며들었다. 혼자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포근하게 다가왔고, 그게 외롭지 않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누구의 시선과 기대, 간섭도 없이 흘러간 시간이 내게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혼자만의 시간은 단순히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삶 곳곳에 흩어져 있던 ‘나’를 다시 모으고, 소외되어 있던 마음 한 조각 한 조각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나는 일이었다.